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이태원 살인사건’ 미해결로 끝나나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미국 국적 소년 두 명의 충동 범죄… 공소시효 3년 남기고 영화화

억울하게 목숨을 빼앗긴 고 조중필씨.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고 있을까. 사진은 대학 시절의 조중필씨 모습.

억울하게 목숨을 빼앗긴 고 조중필씨.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고 있을까. 사진은 대학 시절의 조중필씨 모습.

둘 중 하나는 살인범임이 확실하지만 둘 다 무죄로 풀려난 이상한 사건. 12년 전 서울 이태원의 한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서 발생한 홍익대생 고 조중필씨(당시 23세) 살해사건을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이 9월10일 개봉된다. 이를 계기로 조중필씨 살해사건을 되새겨 봤다.

1997년 4월3일 밤 10시경. 홍익대 휴학생 조중필씨는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다 주려고 서울 이태원동에 갔다가 소변이 마려웠다. 동갑내기 여자친구 김 모씨는 근처 햄버거 가게에 들어갔고, 중필씨는 급히 화장실을 찾았다. 감자튀김을 먹으며 기다리다가 시간이 돼도 중필씨가 나오지 않자 화장실 쪽을 바라보던 김씨는 한 남자가 입을 손으로 막은 채 뛰쳐나오는 것을 봤다. 이어 남자종업원이 화장실을 들여다보다가 역시 입을 막고 뛰쳐나왔다. 김씨는 화장실로 향했다. 중필씨가 피투성이인 채로 소변기 옆 귀퉁이에 머리를 박고 쓰러져 있었다. 김씨는 중필씨를 흔들며 119를 불러달라고 외쳤다. 119구조대가 도착했을 때 중필씨는 이미 맥박이나 호흡이 정지돼 있었고 동공도 확대돼 있었다. 사망한 것이다. 중필씨는 오른쪽 목 부위 세 곳, 가슴 부위 두 곳, 왼쪽 목 부위 네 곳 등 무려 아홉 군데나 칼에 찔린 상태였다.

휴학생 조중필씨 난자 당해 사망
이날 그 햄버거 가게 건물 4층에는 미국 국적의 10대 남녀 20여 명이 술과 콜라 등을 마시고 있었다. 밤 10시경, 이들 중 브라이언 리(가명, 당시 18세)가 랜디와 함께 1층 햄버거 가게로 내려와 햄버거를 먹었다. 이어 제이미 패터슨(가명, 당시 18세), 제이슨 등 다른 친구들도 내려와 옆자리에서 햄버거를 주문해 먹었다. 이때 패터슨은 자신의 접히는 휴대용 칼을 꺼내 햄버거를 반으로 잘랐다. 패터슨(또는 리)이 화장실로 들어가는 중필씨를 봤다. 패터슨(또는 리)은 “내가 뭔가 보여줄 테니 따라와라”고 말했고 둘이 화장실에 들어간 지 얼마 안돼 조씨는 변을 당했다. 당시 화장실에는 세 사람밖에 없었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죽었으니 적어도 남은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살인범이다. 패터슨은 멕시코계 미국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리는 미국에서 태어난 재미교포다.

사건 이튿날인 4월4일 용산 미8군 헌병대에 제보 전화가 걸려 왔다. 패터슨이 이태원의 햄버거 가게에서 살인을 저질렀다는 내용이었다. 헌병대로부터 제보를 전달받은 미군범죄수사대의 한 수사관이 햄버거 가게에 가보니 한국 경찰이 진을 친 상태였다. 수사반장을 불러달라고 했더니 고참인 김낙권 형사(현재 서울 용산경찰서 강력1팀장)가 나왔고, 미군범죄수사대 수사관은 제보 내용을 전했다. 김낙권 팀장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미군범죄수사대의 도움을 받아 미8군 용산기지 내 드래곤호텔에서 잠복한 채 기다렸더니 패터슨이 나타났어요. 바로 검거해 1층 화장실로 데리고 갔죠. 마침 화장실에 누군가 있어서 그가 나간 후 화장실 문을 잠근 채 몸 전체를 수색하고 호송해 미군범죄수사대로 데리고 갔어요. 미군범죄수사대는 사건 당시 패터슨, 리와 함께 햄버거 가게 건물에 있던 그들의 친구들을 불러 조사한 결과 등을 토대로 패터슨을 살인범으로 지목했어요. 우리에게 신병을 인도할 때도 그런 의견을 진술서와 함께 전달했고, 우리도 미군범죄수사대와 같은 판단을 했어요.”

