(8)윤명성 | ‘가슴으로’ 인연 쌓아온, 세월 흘러도 한결같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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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 ‘솔밭숯불갈비’

미래는 과거의 인연으로 연결된다. 어떤 특정지역을 여행할 때나 기억할 때 보통 그 지역에서 인연을 함께했던 사람이나 맛집을 떠올린다. 갈 만한 식당을 찾을 때도 과거에 찾았던 맛집을 생각한다.

종로경찰서장 재직 시절, 경복궁을 배경으로 찍었다./ 윤명성 제공

종로경찰서장 재직 시절, 경복궁을 배경으로 찍었다./ 윤명성 제공

1984년 경찰대에 입학해 올해로 39년 제복 생활을 마무리한다. 총각 파출소장부터 경찰서장, 경찰청 대변인, 세종경찰청장, 경찰수사연수원장 등을 거치며 애환과 영광을 함께했던 세월 중 종로경찰서장으로 근무했을 때 잊지 못할 사람과 맛집이 있다.

2015년 3월 5일 아침이었다.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가 세종문화회관에서 행사 중 칼로 피습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주한 미국대사가 피습당한 사건은 우리나라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관련 경호책임자를 엄중문책하라는 당국의 지시가 떨어졌다. 사건은 연일 대서특필됐다. 청운의 꿈을 안고 경찰대에 입문해 어렵게 오른 경찰서장 자리였는데, 그야말로 위기였다. 1964년 주일 미국대사가 피습당한 사건이 일본에서도 있었는데, 이 때문에 일본 경찰청장관은 사임했다.

사건 전날, 경찰서 회의에서 미 대사가 연례행사로 조찬 특강을 한다는 내용을 보고받았다. 어떤 경호 요청이나 경비 지시가 없었음에도 자체적인 판단으로 혹시 모를 위해나 행사방해에 대비해 행사장 주변에 형사, 기동대, 순찰차 등을 배치하고 검문검색 등 경비를 강화했다. 덕분에 사건 발생 직후 범인을 현장에서 바로 체포할 수 있었다. 리퍼트 대사는 인근병원으로 옮겨 응급 구호 조치를 했다. 그렇다고 사건 발생 자체가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 공직자로서 최대 위기의 순간이었다.

구세주가 나타났다. 바로 언론이었다. 경찰청 대변인 등 근무 과정에서 기자들과 오랜 세월 각종 인연을 맺었는데, 그들이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 소상히 알지는 못하지만, 결과적으로 칼럼과 방송 등을 통해 많은 도움을 줬다. 종로경찰서장은 사전에 경호 요청이 없었는데도 자체 판단으로 경찰을 배치해 범인을 바로 검거하고 미 대사도 구조했는데 왜 우리나라는 사건만 나면 ‘엄벌’ 타령이냐, 문책보다 제도적 개선책 마련이 중요한 것 아니냐, 그런 취지였던 걸로 기억한다. 미 대사도 현장근무를 했던 종로 경찰을 초청해 파티를 열고, 한국 경찰의 조치에 감사를 표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문책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연을 떠올렸다. 대변인실에서 업무적으로 한때나마 만났던 출입기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후 서로 근무지가 바뀌어도 소주 한잔하며 지속해온 인연이, 어느 날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형태로 위기가 엄습했을 때 결과적으로 필자를 구한 셈이었다. 당시 기자들과 종종 갔던 맛집이 바로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 43번지에 있는 ‘솔밭숯불갈비’다. 1993년 낙원상가 옆 골목길에서 문을 열었다. 30년째 참숯으로 구운 돼지갈비와 한우를 주메뉴로 운영 중인 식당이다.

