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맬서스와 툰베리 사이 생산적 대화가 가능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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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최근 ESG 관련한 두 권의 책을 냈다. <ESG 배려의 정치경제학>과 <청소년을 위한 ESG>이다. <ESG 배려의 정치경제학>을 먼저 냈고, 이 내용을 바탕으로 청소년에게 ESG를 소개하는 책을 출간했다. 연내에 다른 관점의 ESG 책을 한 권 더 낸다. 지난해에 출판사와 미리 계획한 일로, 개인적으로 세 권의 ESG 책 가운데 가장 애착이 가는 건 청소년용이다. ESG가 미래세대의 의제가 되지 않는다면 흔히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우리에게 미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경제학자 토머스 맬서스(왼쪽)와 스웨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 / 위키백과 / 경향신문DB

영국의 경제학자 토머스 맬서스(왼쪽)와 스웨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 / 위키백과 / 경향신문DB

<청소년을 위한 ESG>를 교육행정을 하는 분들에게 지인이 소개했다고 한다. 반응은 “주제가 ESG라지만 환경을 주로 다룬 도서로 느껴졌다”였고, 되레 ESG 실천 또한 환경운동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지인이 전해왔다.

일견 이해가 간다. ESG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 당연히 지구온난화와 기후위기를 중심으로 한 환경문제가 시급하고 사활적인 의제라고 답변한다. 그렇다면 하던 대로 환경운동을 하면 되지 ESG 운동을 새로 할 이유는 없는 것 아닐까.

그렇지 않다. 역설적으로 환경문제는 환경 관점만으론 해법을 찾아낼 수 없다. 다음 세대의 대표적 스피커인 그레타 툰베리의 직설법이 분명 유효하지만, 현실적인 해법은 ‘툰베리 밖’에서 찾아질 것이다. 하던 대로의 환경운동은 성공을 기약할 수 없다. S와 G까지 ESG로 삼위일체가 되지 않는 한 기후위기는 물론 인류의 미래를 담보하기 어렵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많은 일화에서 그러했듯 사람들은 아는 것만 보고, 본 것만 본다는 게 ‘지속가능운동’을 벌이는 이들이 겪는 난관이다.

1987년에 발표한 ‘우리 공동의 미래(Our Common Future)’는 인류 차원에서 내놓은 우리 문명의 반성문이자 유엔 수준에서 ‘지속가능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의 개념을 정식화한 기념비적 합의다.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내용은 아니지만 지속불가능한 현 상황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지속가능성을 해법으로 제시한 지구촌을 포괄한 최초의 합의라는 데 의의가 있다. ‘우리 공동의 미래’는 지속가능발전의 두 축으로 환경과 사회를 제시했다.

1992년의 리우 환경회의는 ‘지속가능발전’ 앞에 ‘환경적으로 건전한’이란 수식어를 넣은 ESSD(Environmentally Sound and Sustainable Development)를 통해 환경의제의 우선성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2015년 유엔총회에서 인류 공동의 의제로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를 채택한 것에서 드러나듯 이후 지구 문명 차원에서는 ‘환경적으로 건전한’을 기본값으로 포함한 ‘지속가능발전’으로 문제와 해법을 정리했다.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제와 사회문제를 함께 풀어야 한다는 발상은 사태를 호도한다는 식으로 적잖은 비판을 받았지만, 아무튼 지구 차원의 공론으로 자리 잡았다. 긴 논의가 될 것이기에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지만, 개인적으론 환경·사회·경제의 TBL(Triple Bottom Line) 접근 방식 대신 앞서 언급한 대로 ESG 접근이 더 유효하다고 믿는다.

기후위기만이 덫은 아니다 <인구론>의 토머스 맬서스(1766~1834)는 논쟁적인 인물이다. 맬서스는 사상사에서 반드시 언급돼야 할 만큼 유명세를 누리고 있지만, 부정적인 평가가 주종을 이루고 그의 사상을 혐오하는 사람이 많다.

고등학생 정도만 돼도 맬서스를 알고, 곧바로 인구와 식량의 각각 산술급수적이고 기하급수적인 증가를 말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비대칭은 인류에게 재앙을 불러오지만, 맬서스에 따르면 인류의 종말까지 유발하지는 않는다. 비대칭에 따라 한정된 자원, 즉 식량을 두고 사람들이 싸울 수밖에 없게 돼 때로 전쟁을 통해 인위적이고 급격한 인구감소가 일어남으로써 인구와 식량 간의 새로운 균형점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전쟁이 없으면 질병이 그 역할을 수행하며, 전쟁과 질병이 아니라면 최종적으로 수급 불일치 해소의 극단적 표현인 기근이 인구를 조절한다.