미군범죄수사대 살인범 패터슨 지목
미군범죄수사대가 패터슨을 살인범으로 판단한 배경은 당시 미군범죄수사대 반장으로 지금은 미국에서 살고 있는 토마스 반즈가 1999년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인터뷰에서 밝힌 대로다. 반즈는 이 인터뷰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패터슨의 친구 랜디는 사건 직후 패터슨으로부터 자기가 살인을 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미군범죄수사대에서 증언했습니다. 리는 상의 오른쪽 가슴과 어깨 및 등 뒤, 신발 등에 스프레이로 뿌린 듯한 핏자국이 있었던 반면에 패터슨은 머리부터 발 끝, 양손까지 피투성이었어요. 또 조씨를 살해한 수법은 미국 갱단인 ‘노르테14’가 사용하는 난폭한 공격 수법과 같은데 실제 패터슨의 문신, 옷차림, 사진에서 보이는 손가락 3개로 만드는 표시는 모두 ‘노르테14’ 표시입니다. 패터슨은 이를 내 앞에서 시인했고, 친구들에게도 ‘노르테14’ 단원이라고 얘기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나는 지금도 패터슨이 범인임을 확신합니다.” 또 4층에 있던 멕큐라는 이름의 친구는 “리가 피묻은 셔츠를 입고 테이블로 와서 ‘우리가 어떤 친구의 목을 칼로 찔렀다’며 깔깔 웃더니 ‘그저 재미로 그랬다’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네가 사람을 죽였지’ 하고 소리를 쳤더니 리는 ‘나는 아니야’라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죽은 자는 있으나 죽인 자는 밝히지 못했다. 사진은 1997년 4월 현장검증에서 범행 당시를 재연하고 있는 용의자 패터슨. <경향신문>

죽은 자는 있으나 죽인 자는 밝히지 못했다. 사진은 1997년 4월 현장검증에서 범행 당시를 재연하고 있는 용의자 패터슨. <경향신문>

사건 직후 패터슨은 친구 존을 만나 바지를 바꿔 입고, 둘 중 하나가 범행에 사용한 휴대용 칼을 하수구에 버렸다. 피묻은 셔츠는 불태웠다. 드래곤호텔 뒤편 벤치에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 집으로 가서 피묻은 신발을 바꿔 신고 이튿날 드래곤호텔 보관함에 피묻은 바지, 양말, 셔츠 2벌 등을 넣었다.

한편 리는 4월8일 검찰에 자수했다. 6일 패터슨이 TV에 나오는 것을 본 아버지가 잠든 아들을 깨워 묻자 사정을 털어놓았고, 이튿날 아버지와 함께 변호사를 만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이때 경찰은 리를 쫓고 있었다. 당시 이 사건을 수사한 검사로서 리를 살인죄, 패터슨을 증거인멸 등 혐의로 각각 기소한 박재오 변호사의 말이다.

“잠복형사들로부터 리가 아버지와 함께 서초동의 한 변호사사무실에 들어가 있는데 어떻게 할지를 묻는 전화가 걸려 왔어요. 리가 만나고 있는 변호사는 검찰청을 그만둔 지 얼마 안 된 선배였어요. 제가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거기에 리가 있느냐. 경찰들이 밖에 있다. 어떻게 할 거냐’고 했더니 당황한 선배가 당신이 직접 리를 검찰청에 자수시키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자수 형태가 된 거예요.”

그런데 리와 패터슨 두 사람은 수사기관에서 법정에 이르기까지 줄곧 상대방이 살인자이고 자신은 목격자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은 반성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김낙권 팀장은 “피의자 심문을 할 때 미국 시민권자 대표들이 참석했는데, 리와 패터슨이 그들과 이야기하면서 떠들고 장난을 쳤을 정도로 불량한 태도를 보였다”며 “특히 패터슨은 노련한 거짓말쟁이로 보였다”고 회상했다. 김 팀장은 또 “나중에 둘을 대질심문할 때 서로 상대방이 범인이라면서도 서로의 몸을 껴안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전했다. 반면에 박재오 변호사는 “패터슨은 맨 처음 봤을 때 비쩍 마른 게 정말 불쌍한 친구로 보였으며, 검찰청에서 조사받을 때도 얌전했지만 리는 수사받는 태도가 굉장히 거칠었다”고 기억했다.

