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진아.” 2023년이 절반도 지나지 않았지만, 상반기 최고의 유행어를 꼽아보자면 이 한 마디가 아닐까 싶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에서 학교폭력 피해자인 문동은(송혜교 분)은 가해자 박연진(임지연 분)의 이름을 끊임없이 호명한다. 그 덕일까. 지난 3월 10일 16부작 시리즈가 모두 공개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연진’이란 이름이 누구보다 널리, 많이 불리고 있다.
이 단순한 호명은 내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모두가 가해자의 이름을 연호하는 세상이라니. 동은이 학폭 가해자들에게 행한 그 어떤 복수 행위보다 강력했다. 수많은 사건·사고 기사에서 가해자의 이름은 알파벳 혹은 성씨 정도로 남지만, 어떤 피해자의 이름은 희생으로 이룬 법안 앞에 붙어 영원히 불린다. 가해자 이름이 불리는 때도 있지만, 신상공개가 이뤄질 만큼 사회가 인정한 흉악 범죄일 때뿐이다.
최근 2개월 교제한 남성으로부터 사생활 폭로 협박·스토킹을 당한 뒤 현재는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한 여성에 관한 기사를 썼다. 기사에 피해자는 실명으로, 가해자는 A씨로 썼다. 댓글을 살피던 중 “피해자의 이름은 공개하고, 왜 가해자 이름은 A씨냐. 기자도 한편이다”라는 의견이 눈에 띄었다. 억울함을 알리기 위해 모든 걸 공개하겠다고 한 피해자 측의 뜻과 별개로,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익명에 기댄 가해자의 세상은 여전히 견고했고, 피해자는 이름마저 세상에 내어놓고서야 사람들의 지지를 겨우 얻을 수 있었다.
지난 4월 8일 어린이보호구역 음주운전 사고로 목숨을 잃은 배승아양의 부모님도 가해자의 엄한 처벌을 바란다며 딸의 실명을 언론에 공개했다. 피해자들의 이름은 대부분 이런 이유로 세상에 알려진다. 정인이법, 민식이법, 태완이법, 윤창호법, 김용균법…. 피해자의 희생으로 세상이 조금씩 변하지만, 법안에 반대한 이들에 의해 이름이 더럽혀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네이밍 법안’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지만, 법 테두리에 담기지 못한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으면서 피해자의 이름은 끝내 호명되고 만다.
<더 글로리>가 선사한 카타르시스는 그래서 씁쓸하다. 현실 세계에 빗대 보면, 가해자의 이름이 영원히 호명되는 사회는 언뜻 정의롭다. 하지만 가해자의 실명을 공개하는 ‘사적 제재’가 이뤄져야만 피해자 구제가 완성되는 법치국가는 정상으로 볼 수 없다. 모두가 사적 복수를 꿈꾸는 현실은 법치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피해자의 이름이 호명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이름이 불리기 전에 사회안전망을 이미 구축했어야 한다.
담임 선생님이 학폭 피해 사실을 알린 어린 동은을 적극적으로 도왔다면,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은 경찰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면, 부모님의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한 동은이 여인숙에 방치되지 않고 국가의 보호 아래 있었다면. <더 글로리>라는 명작은 탄생하지 못했겠지만, 동은의 삶은 좀더 밝은 빛 아래 있지 않았을까. 가해자들도 복수의 대상이 되는 대신 재교육을 통해 다른 삶을 살지 않았을까. 연진도, 동은도 호명될 필요 없는 미래를 꿈꿔본다.
<이유진 사회부 기자 yjle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