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미완의 <푸른 꽃>과 어색한 ES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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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3월 24일 알래스카 프린스 월리엄 해협에서 유조선 ‘엑슨 발데즈’가 좌초해 바다로 기름을 대규모로 유출하는 최악의 해양오염 사태가 터졌다. / Alamy Stock Photo

1989년 3월 24일 알래스카 프린스 월리엄 해협에서 유조선 ‘엑슨 발데즈’가 좌초해 바다로 기름을 대규모로 유출하는 최악의 해양오염 사태가 터졌다. / Alamy Stock Photo

노발리스의 <푸른 꽃(Blaue Blume)>(1802)에는 보통 독일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품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푸른 꽃’은 이 작품의 본래 제목이 아니다. 노발리스가 직접 붙인 제목은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엔(Heinrich von Ofterdingen)>이다. 독일 시인 하이네가 ‘낭만파’라는 평론에서 “이 작품 곳곳에서 푸른 꽃이 반짝이고 드높은 향기를 풍긴다”고 말한 것을 근거로 부제가 ‘푸른 꽃’인 것처럼 알려지게 됐고, 나아가 푸른 꽃은 독일 낭만주의 전체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고양된다. 노발리스는 당시 극찬을 받은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 대해 “불쾌하고 바보 같은 책”이라고 혹평했고, 아마 제대로 된 ‘빌헬름 마이스터’를 보여주고자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엔>을 저술했을 터이나, 스물아홉 살로 요절하면서 저술은 미완으로 끝난다. 노발리스는 필명으로 ‘새로운 땅을 개척하는 자’라는 뜻이다. 본명은 게오르크 필립 프리드리히 폰 하르덴베르크다.

시대정신으로서 ESG ESG의 흐름이 도도하다. 환경(Environment)·사회(Social)·지배구조(Governance)를 뜻하는 영어단어의 앞글자를 딴 ESG에 대해 “MSG와 다른 것이냐”, “이게 언제까지 가는 트렌드냐”와 같은 의구심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린워싱’(위장 친환경주의)과 동일하게 ‘ESG워싱’(위장 ESG활동)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다. 공급망의 ESG실사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이에 대비하기 위한 기업의 고민도 커지고 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최고경영자(CEO)인 래리 핑크가 2020년 초 연례서한에서 ESG투자를 천명한 게 발단이 됐다. 세계적으로 ESG 바람이 거셀수록 그의 주가가 덩달아 치솟는 배경이다.

ESG 전문가로서 이러한 대대적인 확산 소식이 반가우면서도 고민 또한 깊어진다. 예컨대 어떤 대기업에서 자사 공급망의 ESG 실사를 결정하고 시행하라는 지침을 전달했지만, 전달받은 실무 임원이 무엇을 실사해야 하는지를 몰라 난감했다는 소식 같은 게 고민의 일단이다. 핑크의 언급이 워낙 널리 회자하다 보니 ESG를 투자용어로 국한하는 움직임에서부터 내용에 관한 고민 없이 ‘해야 하는 모든 것’ 정도로 대충 마구 쓰는 것까지 다양한 현상이 목격된다.

ESG가 투자를 결정할 때 판단 근거로 삼는 기업의 비(非)재무정보를 3개 부문으로 나눠 총칭한 것은 맞다. 그러므로 투자 쪽 용어이긴 하다. 자본시장에서 기존에 통용된 투자자본수익률(ROI)에 근거한 ‘돈 놓고 돈 먹기’ 투자가 아니라 사회책임투자(SRI) 또는 지속가능투자 쪽에서 사용되는 용어라는 게 차이다. ESG는 ‘푸른 꽃’이 독일 낭만주의를 상징하게 됐듯 자본시장 범위를 넘어 우리 시대 ‘패러다임 전환’의 깃발로 떠올랐다. 투자용어로서의 ESG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투자영역에서 시작된 ESG가 일종의 ‘미러링(무의식적인 모방행위)’ 방식으로 기업과 여타 조직의 경영에 반영돼 경영의 핵심 전략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더불어 시민 생활과 사회 전반에 위기의 시대를 돌파할 공감대의 원칙으로 확산하고 있다. ESG투자(자본시장)→ESG경영(경제·산업계)→ESG사회(시장·공공·시민사회)로 빠르게 흘러넘친다. 이 추세를 되돌리기는 거의 불가능해보인다. 요약하면 반세기에 걸쳐 축적된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가치’ 담론이 CSR(기업의 사회적책임), 사회책임경영과 지속가능경영, 국제표준화기구(ISO)가 제정한 사회책임에 관한 국제 가이드라인(ISO26000),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파리기후협약 등으로 이어지며 상승곡선을 그리는 가운데 기후위기가 전면화했다. 여기에 코로나19로 도래한 비대면 사회, 4차 산업혁명의 파도까지 덮치면서 ESG 시대라는 불가피하고 불가역적인 변화가 등장했다.