사진 / 윤명성 제공

사진 / 윤명성 제공

필자는 그중에서도 숯불돼지갈비를 좋아한다. 간장과 양파, 대파 등 갖은 채소와 비밀 재료를 넣고 2시간 끓여 식힌 후 하루를 숙성시켜 돼지갈비에 양념을 한다. 특이한 건 갈비 살코기에 일일이 칼집을 내 양념을 넣고 고루 배게 하여 돼지갈비의 풍미를 높인다는 점이다. 참숯불에 구우면 육질이 부드럽고 구수한 고구마 향이 난다. 참숯이 온도를 잘 맞춰주니 육즙이 풍부해 씹는 맛도 좋다. 주인이 참숯을 고집하는 이유다. 참숯에 적당히 구운 돼지고기를 평창동 농장에서 농약 없이 직접 재배한 방풍나물과 상추, 매실과 곁들여 한 입 쌈을 싸서 먹으면 그야말로 감칠맛이 난다. 깊은 식감이 배가된다. 숯불구이 돼지고기를 먹은 후에는 온면이 제격이다. 한우 양지와 갈빗살 등을 푹 고아 국물이 담백하다. 70%만 익힌 면발에 살짝 데친 한우 불고기와 함께 참기름, 김가루, 대파로 만든 고명을 얹고 팔팔 끓인 한우 국물을 부어 낸다. 고기가 들어간 뱃속이 편안해진다. 소화가 절로 되는 느낌이다.

노포 맛집은 오뚝이와 같은 복원력이 있다. 오랜 전통과 역사가 거저 주어진 게 아니다. IMF와 코로나19 등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지금까지 잘 운영하고 있다. 식당 운영 수입으로 청소년들에게 장학금 등 사회적 기부도 한다고 들었다. 맛집은 단순히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장소가 아니다. 미래의 인연으로 이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한 개인이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는 성장의 정도를 결정하지만, 누구와 어떤 인연을 맺느냐는 운명을 결정한다. 인연은 사람을 가슴으로 만날 때 이어진다. 우리는 직장과 지역사회 등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어떤 사람은 머리로 만난다. 이런 사람과는 계산이 끝나면 인연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반면 가슴으로 만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과는 근무지가 바뀌어도, 세월이 흘러도 인연이 계속된다. 출입기자들과 가슴으로 함께했던 인연이 운명을 좌우했다. 맛집도 그렇다. 세월이 흘러도 늘 생각나는 집이 있다. 그곳에서 가슴으로 함께했던 인연을 떠올린다.

“자기를 이끌려면 머리를 쓰고, 타인을 이끌려면 가슴을 써라.” 미국의 리더십 전문가인 존 맥스웰(1947~ )이 한 말이다.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도 생각난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는 데 70년이 걸렸다고.

요즘 보험사기, 보이스피싱, 전세사기 등 범죄가 빈발한다. 2022년 한 해에만 보험사기로 적발된 액수가 1조원을 넘었다. 머리를 써서 남을 등쳐 먹는 사람들이다. 갈수록 세상이 각박해진다. 갑질 신고가 늘고, 고소 사건도 넘쳐난다. 이렇게 세상을 머리로만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리퍼트 대사는 수술 후 병원을 나서며 “같이 갑시다”라고 말했다.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과 가슴으로 함께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

재직 중 보험범죄 연구로 범죄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정년퇴직 후에는 대학교수로서 인생 2막을 시작하고자 한다. 그간의 경험과 지식을 사회를 위해 유용하게 활용해 더 안전한 세상 만들기에 기여하고 싶다. 시냇물이 흘러도 조약돌은 남는다. 세월이 흘러도 맛집 ‘솔밭숯불갈비’는 늘 그 자리에 있다. 거기서 뛰어난 풍미의 숯불돼지고기와 함께 가슴으로 소주를 들이키면서 운명을 바꿔놓을지도 모를,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가 보면 어떨까.

필자는 1988년 경찰대를 졸업하고 화순경찰서장, 종로경찰서장, 경찰청 대변인, 세종경찰청장과 경찰수사연수원장 등을 거쳤다. 현재 인하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초빙교수로 있다. 보험범죄를 주제로 범죄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정년퇴직(2023. 6. 30) 후 범죄로부터 더 안전한 세상을 위해 강의와 저술 등의 다양한 사회활동을 할 계획이다. 주요 저서로 <형사소송법>, <경찰학개론> 등이 있다.

<윤명성 전 경찰수사연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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