박재오 당시 검사는 리를 살인범으로 지목했다. 근거는 조씨 시신에 대한 서울대 법의학교실의 부검 결과와 거짓말탐지기 결과, 친구 제이슨의 진술이었다. 4월5일 부검을 실시한 서울대 의대 법의학교실 이윤성 교수의 소견에 따르면 칼에 찔린 목의 상처가 위에서 아래로 향하고 있고, 그 가운데 두 번 깊게 찌른 공격으로 목 가운데에까지 관통하면서 혈관이 잘려 치명적이었으며, 피해자의 방어흔(가격을 당한 피해자가 이를 막다가 생기는 상처)도 없는 것으로 보아 상대는 피해자보다 키가 크고 힘이 센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또 짧은 시간에 ‘묻지마’ 살인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피의자는 정신이상자이거나 환각상태일 것으로 추정했다. 박재오 변호사는 “재판이 끝날 때 패터슨의 키가 176㎝까지 자랐지만 검찰청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패터슨의 키는 167㎝에 53㎏이었다”면서 “반면에 리는 183㎝에 105㎏의 거구였다”고 말했다. 사건 당시 조중필씨의 키는 176㎝였다. 거짓말탐지기 결과도 리에게 불리하게 나왔다. 리는 거짓말, 패터슨은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 나온 것이다.
 
또 사건이 일어난 날 함께 있은 제이슨이라는 친구는 검찰 조사에서 “마지막으로 리가 칼을 가지고 있었다”면서 “어떤 남자가 화장실에 들어가자 리가 패터슨에게 ‘뭔가 보여주겠다. 따라와라’고 말하면서 둘이서 화장실로 가는 것을 봤다”고 진술서에 썼다. 그러나 같은 날 리와의 대질심문에서는 “분명히 누군가 그 말을 하는 것을 들었으나 누가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고 번복했다.

살인자·목격자 “상대방이 범인” 공방

조중필씨 살해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의 포스터.

조중필씨 살해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의 포스터.

박재오 변호사는 부검 결과 살인범이 환각상태에서 범행했을 가능성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전했다.

“리가 자수 형식으로 긴급체포된 날 저녁 서울지검 마약부에서 리의 집 앞에 대기하고 있었어요. 리에게 보내지는 인형 몸 속에 마리화나(대마초)가 숨겨 있는 것을 세관에서 발견하고 지검 마약과에 연락했기 때문이죠. 마약부가 리의 집을 수색해 마리화나를 압수했는데 마침 리가 긴급체포되는 바람에 마리화나에 대해선 기소되지 않았어요. 리는 패터슨을 비롯해 이태원을 근거로 노는 미 군속 아이들에게 마리화나를 팔아왔던 거예요.”

결국 박재오 검사는 4월26일 리를 살인혐의, 패터슨은 증거인멸 등 혐의로 각각 구속기소했다. 법정에서는 박재오 검사와 리 측 변호사 간의 치열한 공방이 펼쳐졌다. 리는 1997년 10월2일 서울지법과 1998년 1월26일 서울고법에서 살인죄가 각각 인정돼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1998년 4월24일 리에게 무죄 취지의 판결을 내려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패터슨 진술의 신빙성이 의심스러워 리가 단독범행을 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1998년 9월30일 서울고법은 리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리는 풀려났다. 그리고 1999년 9월3일 재상고심에서 대법원은 리에 대해 무죄확정판결을 내렸다. 한편 패터슨은 1998년 1월26일 서울고법에서 증거인멸 등 혐의로 징역 장기 1년6월 단기 1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그해 8월15일 8·15특사로 풀려났다. 리가 무죄로 석방되자 조중필씨 가족은 패터슨을 살인 혐의로 고소했고 검찰은 “재수사 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패터슨은 검찰이 출국정지 조치를 제때 연장하지 않는 바람에 미국으로 달아났다. 검찰은 패터슨을 출국금지하고 수사해 오다 1999년 8월 인사 이동 과정에서 사흘 동안 출국금지를 연장하지 않았고, 그 틈을 타 패터슨이 미국으로 출국, 사실상 수사가 중단된 것이다.

