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쇳밥 먹는 청년공, 천현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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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란 개인의 역사다!” 다이어리 맨 앞장에 거창하게 써놓은 문구였다. 저 글귀대로라면 내 역사 속엔 숱한 외세의 침략이 있었던 게 아닐까. 몇달 꾸준하게 쓰다가 2년 건너뛰고, 격주에 한 번씩 쓰다가 아무 복선 없이 월 단위로 넘어가는 등 구멍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반성하는 의미로 일일보고서처럼 현장을 써내려갔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점차 일감이 줄어갔다. 원청인 SnT가 곡소리 할 때쯤에 하청인 우리 회사는 이미 사십구재 지낸 뒤였다. 재고 물품이 공장에 한가득 쌓여갔다. 인원 감축을 안 하고는 도저히 못 버틸 상황에 하필 그때 찍힌 게 나였다. 이사님은 하루하루 나를 못살게 굴었다. 쉬는 시간 외에 화장실도 못 가게 했다. 일하는 라인을 계속 바꾸고, 했던 청소를 다시 시키는 고전적인 수법이었다.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다. 당시 인터넷에선 어떤 강사가 용접공 비하 발언을 했다고 해서 시끌시끌했다. 그 강사 말인즉 ‘공부 못 하면 용접이나 하라’는 뜻이었는데,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다. 직장생활 8년차, 하루하루 부조리함 속에서 허우적대다 보니 화를 다스리는 데 익숙해졌다.

얼마 안 가 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됐다. 말로만 듣던 유급 휴가를 가게 됐다. 2020년 2월부터 한달씩 휴가를 보내고, 8월까지 물량 수주가 없으면 권고사직을 받겠다고 했다. 회사에서 사실상 사형집행일을 선포한 셈이었다. 두달 일하고 한달씩 쉬는 동안 무엇을 할지 계속 고민했다. 용접기능장 자격증을 준비할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직장을 알아볼까? 갈림길에서 며칠 고민하는 동안 이 순간 그 자체가 행복하다는 걸 느꼈다. 빚 걱정 안 하고 그저 운동하고 책보다가 글 쓰면서 잠드는 하루하루. 그간 타의로 치열한 삶을 견뎌야 했던 내겐 처음으로 돈 걱정 없는 자유시간이었다.

꿈과 현실 사이에 서다

글로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생각만 했던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동생을 끌어들여 삽화도 부탁했다. 치열하게 토론도 했고 공모전 계획까지 세웠다. 와중에도 꾸준히 독서를 했다. 그때쯤 한참 읽고 있던 책은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였다. 저자는 집 베란다에서 엎어지면 코끝에 담장이 닿는 경남대 양승훈 교수님이었다. 연구실을 찾아가 그동안의 경험을 말씀드렸고, 교수님이 내용을 정리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가 공유하면서 꽤 유명한 사연이 됐다.

실업급여를 신청한 후, 야심차게 시작한 웹소설 프로젝트는 열정을 태우고 잿더미만 남았다. 스토리는 부실했고 인물은 납작했다. 결국 여섯달 동안 쓴 소설은 미완의 이야기로 남긴 채 2021년을 맞이했다. 늘 책과 함께하던 카페도 문을 닫았다. 즐거웠던 과정에서 씁쓸한 결과만 남긴 채 다시금 일자리를 찾아 헤매었다. 가뜩에 용접 일자리 없는 창원 바닥은 코로나19를 맞이해 아예 빙판길이 됐다. 또다시 지난한 취업과정이 예상되던 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전화가 왔다. 저번에 해고당했던 곳과는 또 다른 현대로템 하청업체였다.