문제는 ESG 시대의 도래가 확실하지만 ESG란 제목과 포괄하는, 또는 담아내야 하는 ESG의 내용 사이에 부문·영역·섹터별로 현저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우선 ESG 시대이긴 하지만 ESG란 제목은 기본적으로 어색하다. ‘지속가능’이나 ‘사회(책임)’이 더 적합해보인다. 우리 시대는 그러나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엔> 대신 <푸른 꽃>이 통용된 것과 유사하게 ESG를 선택했다. 위기를 넘어 재앙으로 비화하는 중인 우리 시대의 문제는 사실 거의 자본주의에서 비롯한 것이기에 자본주의와 가장 밀접한 단어인 ESG가 전환의 깃발로 제시된 게 절묘하긴 하다. <푸른 꽃>

[안치용의 까칠한 ESG 이야기](1)미완의 <푸른 꽃>과 어색한 ESG

이 미완으로 끝났듯 우리가 열어가야 할 ESG 시대 또한 방향, 의제, 전략, 과제 등 많은 것을 채우며 나아가야 한다.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기에 내용을 채운 다음에 계속하자는 얘기는 타당하지 않을 뿐더러 설득력도 없다. 단명한 <푸른 꽃>의 작가 노발리스와 달리 ESG 시대는 길게 갈 것이기에 행동하며 내용을 채우는 ‘향토예비군’ 정신은 필연이다. 합의가 없을 뿐 ESG에 관련된 내용은 이미 다 나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 많은 자본주의, 대안은? 지금은 생산되지 않는 포드사의 핀토(Pinto)는 미국의 소형차로 ‘타임’에 의해 ‘사상 최악의 50대 자동차’ 중 하나로 선정됐다. 1970년 출시와 함께 핀토는 소형차 시장에서 인기를 끌었지만, 연료통의 안전성과 관련해 끊임없는 논란에 휩싸였다. 추돌 사고가 일어나면 연료통이 파손되면서 유출된 기름에 불이 붙어 폭발로 비화하는 사고가 잇달아 핀토는 ‘바비큐 시트’로 불렸다. 사고의 원인은 판매가격을 2000달러에 맞추기 위해 연료통을 범퍼와 뒤 차축 사이에 배치한 원천적 구조결함 때문이었다.

1981년 포드사는 소송을 당했다. 재판과정에서 이른바 ‘핀토 메모’가 공개되며 궁지에 몰렸을 뿐더러 부도덕하다는 지탄을 받았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증거인 ‘핀토 메모’는 포드사 내부의 비용편익분석 자료였다.

포드사의 비용편익분석에 따른 차량 안전보강 비용은 1억2100만달러였다. 예상 판매대수를 1100만대로 잡고, 연료탱크가 쉽게 폭발하지 않도록 보강하는 데 드는 비용(대당 11달러)을 곱해 산출한 금액이다. 이 사태에서 가장 심각하고 사악한 장면은 포드사 내부에서 연료탱크를 보강하지 않고 그대로 출시했을 때 드는 비용을 함께 계산해 비교했다는 점이다. 사고율 등을 기준으로 예상 폭발 사고 대수를 2100대로 추산하고, 사망자 180명, 중화상자 180명으로 잡았을 때 소요액은 4953만달러였다. 사망배상금 1인당 20만달러, 중화상 배상금 1인당 6만7000달러, 차량 배상금 대당 700달러가 산출근거였다.

