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 빅 씨·The Big C>는 시한부라는 무거운 소재를 캐시와 가족들의 충격과 좌절 등 극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감정의 기폭제로만 활용하기보다 오히려 그녀의 ‘선택’과 ‘태도’를 보여주는 장치로 활용하고 있다.
열흘간의 추석 연휴가 성큼 다가왔다. 연휴의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시, 고향 가는 길 교통체증이 눈에 선하고, 가족과 친인척의 잔소리가 벌써부터 걱정이다. 성인 10명 중 9명이 명절 스트레스를 받는 것으로 나타난 가운데 기혼·미혼 여성들은 쉴 틈 없이 음식 준비를 하거나 친인척이 연애와 결혼을 묻는 상황을 스트레스로 꼽았다. 잠깐 극장으로 피신하려고 해도 인파가 부담된다. 이럴 때 내 손 안의 TV로 푹 빠져보는 건 어떨까. 어릴 적 동심을 들춰보거나, 일탈을 꿈꾸거나, 범죄현장을 누비거나. 드라마 속 우먼파워, 명절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컬렉션을 소개한다.
스릴러물 원한다면! 미국 드라마 AMC <더 킬링>
<비밀의 숲>에 한여진 경위(배두나 분)가 있다면, <더 킬링·The Killing>에는 새라 린든 강력반 형사(미레유 에노스 분)가 있다. 하나로 질끈 묶은 머리, 직설적이고 건조한 말투. 사춘기 아들을 둔 ‘워킹맘’ 린든 형사는 결혼을 앞두고 캘리포니아로 가려다 10대 소녀(로지 라슨)가 의문의 살인을 당하면서 시애틀에 발이 묶이게 된다. 시즌 내내 부슬비가 내리거나 먹구름이 낀 날씨라서 어둡고 축축한 분위기가 감돌고, 사건도 날씨처럼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그럴수록 린든 형사는 진득하게 범인을 찾는 데 골몰하고, 가족·학교·정치로까지 사건이 얽혀 있음을 알게 된다.
<더 킬링>은 덴마크 드라마 <범죄>(Forbrydelsen ·2007)를 리메이크한 범죄 스릴러 드라마다. AMC 방영 당시 역대 시청률 2위를 기록할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더 킬링>은 에피소드 위주가 아닌 시즌 내내 한 사건을 긴 호흡으로 다룬다. 추격과 반전을 거듭하며 긴장을 고조시키는 기존 스릴러물과 다르다. 그 힘은 배우 미레유 에노스의 연기를 통해 배가된다. 157cm의 작은 체구에도 극을 이끌며 존재감을 입증한다. 2012년 새턴 어워즈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아, 한 경위 옆에 황시목 검사가 있다면 린든 형사 옆에는 풋내기 형사 홀더가 있다.)
현실 웃음이 필요하다면! 영국 시트콤 BBC <미란다>
‘철들지 않는 거구의 노처녀’라고 소개되는 36살 미란다. 미란다를 정의하자면 장난감 가게 주인, 셰프 게리를 짝사랑하는 여자, ‘혼자 놀기’의 달인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다. 시트콤 속 미란다의 매일은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다. 체구 때문에 종종 ‘아저씨’로 오해받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다. 아니, 굴하지 않는다. 오히려 보란 듯이 하고 싶은 일을 벌인다. 쇼윈도에서 마네킹인 척하다가 구경하는 사람을 화들짝 놀라게 만들거나 심각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바삐 출근하는 사람들 사이로 말 달리기 시늉을 하면서 지나간다. 미란다의 행동이 우스워 보여도 고정관념(?)을 탈피한 그의 유쾌한 일탈에 한 번쯤 동참해보고 싶은 충동이 생길 정도다.
