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적 병역거부자’라는 말이 나를 수식할 단어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병역거부를 결단한 후에도 기꺼이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양심이란 단어가 지니는 무게를 견딜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냥 병역거부자이고 싶었습니다. 수많은 인터뷰에 나서야 할 때면, ‘여호와의 증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스스로를 ‘평화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자’로 소개했습니다. 어설프게 병역거부자의 얼굴 역할을 도맡았기에 병역거부 운동 전체를 욕보이기 싫었습니다. 극렬한 혐오를 내뿜는 사람들의 비위를 조금이라도 덜 거스르기 위해, 기사를 읽을 사람들의 극히 일부라도 설득하기 위해 최대한 언어를 정제했습니다. 그래도 악플을 수만개나 받았습니다. 병역거부자의 정형에 들어맞는 외모나 말투는커녕 누구라도 감동할 만한 극적인 서사를 갖추지도 못한 탓입니다. 그래서 흔들렸습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로 불릴 자격이 부족하다 여기며, 양심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으려는 자가당착에 빠졌습니다.
지난한 재판이 끝나고 감옥 세계에 발을 들이면 양심을 고민하는 일이 끝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골방 안은 이내 시간이 닿지 않는 곳에 묻어둔 기억으로 잔뜩 채워졌습니다. 홍수처럼 밀려드는 과거 속에서 외면했던 양심과 맞닥뜨렸습니다. 가상의 폭력조차 거부하는 병역거부자다운 모습은 찰나처럼 스쳐갔고, 갈등하는 상대에게 정서적 폭력을 가하는 병역거부자답지 않은 표정이 되레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인권활동가를 자처한다면서 한명, 한명의 사람으로 대해야 할 죄수들을 짐승 무리로 치부하는 내 모습을 볼 때면 그저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거울을 바라볼 용기도 나지 않았습니다. 권위주의와 위계에 삶을 걸고 맞서리라 다짐했건만, 어느새 서열놀이에 자연스럽게 편승해 몸도 마음도 편히 지내려는 비겁한 사람과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이건 내 모습이 아니라고, 여기선 나로 존재할 수 없다고, 그러니까 징역살이의 단 하루도 머릿속에 남기지 않아야 한다’고 내면에 속삭였습니다.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봄의 초입에 시작한 징역살이가 겨울에 들어섰을 때 비로소 제대로 성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슬 퍼런 시절에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감방에 갇혀 터무니없이 열악한 공간에서 17년을 지내며, 수시로 고문당하면서도 사상과 고집을 꺾지 않으려 몸부림치던 괴팍한 어른의 글을 접한 후에야 깨달았습니다. 고작 1년 6개월짜리 징역을 살면서,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한 나머지 양심의 전원을 꺼버린 채 지내왔다는 것을. 주제에 양심수를 자칭하며 여기저기 편지를 흩뿌리고 비장한 척은 혼자 다 했습니다. 글로 종이 한장을 채우기 버거웠던 이유가 컴퓨터를 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우겼지만, 돌이켜보니 양심에 거리낌 없는 삶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사계절을 한바퀴 돌아 바라고 바라던 대로 쇠창살과 작별하며 병역거부자로서의 과업을 마쳤습니다. 줄무늬 없는 햇살을 바라보는 기쁨으로 잠시 위안을 얻습니다만, 감옥의 문턱에서 시작된 괴로움이 쉬이 가시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양심을 벼리는 여정은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번 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홍정훈 한국도시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