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검을 기다려야 하는, 그 미안한 심정 알아요?”
그는 바다를 보고 있었다. 잿빛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어느덧 쌓인 79일간의 기다림을 닮았다. 그칠 듯 잦아들다가도 이내 굵은 빗방울이 맺히곤 했다.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고 선 우산 속 뒷모습에 인기척을 냈다. 돌아보는 중년남성의 붉은 두 눈에도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꽉 메인 목에서는 당장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낮은 목소리로 나오는 대답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수고하세요.” 짧은 한 마디를 남기고 그는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7월 2일과 3일 전남 진도군 임회면 팽목항에는 이틀 내내 비가 내렸다. 끄트머리에 선 등대를 향해 뻗어 있는 방파제에는 젖어서 늘어진 노란 리본들이 줄지어 매달려 있었다. 등대 아래서 바다를 바라보던 실종자 가족 ㄱ씨의 바지 밑단도 리본들만큼이나 젖어 있었다. “한 시간쯤인가…. 시간개념이 흐려져서.” 얼마 동안이나 여기 서 있었는지 물으니 자신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가라앉히려고 보는 게 아녀. 가라앉은 것들이 하도 뭉치고 맺히니까 몸이라도 움직이려고.” 실종된 가족은 가슴 속에 맺힌 채 눈물 속에서도 또렷한데 정작 타고 있던 배에서는 흔적을 찾지 못했다는 소식만 만날 반복되고 있다.
30명 남짓한 가족들 진도체육관 지켜
진도읍 진도체육관도 물 먹은 공기처럼 무거운 침묵에 눌린 분위기다. 넓은 체육관 코트를 가득 메우고 있던 가족들은 싸늘하게 식어 돌아온 희생자를 품은 채 이곳을 떠났다. 이젠 아직 돌아오지 않은 11명의 실종자를 30명 남짓한 가족들만이 팽목항과 체육관에서 기다리고 있다. 체육관에 남은 가족들은 서로에게도 자원봉사자들에게도 말을 길게 잇지 않았다. 용건을 알리는 두세 마디 대화가 끝나면 다시 긴 침묵이 이어진다. 2일 열린 국회의 국정조사를 보도하는 방송만 체육관의 적막을 깨고 있었다. 국정조사가 파행으로 얼룩지고 여야 의원들 사이에 고성이 오고갔지만 가족들은 표정 없이 지켜보다 자리를 뜰 뿐이었다. 해경청장의 기관보고 때문에 가족들을 상대로 한 오후 5시의 브리핑마저 생략되니 하루 한 차례의 일과마저 사라진 느낌이다.
“여당이건 정부건 국정조사랍시고 나와서 하는 소리들 봐요. 가만히 보고는 있지만, 허 참….” 실종자 가족 권오복씨는 애초에 별 기대도 안 했지만 막상 보니 돌아가는 꼴이 가관이라고 말했다. 하루라도 빨리 실종자를 찾기를 바라는 마음에 수색작업에 끊김이 없도록 해양수산부 장관과 해경청장의 기관보고를 진도에서 하게 해달라던 요구는 들은 체 만 체였다. 6월 24일 이후 이어지고 있는 실종자를 찾지 못한 나날들은 마지막 남은 인내심의 끝을 보려는 시험과도 같이 느껴진다. “더 말할 게 뭐가 있어요. 이젠 참 할 말도 없지만, 가족들이 나올 때까지는 버텨본다고 말할 수밖에.” 지친 목소리로 답하던 권씨는 ‘버텨본다’는 대목에서 단 한 번 힘을 주어 말했다.
권씨가 기다리는 가족은 동생과 조카다. 동생 권재근씨와 조카 혁규군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제수인 한윤지씨는 팽목항에 마련된 시신확인소 냉동고에 누워 있다. 혁규의 여동생 지연이만 구사일생으로 가족 품에 돌아왔다. 하지만 권씨는 세 식구의 장례식을 치를 때가 되면 지연이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가 걱정이다. 그보다 더 큰 걱정은 시신도 찾지 못한 채 결국 이곳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다. “가족들 생활이 열악하니 숙소를 옮기자는 얘기도 나오는데 여길 떠나면 그대로 잊혀져버리게 되는 게 아닐까 불안해요.”
