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멍때리는 밭·주문 자동정리···‘꿈의 농촌’을 일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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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환경 농법 ‘퍼머컬처’ 청년마을 창업… 김지현 ‘밭멍’ 대표

농산물 주문 ‘어레인지’ 서비스… 윤성진 ‘에이임팩트’ 대표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은 지역소멸의 최전선이다. 주민수는 1007명으로 전국 읍단위 중 최소다. 영월군에는 읍이 딱 2개, 영월읍과 상동읍이 있다. 영월군 전체인구의 3만명 중 2만명이 영월읍에 산다. 인구수로 보면 절대 읍이라고 불릴 것 같지 않은 곳이 읍으로 불리는 건 부흥했던 과거의 흔적이다. 상동읍은 한때 동네 개도 만원을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부유한 동네였다. 단일 규모로는 세계 최대의 텅스텐 광산인 ‘상동광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전 세계 텅스텐 생산량의 15%가 여기서 났다. 국내 총수출의 70% 이상을 담당했던 곳이라 최고 호황기였던 1971년엔 상동읍 인구가 2만2600여명에 달할 정도였다.

김지현 ‘밭멍’ 대표(왼쪽)와 윤성진 ‘에이임팩트’ 대표가 사단법인 다른백년이 주최한 ‘농업의 미래, 미래의 농업’ 강연에서 발표하고 있다. / 주영재 기자

김지현 ‘밭멍’ 대표(왼쪽)와 윤성진 ‘에이임팩트’ 대표가 사단법인 다른백년이 주최한 ‘농업의 미래, 미래의 농업’ 강연에서 발표하고 있다. / 주영재 기자

1993년 중국산에 밀려 광산이 폐광된 후 상동읍은 빠르게 쇠락했다. 그런 쇠락기에 상동에서 유년기를 보낸 한 청년이 상동에 돌아와 지역공동체를 다시 만들겠다는 포부를 실천에 옮기고 있다. 청년마을 ‘밭멍’의 창업자이자 대표인 김지현씨다. 김 대표는 지난 11월 8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열린 사단법인 다른백년의 ‘농업의 미래, 미래의 농업’ 강연에서 “밭에서 내·외국인 구분 없이 행복하게 손을 흔들어주는 마을,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마을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지구와 사람에 이로운 지속가능한 농업을 뜻하는 ‘퍼머컬처’가 중심이 된 마을이다.

퍼머컬처로 자급자족 라이프 실험한다

퍼머컬처는 땅을 갈지 않고, 화학비료가 아닌 퇴비로 땅의 힘을 키우고,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동반작물을 이용해 농약을 쓰지 않는 친환경 농법을 말한다. 문화적 의미도 담아 농촌의 지속가능한 삶을 하나의 콘텐츠로 만들려는 노력을 포함한다. 김 대표에게 퍼머컬처는 농업의 과거에서 찾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미래로 향할 수 있는 문을 열 열쇳말이다. 김 대표는 “퍼머컬처는 선조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이룬 지혜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라면서 “퍼머컬처에 뜻있는 청년들이 모여 자연과 사람, 세대를 연결하는 연결자가 되자는 게 우리의 목표”라고 말했다.

산골이 너무 싫어 도망치듯 대도시로 떠난 후 “키가 크고 친절하니 호텔에서 일하면 좋겠다”는 선생님의 말에 20대 초반부터 호텔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강원랜드가 생기자 그곳으로 옮겨 다시 10년을 일했다. 그 중간에 고향에서 배추절임 공장을 시작한 아버지의 일을 돕기도 했다. 밭이 싫어 떠났던 고향에 다시 돌아왔는데 일정하지 않은 농업 수입을 보고 농촌의 지속가능성을 고민하게 됐다. 지속가능한 농업을 고민하며, 뒤늦게 관련 대학 공부를 하고, 영국에서 퍼머컬처 사례를 연구했다. 본격적으로 퍼머컬처를 해보자는 생각에 안정된 직장을 떠나 지난해 시골 복합문화공간인 ‘밭멍’을 창업하기에 이르렀다.

“멍때릴 정도로 아름다워서 자꾸 오고 싶어지는 밭, 퍼머컬처를 알고 싶다면 한 번 말고 두 번 와야 하는 밭, 좋은 한숨을 편하게 내쉴 수 있는 밭, 일회용 체험이 아닌 경험할 수 있는 밭, 푸근한 고향 같은 밭, 그냥 모든 것이 좋은 그런 밭”을 지향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멍때리다 지치면 아름다운 밭에서 먹고, 심고 함께 노는 ‘자연 속에서 각자의 비움을 만끽하는 공간’을 표방한다.