당시 검사와 경찰 진범 지목 엇갈려
당시 이 사건을 수사한 이들의 견해는 여전히 엇갈리고 있다. 박재오 변호사는 “나는 지금도 리가 범인이라고 확신한다”고 단언했다. 그는 “당시 대법원의 논리는 검사가 리가 범인인 것을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증명해야 하는데 못했다는 것으로, 리가 범인일 가능성이 많지만 다른 점을 판단하면 패터슨도 범인일 수 있기 때문에 무죄 판결을 내린다는 것이었다”면서 “그렇기 때문에 설령 패터슨을 기소한다고 해도 대법원의 무죄판결 논리라면 패터슨에게도 역시 무죄가 선고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이 사건은 그가 2000년 검사직을 그만두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최선을 다한 이 사건으로 스트레스가 컸던 데다 그런 논리로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이 나는 게 정의가 아닌데 내가 검사생활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고 말했다.

반면에 패터슨을 진범으로 확신한다는 김낙권 팀장은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당시 박 검사가 미웠다”면서 “검사로서 넓게 보고 경찰과 미군범죄수사대 의견도 듣고 기소했으면 이 같은 일이 없었을 텐데 너무 부검의의 말만 듣고 피상적으로 기소한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이것이 죽은 이가 있고, 둘 가운데 한 사람이 죽인 것은 확실한데 죽인 자가 밝혀지지 않은 기이한 사건의 전말이다. 살인죄 공소시효는 15년. 아직 3년의 시간이 남아 있다. 그러나 패터슨은 해외에 있고, 리는 일사부재리 원칙에 따라 더 이상 이 사건과 관련해서는 살인죄로 처벌받을 수 없다.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 연출한 홍기선 감독

“유가족 상처 건드릴까 염려스러워”


[사회]‘이태원 살인사건’  미해결로 끝나나


조중필씨 살해 사건을 영화로 만든 이유는.
“2005년에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조씨와 관련된 사이트를 보게 됐다. 미해결된 사건이 미묘했다. 당시 한·미행정협정과 같은 미국문제를 영화로 만들어 볼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이례적으로 미군이 신병을 바로 한국경찰에 넘기며 협조한 사건이었다. 내가 이 사건에서 주목한 것은 한국인의 피가 섞인 미국 국적의 아이들이 보인 문화적 정체성이었다. 재미로 사람을 죽인 것이다. 이들의 모습은 현재 미국문화와 한국문화가 혼재된 한국의 모습을 대변하기도 한다.”

검사를 주인공으로 세운 배경은 무엇인가.
“어떻게 구성할지 고민을 많이 한 끝에 갈등하는 검사에 맞추기로 했다. 실제 박재오 변호사를 만나보니 의협심이 강한 분으로 느껴졌다. 또 주류검사라기보다 조직과 충돌하는 아웃사이더 검사 이미지를 지닌 것도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용의자들을 어떻게 표현하려고 했나.
“난 범인을 밝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사건의 의미, 두 사람을 다 풀어주게 된 과정, 그 아이들의 문화적 미묘성 등에 초점을 맞추는 데 주력했다. 사실 걱정이 앞선다. 피의자이던 두 사람 모두 어딘가에 살아 있고, 그동안 어떻게 변해 있을지도 모르는데 누군가에겐 큰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유가족에게도 도움은 되지 않은 채 괜히 상처만 더 건드리는 게 아닌지 염려스럽다.”

영화를 촬영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
“조중필씨 사건은 나 말고도 영화하는 사람들이 영화 소재로 많이 관심을 보였다. 희한한 것은 일단 영화작업에 들어가니까 지난해 말부터 제작비 마련부터 캐스팅까지 모든 게 술술 풀려가는 느낌이었다는 점이다. 꼭 누가 도와주는 것 같았다.”


조중필씨 누나 조문옥씨 “영화 계기로 재수사 이루어지길”

[사회]‘이태원 살인사건’  미해결로 끝나나

조중필씨가 끔찍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지 12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유가족의 가슴에 조씨는 여전히 살아 있다. 특히 아버지 조송전씨(69)와 어머니 이복수씨(66)에게 지난 12년은 단 하루도 마음 편히 다리를 뻗고 잠을 이룰 수 없던 고통의 나날이었다. 잔혹한 살인범을 눈앞에 두고도 결국 죗값을 치르게 하지 못했다는 원통함과 억울하게 목숨을 빼앗긴 외아들의 한을 제대로 풀어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진 지 오래다. 8월27일 자택에서 만난 조중필씨의 셋째누나 문옥씨(38)는 12년 전 사건을 떠올리면서 눈물을 쏟았다. 문옥씨는 “동생이 그렇게 죽은 것도 견딜 수 없는 일이었는데 둘 중 한 사람이 분명 살인범임에도 둘 다 풀려난 상황을 지켜보면서 사법부에 대한 불신감이 생긴 것은 물론 대한민국에 태어난 게 정말 원망스러웠다”고 토로했다.