불안으로 뒤덮인 생활이다. 거의 대부분의 가족들이 골골거리면서 약을 달고 산다. 권씨도 감기를 몇 주째 떼어놓질 못하고 있다. “약으로 겨우 버티다가 안 돼서 두 번은 바깥에 병원도 갔다 왔지만 통 낫질 않아요.” 자원봉사 온 약사들은 감기약과 신경안정제가 가장 많이 나간다고 말한다. “다들 나가서 진료받을 생각은 잘 안 하고 약 받아서 먹으며 견디는 모양이에요. 물론 계속 복용하면 안 좋다는 건 본인들도 잘 알지만 신경안정제라도 안 먹으면 잠이고 평상시 생활이고 하질 못하겠다는데야….” 광주에서 온 약사 송권방씨는 밀려오는 구호약품 대신 정부 대책이 나와야 한다며 한숨을 지었다.
이대로 잊힐까 두려움, 약으로 버텨
의료지원을 나온 자원봉사자들은 강권에 가깝게 가족들을 끌어 상담을 하자고 조른다. 불안과 절망이 매일 차곡차곡 쌓이는 생활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지금 제대로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상담할 때가 아니라는 얘기는 할 때마다 들어요. 그래도 앞으로 얼마나 더 기다려야 될지 모르는 상태로 조금이라도 더 가족분들이 자기 자신을 지탱하게 하려면 이렇게라도 나서서 지원해야 된다고 판단한 거죠.” 정신과 의사로 심리치료 봉사에 나선 신은복씨의 눈에 비친 가족들은 삶의 극한까지 밀려나 있는 모습이다. “실종자들이 빨리 돌아오길 바라지만 한편으론 시신을 찾고난 뒤의 가족들을 생각하면 그게 더 걱정이죠. 지금까지 버티게 했던 버팀목이 무너지고 나면 그 삶을 다시 재건하는 건 하루이틀 걸리는 일이 아닐 테니까.”
다가오는 여름은 얼마 남지 않은 입맛마저 가져가버리고 있다. 가족들의 수가 크게 줄면서 자원봉사로 운영되는 식당도 줄어 현재 체육관에서 두 곳, 팽목항에서 한 곳의 식당이 식사를 제공한다. 이전에 비해 봉사자들이 가족들 식사의 질을 더 챙길 수 있게 됐지만 반응은 무심하다. “밥을 푸는 식판을 보면 가족분인지 바로 알죠. 몇 숟가락 안 들고 다들 금세 일어서요. 그마저도 ‘약 먹어야 되니까 먹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어찌나 가슴이 아프던지….” 자원봉사자 김선옥씨의 말대로 실종자 가족들의 자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약봉지였다.
