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고양 금정굴… 민간인 집단학살의 쓰라린 역사 진실을 밝히고 화해를 시도하다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10월 3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탄현동 황룡산 기슭에 있는 금정굴에서 조촐한 합동 위령제가 열렸다. 한국전쟁 통에 억울하게 죽은 민간인 희생자를 추모하는 위령제였다. 이곳 금정굴은 한국전쟁 중 반공단체와 경찰에 의해 153명이 집단으로 학살된 곳이다. 그러나 정작 희생자의 유골은 고양시 벽제에 있는 한 추모공원에 임시로 안치돼 있다. 유골은 1년 단위로 계약하기 때문에 내년에는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지도 모른다.

추모공원 이곳저곳 떠도는 유골들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이현옥 사무국장은 “고양시가 안치비용 1000만원을 1년 단위로 지원하다 보니 지난해에는 다른 추모공원, 올해는 이곳 추모공원 등 유골이 떠돌고 있다”고 말했다. 평화재단은 이곳 학살 현장을 추모공원으로 만들어 유골을 영구 안장하고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삼아야 한다고 요구하지만, 정부와 자치단체는 난색을 표시하고 있다.

이 고양 금정굴 학살 현장은 한국전쟁 전후 전국적으로 자행된 민간인 학살의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해방 후 1947년부터 1948년까지 한 개 섬을 완전히 초토화시킨 제주 4·3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은 1만4028명이다. 하지만 이것은 신고된 것만 집계한 것이고, 미신고 또는 미확인 희생자까지 더하면 훨씬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전국유족회는 “1960년 4·19 직후에 활동한 전국유족회 자체 조사에서 피학살자의 수가 약 114만명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면서 “민간에서 실태조사 및 자료추적을 통해 추산한 피학살자의 수가 약 100만에 이른다”고 말했다.

경기도 고양시 황룡산 기슭에 있는 금정굴은 한국전쟁 중 경찰과 반공단체에 의해 민간인 153명이 집단 학살된 곳이다.

경기도 고양시 황룡산 기슭에 있는 금정굴은 한국전쟁 중 경찰과 반공단체에 의해 민간인 153명이 집단 학살된 곳이다.

꼭 전쟁 전후 희생된 민간인뿐만 아니다. 1973년 남산 국가안전기획부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서울대 최종길 교수, 박정희 정권과 맞서다 1975년 추락사한 시신으로 발견된 장준하 등 많은 의문사 사건들이 있었다. 학생운동을 하다 군대에 강제 징집돼 사망한 군의문사 사건도 600건이나 됐다.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특위를 폭력으로 해체하면서 역사 청산, 즉 우리의 역사 바로 세우기는 번번이 좌절됐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 기간 친일·보수세력이 계속 권력을 잡았기 때문이다. 친일·보수세력은 우리 현대사의 ‘승리자’이자 ‘가해자’였다. 항일·진보세력은 항상 친일·보수세력에 패배했고, 그들은 역사의 피해자로 전락했다. 물론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우리 현대사는 승리자의 손에 각색·윤색됐다.

피해자 유족들은 진실을 밝히기를 요구하기는커녕 오히려 피해 사실을 숨기며 아픔을 삭여 왔다. 일부 유족들은 진실규명을 요구했지만 아무도 유족의 절규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유족들은 그렇게 한스러운 수십년을 보냈다. 국민들은 ‘역사 바로세우기’라는 명제에 공감했지만 힘이 없었다.

김영삼 정부인 1995년 ‘5·18특별법’을 만들어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을 단죄한 것을 역사 바로세우기의 시초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YS의 5·18특별법은 역사를 바로세우기 위한 최초의 ‘소급입법’이다. 나름 본격적인 역사 바로세우기 작업은 ‘첫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뤄져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2000년 만들어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민주화운동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가 활동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DJ의 역사 바로세우기 역시 DJP연대라는 구세력과의 연합정권이라는 한계에 부딪혔다. 앞서 두 기관이 진상규명과 재평가를 할 역사적 시점을 1969년 8월 7일 이후 권위주의 정권으로 규정한 것이다. 1969년 8월 7일은 도대체 무슨 날인가. 이 날은 바로 박정희 장기 집권을 위한 3선 개헌을 발의한 날로, 김종필(JP)이 권력을 내려놓은 날이다. 이 2개의 법을 제정할 당시 국무총리였던 JP는 자신이 조사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조사 시한을 이렇게 규정한 것이다. 따라서 JP가 실세로 직접 주도한 5·16쿠데타나 1961년 12월 민족일보 사건, 1964년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 1967년 동베를린 간첩조작사건 등은 진실규명과 보상 대상에서 제외됐다.

2005년 12월 1일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 송기인 신부(현판 왼쪽)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서울 충무로 사무실 현판식을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2005년 12월 1일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 송기인 신부(현판 왼쪽)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서울 충무로 사무실 현판식을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희생자 대부분은 농사짓던 주민들”
진정한 역사 바로세우기 작업은 노무현 정부 들어 비로소 시작됐다. 노무현 정부는 구세력과 연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정권을 잡은 첫 번째 진보적 정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노 대통령 본인 가족도 역사의 피해자였다. 노 대통령은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역사를 바로 씀으로써 경계와 교훈으로 삼는 것은 수천년 인류사의 확고한 가치로 자리잡은 것”이라며 “반민특위 해체 이래로 잘못된 역사가 규명되지 않고 지금까지 지연되고 있으며, 누군가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2005년 5월 31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이 공포됐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광복 이후 반민주적 또는 반인권적 인권유린 사건을 재조사해 진실을 밝히고 역사적 화해를 통해 국민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목적이었다. 2005년 12월 1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했다. 일제 강점기 이후 현대사의 진실을 가리고 아픔을 총제적으로 보듬는 기관이었다.