밭멍의 첫 단계 프로젝트는 아버지가 남긴 배추밭을 나뭇잎 모양의 정원식 농장으로 바꾸는 작업이었다. 나뭇잎의 모양을 따라 구획을 나눠 70여가지 작물을 고루 심었다. 단일 재배를 지양해 생태적으로도 좋지만 미적으로도 아름답다. 김 대표는 “밭도 하나의 공간으로 해석하자는 생각에서 밭과 정원의 경계가 없는 팜가든을 지향했다”고 말했다. 밭 주변에 있던 크고 작은 축사는 밭멍을 찾는 이들을 위한 크고 작은 행사가 열리는 공간으로, 자연과 교감하며 쉴 수 있는 정원으로 재탄생했다. 옛 배추절임 공장은 놀고, 먹고 일하는 공유 공간으로 변했다.

지속가능한 농업은 문화라는 콘텐츠가 뒷받침돼야 한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경운기로 드라이브를 하거나 밭에서 작물을 심고, 직접 딴 채소로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김 대표는 “체험이란 말이 싫고, 감동하고 경험하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면서 “최종 목표는 프로그램 없는 농장, 행복을 경험하러 찾아오는 밭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문자·카톡 주문 AI로 자동정리

김지현 대표의 아버지가 배추절임 공장을 운영할 때 큰 부담을 준 건 주문을 받아 송장을 처리하고, 택배를 부치는 과정이었다. 대개 농산물 직거래를 할 때는 문자나 카톡으로 품목과 수량, 주소를 알려주는데 그 형태가 제각각인 ‘비정형 데이터’이다. 대부분의 농부는 문자 등으로 온 주문을 처리하느라 일을 하는 중간은 물론, 저녁때도 긴 시간을 들여야 한다. 윤성진 에이임팩트 대표는 농민들의 이런 고충에 주목했다.

에이임팩트는 ‘텍스트마이닝’ 기술을 바탕으로 메시지 주문과 쇼핑몰 주문 등을 자동으로 정리해주는 ‘어레인지’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언제 어디서든 주문 메시지를 클릭해 어레인지에 넣으면 알아서 항목별로 정리해준다. 덕분에 농업인은 생산력과 경쟁력을 높이는 데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윤성진 에이임팩트 대표는 지난 11월 15일 강연에서 “농민들에게 하루 1시간을 선물해주자는 게 제 개인적인 임무였다”면서 “그 의미에 부합하는 농가가 꽤 늘고 있다는 건 저에게 보람되고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가끔 농민들에게 “항상 주문을 정리하느라 가족과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는데 어레인지를 사용한 후 읍내 요가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덕분에 주문처리 시간을 크게 단축했어요. 시간을 선물 받았어요”라는 등의 메시지를 받을 때마다 힘이 난다고 했다. 농업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 모두를 위한 새로운 직거래 생태계를 만든다는 의미의 사명 ‘에이임팩트(Agriculture+Impact)’에 딱 맞는 결과다.

윤성진 대표는 에이임팩트를 창업하기 전 농산물 직거래 플랫폼인 ‘K파머스’로도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다. 가격 급변으로 팔지도 못하고 산지에서 버려지는 농산물을 보면서 농산물 유통 문제에 주목해 K파머스를 만들었다. 서비스 확장을 위해 현장에서 농민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주문처리의 고충을 공통적으로 듣게 되면서 어레인지를 기획했다. 어레인지에 가입된 농장은 6500곳이고, 여기서 1만2500개의 상품을 거래한다. 단 한 번도 홍보하지 않았지만, 농장주들이 알아서 검색해 서비스에 가입했다. 그만큼 주문처리의 어려움을 해소하려는 필요가 강했기 때문이다.

에이임팩트는 주문처리를 대행해주면서 여기서 오가는 상품 거래 데이터를 확보한다. 이를 통해 소비자의 호응을 얻는 상품이 무엇인지 발굴하고 검증할 수 있다. 무료 서비스인 어레인지를 커머스 서비스 확장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게 됐다. 윤 대표는 “상품 기획자의 주관적 판단이 아니라 객관적인 데이터로 상품을 발굴하고 검증할 수 있는 게 우리의 경쟁력이다”며 “올해 말, 내년 초부터는 어레인지와 융합된 새로운 커머스 서비스를 오픈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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