기쁘진 않지만 기다려야 하고 기다릴 수밖에 없는 소식은 시신에 관한 소식이다. 1일 관매도 인근 해상에서 발견된 시신 소식에 팽목항엔 잠시 활기 아닌 활기가 돌았다. 살아 돌아오길 바라지 못하고 시신을 기다려야 하는 현실은 가족들은 물론 주위 봉사자들과 당국의 관계자들에게도 참담한 경험이었다. 1일의 시신은 세월호와 관계없이 지난 4월 조업 중 실종된 실종자의 것으로 밝혀졌다. 애당초 기대는 크지 않았지만 덮쳐오는 이유 모를 실망감이 가족들을 짓눌렀다. “주검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지만 그거나마 기다리게 되고, 막상 발견됐단 소리 들으면 가슴 덜컹거리는 게, 그 덜컹거렸다는 게 또 너무 미안한 그 심정 알아요?” 실종자 가족 ㄴ씨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6월 24일 가장 최근에 발견한 윤모양의 시신이 올라왔을 때도 분위기는 비슷했다. 시신이 딸의 친구인 것을 확인하자 그동안 억눌렀던 병세가 도져 체육관을 떠난 어머니도 있다. 윤양의 단짝 허모양의 어머니 박씨는 앞장서 달려간 시신확인소에서 주검을 확인했다. 딸의 친구인지조차 알아보기 힘든 주검의 모습에 어머니는 정신을 잃었다. 지병인 신경섬유종 증상이 악화돼 더 이상 진도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입원을 한사코 거부하다 쓰러진 뒤에야 실려간 박씨처럼 실종자 가족들은 병원을 찾기를 꺼렸다. 그러나 바람과는 달리 신체적 한계가 가족들에게 밀려오고 있는 듯하다. “오늘(3일)만 두 분이 증상이 심각해져서 병원에 진료 받으러 갔어요. 쓰러지는 분들은 점점 늘고 있는데 할 수 있는 건 병원으로 옮겨드리는 것뿐이라 안타깝습니다.” 정부 대책본부 관계자는 가족들의 건강상태가 악화되는 것은 파악하고 있지만 별다르게 손을 쓸 수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200여명의 봉사자들 남아 아픔 나눠
실종자 가족들이 머물고 있는 조립식 숙소 문에는 ‘절대안정’이라고 쓴 종이가 붙어 있다. 개인 공간이 보장되지 않는 체육관 대신 조립식 주택으로 만든 숙소를 제공했던 것이다. 꼭 필요한 용건 때문에 숙소의 문을 두드리는 봉사자들도 조심스럽다. 그리고 가족의 정서는 봉사자에게도 쉽게 옮아온다. 자원봉사자 전모씨는 그 역시 세월호 사고로 사촌동생을 잃었다. 안산에서 진도까지 자진해서 봉사에 나선 전씨는 가족들을 대할 때마다 동생을 잃은 자신의 슬픔도 이따금씩 솟구치는 것을 느낀다. “가족분들이 아무래도 제일 가깝게 여기는 건 봉사자들이니까요. 또 봉사자들 중에는 저처럼 친척이나 친구를 보낸 사람들도 있어서 실종자 가족들과 얘기를 나누다보면 찡하게 전해지는 게 있어요.”
그런 자원봉사자들의 수도 크게 줄었다. 현 봉사자들과 교대하러 전국 각지에서 진도로 향하는 봉사자들의 발걸음도 끊이지는 않고 있지만 1500명을 훌쩍 넘기던 사고 직후와는 달리 현재 봉사자 수는 팽목항과 체육관을 합해 200여명 정도다. 팽목항과 체육관을 오가는 셔틀버스에 오르는 발길도 뜸해졌다. 팽목항을 향하는 버스는 기사와 기자 단 둘만 태우고 달리기도 했다. “이런 말 허긴 뭣허지만, 진도 주민들도 죽을 맛이어라. 자원봉사자들 빼면 진도에 들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응게 읍내건 어디건 손님들 상대허는 가게들은 아예 생계가 안 되는디.” 예년 같으면 침몰지점 인근인 관매도 등을 오가는 낚시꾼들로 북적였을 팽목항은 다른 의미에서도 잊혀지는 모양새다.
“다음주부터 수색을 업체들끼리 위치를 바꿔서 해본다는데 그냥 위치만 바꿔봤자 뭔 소용인가 싶다가도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조금이나마 더 빨리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또 기대하는 거죠.” 실망하는 데 익숙해진 권오복씨지만 이대로 완전히 실망해버리면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안다. “잊어버리게 만드는 누군가가 있다고 해도, 또 설령 시신이고 뭐고 아무것도 못 찾는다고 해도 내가 잊지 않으면 되는 거니까….”
사고대책 당국은 당초 계획이었던 1차 정밀수색계획을 약속한 기한인 6월 말까지도 마치지 못했다. 아직 10여개의 격실은 수색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채 바다 아래 잠겨 있다. 수색용 바지선을 출항시킬 팽목항 방파제 위에 놓인 운동화 한 켤레에는 웃고 있는 학생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빗속에서 기다리는 가족과 물속에서 발견되길 기다리는 실종자들이 서로를 만나게 될 날은 언제일까.
<글·사진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