이번에 맡게 된 직무는 열차 안쪽 제관 업무였다. 철저한 팀 단위 일이라 손발이 잘 맞아야 했고, 모든 공정에 통달해야 했다. 거두절미하고 이제껏 해본 일 중 가장 ‘어려웠다’. 무거운 가공 철판을 들고 다니는 것도 모자라 열차마다 규격이 달라 도면을 계속 살펴가며 일해야 했다. 그간 느긋하게 비드를 만들며 용접하던 내겐 얇은 박판 또한 낯선 요소였다. 조금만 용접기를 늦게 끌거나 밀어도 바로 박판에 구멍이 났다. 품질검사 기준 역시 칼 같아서 1년 동안 다닌 직원도 물어물어 일할 정도였다.

팀원들은 모두 나보다 연하였다. 현장 공기는 썩 좋지 않았다. 직원들은 날이 서 있었고 실수에 민감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 난이도와 임금이 맞질 않는데다 정규직은 아주 적은 수만 뽑았다. 정규직 전환에 실패한 친구들은 월급으로 딱 한달 먹고사는 삶에서 발전이 없으니 짜증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마침 비트코인의 유행도 팍팍한 분위기에 한몫했다. 어떻게든 암울한 현재에서 탈출하려 생활비만 빼고 모두 코인판에 밀어넣었지만, 승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살얼음 같은 분위기 속에서 입사 한달 차까지 업무에 적응하지 못한 채 겉돌았다.

직접 전하는 우리 이야기

5년 가까이 활짝 피어보지도 못한 채 봄장마에 수모를 겪던 벚꽃이 드디어 만개한 4월 7일, 20대 남자들이 지방 재보궐선거에서 야당후보에 몰표를 던졌다. 투표결과를 두고 다들 이런저런 말이 많았지만 철저히 주류와 관찰자 시점일 뿐 내 눈에 보이는 수많은 청년공들이 담론장에서 엑스트라 취급을 당했다. 안쪽에선 정치 얘기만 나와도 학을 떼는 판인데, 바깥에선 우리에게 보수화의 딱지를 붙이고 있었다. 이 현상이 하도 기가 막혀 페이스북에 글을 썼다. 그 게시물이 생각지도 못하게 유명해지면서 온갖 평가에 노출됐다.

호평하는 이도 많았지만 지탄도 있었다. 철저히 남성 시점에서만 이야기한다는 비판이었다. 그래서 부족하게나마 여성 청년공인 은주의 이야기도 썼다. 그 글 역시 반응이 좋았다. 그제야 알았다. 다들 공장 일하는 청년 이야기에 관심 없는 게 아니라 그저 현황을 정확히 전달해 줄 사람이 없었을 뿐이라는 것을. 언론에서 다루는 이야기는 전태일 열사의 사연 이후 거의 발전하지 못했다. 공장 노동자는 늘 죽도록 일하고, 온갖 위험에 노출된 채 저임금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불쌍한 인간상이었다. 기자들 손을 빌려 세상 밖에 나온 노동자의 사연은 늘 비극 전시회로 마무리되곤 했다. 실질 대책을 찾으려면 결국 당사자의 목소리가 있어야 했는데, 우리 공장 인생들은 자기 사정 전달하는 일에 너무도 서툴렀다. 기회가 와도 고사하기 일쑤였다. 공론화시킨 내부자가 받을 불이익을 두려워했고, 앞에 나선들 현실이 바뀌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지극히 합리적인 개인 선택을 어찌 무어라 할 수 있겠는가.

재보궐선거 3주가 지난 4월 29일, 방송 출연 제의가 왔다. 우리 이야기를 전달할 기회였다. 나서자. 전하자. 바꾸자. 원고를 준비하고, 자문을 구해가며 쉬는 시간마다 어색한 곳은 없나 계속 들여다봤다. 마침내 방송일, 왼팔에 구멍 숭숭 뚫린 작업복을 챙겨입고 창원 KBS홀에 들어섰다. 심장이 들썩대는 와중에 간신히 입을 뗐다. 새로운 삶의 문을 연 첫마디였다.

“쇳밥 먹는 청년공, 천현우입니다.”

<천현우 용접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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