이 진실화해위원회는 시기별로 3개 소위원회를 두었다. 일제강점기는 민족독립규명위, 한국전쟁 전후는 집단희생규명위, 권위주의 체제는 인권침해규명위다. 각 소위는 신청자들의 접수나 직권결정을 통해 조사 대상을 2006년 4월 25일 확정했다. 집단희생규명위의 첫 조사가 바로 고양 금정굴 사건이다. 인권침해규명위는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 민족독립규명위는 반탁운동가들의 소련 유형에 관한 진실규명에 들어갔다.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은 1961년 12월 진보적 일간신문인 <민족일보>의 발행인 조용수를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으로 혁명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된 사건이다.

2007년 6월 진실화해위는 금정굴 사건의 진실을 밝혀냈다. 진실화해위는 “희생자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던 지역주민들로서 이 중에는 북한 점령기 인민위원회 활동에 참여하는 등 소극적인 부역행위를 했던 사람도 일부 있으나, 상당수는 도피한 부역혐의자 가족과 이와 무관한 지역주민들”이라며 “경찰이 희생자들을 집단 살해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적법절차도 거치지 않았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는 또 “국가의 공식적 사과, 임시 보관 중인 유해 영구 보관, 평화공원 설립과 위령시설 설치, 전시하 국민의 인권을 침해할 수 있는 국가보안법 등 관련 법률의 정비, 잘못된 기록의 수정 및 진실의 역사 반영, 역사관 건립을 권고한다”고 결정했다. 진실화해위 권고결정이 내려지고 8년이 지났지만 평화공원이나 역사관은커녕 가장 기본인 유골 영구 안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이현옥 사무국장은 “유족 중 33가구만 소송을 통해 국가의 배상금을 받았을 뿐 많은 유족들이 아직 아무런 피해배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골과 자신의 유전자를 감식해 유족임을 입증하는 등 일일이 증거를 수집해 소송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용도 많이 들어가는 데다 노인인 유족들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2008년 1월 24일 노무현 대통령은 “58년 전 국민보도연맹사건은 현대사의 큰 비극으로 대통령인 본인은 국가를 대표해 국가권력이 저지른 불법행위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 드립니다”라고 말했다. 항상 국민 위에 군림하던 국가권력이 민간인 학살에 처음으로 고개숙여 사과한 것이다.

금정굴 희생자 유족들은 이곳을 평화공원으로 만들어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요구하지만 정부와 자치단체는 난색을 표시하고 있다.

금정굴 희생자 유족들은 이곳을 평화공원으로 만들어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요구하지만 정부와 자치단체는 난색을 표시하고 있다.

점점 희미해지는 역사바로세우기 작업
진실화해위는 2010년 6월 임무를 종료할 때까지 4년 6개월 동안 1만1175건의 사건을 처리했으며, 이 중 8450건의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규명했다. 노무현 정부의 역사 바로세우기 작업은 계속돼 2004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를 통해 국가 최고 정보기관인 국가정보원(과거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이 자행한 과거의 사건을 재조사했다. 아울러 같은 해에 일제강점하 친일파의 재산을 환수하는 특별법을 제정했고, 이듬해인 2005년에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해 친일파 1005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이는 오랫동안 논란이 된 친일파 논쟁에 대한 정부 차원의 공식 입장이다.

이후 이명박 정부 들어 이들 역사 바로잡기 기관들은 활동을 종료하거나 속속 폐지됐다. 공권력의 가해는 ‘산업화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행위’로 치부됐다. 이런 틈을 타 이른바 ‘뉴 라이트 사관’을 가진 인사들이 재기용되기 시작했다. 뉴 라이트 사관을 가진 인사들이란 일본 식민지가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친일·반공적 사관을 가진 이들을 말한다. 이들은 그동안 이뤄졌던 역사 바로세우기를 부정한다.

이에 따라 과거 민주화 관련자로 인정했던 비슷한 사안도 민주화 관련자 인정이 거부됐다. 자연히 행정의 일관성 문제가 제기됐다. 과거 법원의 1심 판결이 나면 국가가 항소를 포기해 신속하게 보상했다. 유족들이 대부분 고령인 데다 어렵게 생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항소·상고를 거듭하며 보상금 지급을 늦췄다.

법원의 판단도 달라졌다. 주민 407명이 군·경에게 학살된 울산 국민보도연맹사건은 1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이 났지만 2심에서는 패소했다.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것이 이유였다. 심지어 기존 판례를 뒤집는 사례도 생겼다. 2011년 1월 13일 대법원 3부(주심 박시환 대법관)는 ‘민족일보 사건’에 대해 손해배상 위자료 이자 산정 기준을 ‘불법행위 시점부터’라는 기존 판례를 뒤집고 ‘채무성립 동시’라고 판결했다. 이는 대법원 판례 변경으로, 전원합의부에서 해야 했지만 소부에서 결정했다. 대법원 판결이 달라지자 이미 받아 사용한 보상금을 되돌려 줘야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박근혜 정부 들어 역사의 진실과 화해는 거꾸로 갈등과 반목으로 치닫고 있는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뉴 라이트 사관을 가진 이들이 아예 역사교과서를 새로 만든 것이다. 2013년 많은 오류와 왜곡으로 논란을 야기한 교학사 역사교과서 사건이 그것이다. 전국적으로 교학사 역사교과서가 외면 받자 정부는 아예 한국사를 국정교과서로 회귀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도 1974년 유신시절에 국정교과서를 도입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권위주의 시절인 전두환 정권에서조차 문제가 많아 폐지했던 국정교과서를 지금 부활시키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 바로세우기가 아닌 ‘역사전쟁’에 돌입할 것으로 전망된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

광복 70년 역사르포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