조중필씨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가 곧 개봉되는데, 심경이 어떻습니까.
“2년 전에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가 저희 가족을 찾아왔어요. 영화 제작을 위해 가족의 동의를 구하려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영화가 나온다고 사건이 해결되는 게 아닌 데다 간신히 추스르고 있는 상처만 더 덧날 것 같아 반대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허락하자고 하셨어요. <살인의 추억>이나 <그놈 목소리>처럼 실화를 담은 영화를 통해 국민들이 그 사건에 대한 경각심을 높인 경우가 있다고요. 더구나 범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두 사건과 달리 우리 중필이 사건은 둘 중 한 사람이 확실한 범인이잖아요. 어머니는 혹시 이 영화를 통해 검찰이 재수사를 할지도 모른다는 실낱 같은 희망을 품고 계세요.”

사건이 일어난 1997년 4월8일 동생의 죽음, 어떻게 전달받았나요.
“직장에서 회식한 후 밤 10시 넘어서 퇴근해 집에 있었어요. 그런데 11시 넘어 순천향병원 응급실에서 전화가 왔다며 부모님이 부랴부랴 나가셨어요. 30분 후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중필이가 죽었다고요. 남은 식구들도 정신없이 병원으로 갔어요.”

살인범으로 기소된 브라이언 리(가명)는 대법원에서 동생을 살해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았고, 제이미 패터슨(가명)은 검찰이 출국 금지를 연장하지 못한 사이 미국으로 출국했습니다. 그때의 심경은 어땠습니까.
“중필이의 장례식을 치른 이튿날 새벽에 살인용의자가 검거됐다는 전화를 받았어요. 그런데 용의자가 검찰로 송치된 후 우리 가족은 둘 중 하나가 살인범이 분명하니까 둘 다 살인죄로 기소해야 하지 않는가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박재오 검사는 리가 살인범이 확실하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런 줄 알았어요. 하지만 리는 살인범으로 기소된 후 1년6개월 뒤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거예요. 우리는 다시 패터슨을 살인범으로 고소했지만 패터슨은 미국으로 도망갔잖아요. 그 순간 검사도 법원도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었어요. 다 짜고 하는 것 같았고요. 사법부에 대한 불신감이 생긴 것은 물론 대한민국에 태어난 게 원망스러웠어요.”

박 검사가 원망스럽겠네요.
“원망하는 마음이 있어요. 애초에 둘 다 살인죄로 기소했으면 이런 어이없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동생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어려서부터 모범생이었어요. 대학에 다니면서도 꼬박 장학금을 받았으니까요. 전자나 전파 쪽에 관심이 많아 전공을 그쪽으로 했고, 졸업 후 유학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어요. 학자가 꿈이었죠. 부모님께도 효자여서 대학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해 모은 돈으로 어머니께 오디오 세트를 사 드리기도 했어요. 그걸로 좋아하시는 트로트음악 들으시라고요.”

사건과 관련해 누구보다 부모님의 충격이 크셨겠지요.
“아버지는 술을 드시면 어머니를 원망하곤 했어요. 동생이 강원도 화천으로 자대배치된 지 한 달도 안 돼 축구하다가 인대를 다쳐 국군수도병원에서 의가사제대를 한 것이거든요. 그때 아버지의 뜻과 달리 어머니가 의가사제대를 고집하셨어요. 동생이 그리 돼 속상하니까 아버지는 어머니를 향해 분풀이를 하셨어요. 의가사제대만 안 했어도 이런 비극은 없었지 않았겠나 하는 마음이었던 거예요. 부모님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생이 쓰던 방과 소지품, 사진액자를 그대로 두었어요. 지금은 대부분 소각하고 일부만 남겨 두었어요.”

공소시효가 3년 남았는데요. 시간이 흐르는 게 안타깝겠네요.
“영화를 계기로 재수사가 이루어지길 바라요. 정말 어머니의 바람대로 검찰에 의협심 강한 검사가 있어 이 영화 개봉을 계기로 우리 중필이의 목숨을 빼앗은 살인범을 지금이라도 잡아 죗값을 치르게 해줄 순 없는 걸까요.”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주간경향 댓글 정책에 따라
이 기사에서는 댓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