공급(식량)에 맞춰 수요(인구)를 조절해야 한다는 맬서스의 논리구조에서는 식량공급이 인구 수준을 결정하고 삶의 질이 불가피하게 최저수준에 머문다. 식량공급량을 상회하는 인구의 증가는 살펴본 것과 같은, 인위적이든 자연적이든 ‘제재’를 받는다. 말하자면 ‘덫(trap)’에 걸린 것과 같은 상태가 이어지게 되는데 이러한 상태를 ‘맬서스 트랩’이라고 한다.

‘맬서스 트랩’에서 벗어나는 여러 시나리오를 상상해보면 현재의 인류가 그렇게 했듯 증가하는 인구를 부양할 만큼 식량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리면 된다. 공급 해법이다. 반면 맬서스는 ‘획기적’의 한계를 산술급수로 보았기에 수요에서만 해법을 찾았다. 공급이 아닌 수요의 조절에서 해결책을 모색한 맬서스는 결혼이나 출산 제한 등과 같은 제도적이고 얌전한 조절방법과 질병, 기아, 전쟁 등 폭력적인 조절방법을 함께 거론했다. 요체는 어떤 사회구성원의 평균적 삶의 질을 높이려면 빈곤층 비중을 줄여야 한다고 보았다. 맬서스의 관점에서 ‘덫’을 탈출하려면 빈민구제 같은 온정적 사회정책을 폐기하고 적극적으로 경쟁체제를 작동시켜 취약계층이 도태되게 만들어야 한다.

‘맬서스 트랩’은 그의 섬뜩한 방법론과 함께 더는 통용되지 않는다. 정정해, 적어도 식량과 인구 사이의 함수에서 재앙(맬서스의 생각에선 균형)이 사라졌다고 믿는다. 하지만 맬서스의 거친 표현이 불편해 그렇지 생산력의 고도화로 ‘맬서스 트랩’이 완전히 무의미해졌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변수를 식량 외로 넓혀 예를 들어 포괄적으로 지구와 인간 사이의 함수를 새롭게 구성한다면 ‘맬서스 트랩’이 상당한 타당성을 갖게 되리라고 판단한다. 지구 전체로 보면 기후위기로 상징되는 미증유의 ‘덫’에 인류가 걸려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기후위기만이 덫은 아니다.

거버넌스는 왜 필요할까 특정 집단, 특정 국가, 특정 지역의 삶의 질을 급속도로 높이기 위해 다른 집단, 다른 국가, 다른 지역의 삶의 질을 망가뜨려온 게 지금까지 계급, 국가, 인류의 대체적 발전공식이었다. 냉정히 말해 인류의 절대다수를 여전히 ‘덫’에 걸린 채로 놓아두고, 혹은 ‘덫’에 더 깊숙이 밀어넣고 소수가 ‘덫’에서 탈출한 구조다. 이 구조에서는 탈출에 성공한 이들마저 종국에는 다시 바닥으로 추락할 공산이 크다. 근대 이래의 인간문명이 가장 약한 자들을 희생시키며 전진해놓고는 진실을 그대로 까발린 맬서스를 사악한 사상가라고 욕하는 건 부끄러운 짓이다.

답은 언제나 문제 안에 있다. 따라서 지구 범위의 환경과 사회문제의 답은 그 안에 이미 들어 있다. 경제(성장)는 독자적 문제가 아니다. 세계화한 자본주의는 모든 문제의 총합이다. 국민국가 수준에서 세계화한 자본주의를 감당하며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누구에게나 기본적인 삶을 보장할 만큼 평등한 사회를 유도하려면 핵심은 거버넌스다. 미래세대가 문제나 대상이 아니라 주체라는 발상. 거기서부터 거버넌스가 왜 핵심인지 입증되기 시작한다. 경제는 언제나 답이 아니고 문제였다. 맬서스는 여전히 옳다. 맬서스가 생각하지 못한 것은 거버넌스의 힘이다. 실증되지 않았지만 믿어야 하는.

<안치용 ESG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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