비용편익분석은 연료탱크를 보강하지 않는 게, 즉 사고를 방치하는 게 경제적으로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람을 죽거나 다치도록 놔두는 게 ‘경제적’으로 7147만달러 이익임을 제시했다. 포드사가 소비자 모르게 이런 분석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가히 충격적인데다 그 분석결과를 경영진이 수용했다는 사실은 더 충격적이었다.

포드사 경영진은 왜 그런 경악할 결정을 내렸을까. 추측해보면 사업 특성상 인명사고에 둔감한 상태여서 모든 상황을 수치화, 즉 돈으로 환산하는 사고가 만연해 이것이 경영에 뿌리내렸을 가능성이 크지 않았을까. 경영진에게 이 숫자는 경영상의 판단에 필요한 일상적 자료에 불과했을 수 있다. 숫자 너머에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들이 잊었다는 게 당혹스러운 대목이다. 추산한 사상자 360명은 사망 1건당 20만달러, 중화상 1건당 6만7000달러라는 비용으로만 보였다는 정황이다.

핀토 사건으로 포드사는 징벌적 배상까지 포함해 처벌을 받았다. 핀토 사례가 인본주의에 기반을 둔 기업경영의 대각성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포드사는 물론 대다수 자본주의 기업이 여전히 ‘핀토 메모’에 입각한 경영 방침을 고수하고 있으리라고 보는 게 훨씬 현실에 부합한다. 고발, 폭로, 소송, 사회적 지탄, 배상 등 핀토 사태 당시의 포드사에 비해 고려할 리스크 요인이 더 늘어났을 뿐 여전히 인간 중심보다는 비용편익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봐야 한다.

금융공학 등 계량화 능력의 증대는 일종의 ‘숫자 환원주의’와 맞물려 경영을 포함한 사회 전반에 유체이탈과 비슷한 상태를 초래했다. 핀토 사례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듯 의미는 숫자로 대체된다. 모든 의미를 수치화할 수 있다고 믿는 게 유행하는 말로 신자유주의고, 적나라한 말로 천민자본주의다. 기업은 경영상의 필요에서 비재무 가치를 수치화하기도 한다. 그 필요성에 매몰돼 비재무적 가치 중에 결코 계량화할 수 없는, 혹은 결코 수치로 바꾸지 말아야 할 가치가 존재한다는 공준(公準)을 가끔 잊는다. 어느 책의 제목인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으로 바뀐다.

이 문제 해결에 인본주의 대각성까지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투명성을 기업의 핵심 가치로 삼은 패션기업 에버레인처럼 생산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을 소비자에게 공개하면 어느 기업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돈으로 사려고 감히 시도하지 못하게 된다. ESG는 이처럼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의 핵심인 시장과 기업이 야기하는 문제의 목록이자 해법의 목록이다. 자본시장에 국한하지 않는다. 널리 알려진 대로 문제가 있으면, 해답을 찾는 것은 별개이지만 어쨌든 해답은 있다.

답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에서 찾아진다 지구촌 전체를 통틀어 가장 보편적인 의제인 ‘지속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의 개념이 정의된 건 1987년 유엔보고서 ‘우리 공동의 미래(Our Common Future)’를 통해서다. 지속가능발전이란 개념의 정의가 공식화한 건 1980년대 후반이지만 문제의식은 이미 그 이전부터 나타났다.

‘기하급수 대 산술급수’란 말로 요약되는 인구와 식량의 비대칭 문제로 지속가능의 관점을 선취(先取)한 영국의 토마스 맬서스가 <인구론>을 출간한 게 <푸른 꽃>보다 4년 앞선 1798년이었다.