<미란다·Miranda>에 영국 특유의 언어유희와 ‘병맛’ 개그 코드가 곳곳에서 묻어나는 이유는 주인공인 미란다 하트의 공이 크다. 그의 반자전적 시트콤이자 직접 극본과 프로듀싱에 참여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뼛속까지 유쾌할 것만 같은 미란다는 실제 공황장애에 시달려 2년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어느 순간 자신에게 미안해 어렵사리 직장생활에 발을 내디뎠고, 오랫동안 꿈꿔온 코미디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명절날 나에게 어울리지 않게 젠 체하느라 고생했다면, 내 멋대로 살아가는 내공을 쌓고 싶다면 강력 추천한다. 혹, 미란다의 매력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사람은 심화편으로 미란다 하트의 책 <미란다처럼: 눈치 보지 말고 말 달리기>를 읽으면 금상첨화.
따뜻한 힐링을 원한다면! 미국 드라마 Showtime <더 빅 씨>
철부지 남편, 반항하는 사춘기 아들, 노숙자 오빠. 참 감당 안 되는 이들을 한 세트로 뒤치다꺼리하며 살아가는 ‘바른생활’의 주인공 캐시(로라 리니 분). 때로 불만과 불평을 늘어놓긴 했어도 평범한 교사로, 중산층 주부로 무탈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흑색종 4기라는 말기암 판정을 받으면서 그녀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린다. 드라마 제목도 암(Cancer)의 약자를 따서 만들었다. <더 빅 씨·The Big C>는 시한부라는 무거운 소재를 캐시와 가족들의 충격과 좌절 등 극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감정의 기폭제로만 활용하기보다 오히려 그녀의 ‘선택’과 ‘태도’를 보여주는 장치로 활용하고 있다. 즉, 죽음을 다루고 있지만 ‘삶’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드라마 오프닝에서 수영장에서 마음껏 유영하는 장면은 캐시가 어렸을 때부터 간직해온 꿈이다. 캐시는 미친 듯이 부은 적금을 깨고, 집 뒤뜰에 야외 풀장을 만드는 일탈을 감행한다. 하지만 그렇게 염원한 일도 순탄하게 굴러가진 않는다. 공사가 멈췄을 때 “뭐 사는 게 문제이지, 죽는 게 문제인가”라고 내뱉는 그 한마디. 캐시는 그렇게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별을 준비하고, 그 안에서도 자신만의 하루를 채워가는 데 집중한다. 이와 더불어 시즌 내내 미국 중산층의 문화뿐 아니라 보험과 의료시스템도 살짝 엿볼 수 있다. 결론은 “인생은 한 번뿐”이라는 ‘욜로(YOLO)’ 열풍에 한 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에게 안성맞춤이다.
최신작을 원한다면! 캐나다 드라마 CBC <앤·ANNE with an E>
올해 방영된 따끈따끈한 드라마. 총 7개의 에피소드로 ‘정주행’하기에 부담스럽지 않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동명 원작소설 <빨간 머리 앤> 탄생 110주년을 앞둔 가운데 제작된 드라마다. 고아 소녀 앤이 나이 든 커스버트 남매가 살고 있는 초록 지붕집에 실수로 입양되면서 겪는 성장기를 그린다. 아일랜드 출신의 캐나다 아역배우 에이미 베스 맥널티가 무려 1889대 1의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앤 셜리 역할을 따냈다. 에이미는 제작 단계에서부터 화제가 됐을 정도로 연기면 연기, 원작 속 앤의 모습과의 싱크로율도 높다.
막상 드라마의 뚜껑을 열어 보면 우리에게 친숙한 앤의 모습이 아니라서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있다. 앤은 생후 3개월 만에 고아가 된다. 위탁가정에서 여덟 아이의 보모로 살며 학대를 당하고, 학교에서는 따돌림을 당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감성이 풍부하고, 조잘대며 들떠 있는 앤의 모습과 달리 우울하고 히스테릭한 모습이 보인다. SNS에는 ‘#notmyanne’(나의 앤이 아니야)이라는 해시태그가 등장할 정도로 항의가 빗발치기도 했지만, 어린 소녀 앤이 겪었을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부조리한 현실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볼 만하다. 또한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어머니 모임이 등장하는 등 페미니즘적 요소도 가미됐다. 내가 보고 싶은 앤의 모습보다 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다면 추천한다.
<방연주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