<성장의 한계> 최초 발행본 / Club of Rome

<성장의 한계> 최초 발행본 / Club of Rome

올해로 발간 50주년을 맞은 <성장의 한계>는 로마클럽(Club of Rome)이 발간한 기념비적 보고서이다. 원제는 ‘성장의 한계, 인류의 위기에 관한 로마클럽 프로젝트 보고서’로 위기(Predicament)라는 단어가 포함된다. 1972년 3월 출간 이후 30여 언어로 번역돼 현재까지 3000만부 이상이 팔렸다. <성장의 한계>는 지구온난화 대처가 지구촌의 핵심의제로 부상하기 전에 성장과 관련된 기존 문제를 종합한 인류의 자기 반성문이다. <성장의 한계>는 인구, 공업생산, 식량, 자원, 환경오염 등 5가지 영역에 걸쳐 비관적인 전망, 즉 지속가능성의 부재를 전망한다. 1900~2100년의 200년을 대상으로 시뮬레이션을 한 <성장의 한계>가 50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지난 데이터를 가지고 일치 여부를 파악한 결과 지난 50년은 시뮬레이션 경우의 수 중 최악과 거의 맞아떨어졌다.

지속가능발전 개념의 최초 사용자는 ‘환경과 개발을 위한 국제연구소(IIED)’ 설립자인 영국의 경제학자 바바라 워드라는 게 정설이다. 1972년 6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유엔인간환경회의(UNCHE) 연설에서 워드는 “더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들기 위한 환경과 개발에 관한 새롭고 공평한 파트너십”을 역설했다. 이 회의에 맞춰 출간한 책 <오직 하나인 지구>에서 “인간종이 지금뿐 아니라 미래세대에서 지구를 살기에 적합한 곳으로 유지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정의할 필요가 있다”고 한 문장은 지속가능성의 개념을 정립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공식적인 지속가능성의 정의는 전술한 대로 1987년에 내려졌다. 유엔 ‘세계환경발전위원회’에서 발표한 ‘우리 공동의 미래’는 보고서 작성 책임자인 전 노르웨이 수상 그로 할렘 브룬틀란의 이름을 따서 ‘브룬틀란(Brundtland) 보고서’라고도 하는데, 지속가능발전에 관한 전 세계적 합의를 최초로 도출했다.

1989년 3월 24일 알래스카 프린스 월리엄 해협에서 유조선 ‘엑슨 발데즈’가 좌초해 바다로 기름을 대규모로 유출하는 최악의 해양오염 사태가 터졌다. 이에 따라 전 세계에서 시간차를 두고 단일선체 구조였던 유조선이 이중선체구조로 바뀌고 관련한 ‘발데즈 원칙’이 생긴다. 이 원칙은, 기업은 자신의 활동으로 인해 생기는 어떤 재해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며, 원상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199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유엔환경회의가 열리며 체결된 ‘리우환경협약’은 인류 문명 차원에서 지구온난화에 공동으로 대처하겠다는 합의를 끌어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1997년엔 행동계획으로 교토의정서가 체결된다. 지구온난화라는 지구 공동의 위기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배출권 거래 제도를 도입했다. 자본주의가 초래한 지구 공동의 위기를 거래라는 자본주의 방식으로 해결하겠다는 취지로 평가받는다.

2010년에는 국제표준화기구(ISO)에서 ‘사회책임에 관한 국제 가이드라인’, 즉 ISO26000을 발표했다. 2015년에 지구촌 차원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s)가 수립되고 지구온난화에 대처하는 파리기후협약이 체결됨으로써 인류 공동의 위기에 대한 인류 공동의 해법을 모색하는 흐름이 꾸준히 이어져왔다. 최근 들어 가팔라지는 양상이다. 기업의 사회적책임(CSR)을 묻는 움직임 또한 1950년대에 생긴 이후 점차 폭넓게 적용되며 정교화하는 추세다. 이처럼 지구촌 전체에서 또 국가 단위에서, 기업이나 NGO 차원에서 포용적이고 평등한 지속가능 미래를 추구하는 흐름이 강력해지고 본격화하고 있다. 단위는 단위별로, 전체는 전체대로 오래된 생각을 새롭게 해석해 통일된 기치를 내걸고 있다. 그 기치가 ESG라고 해서 틀린 설명은 아닐 것이다. “사람은 세상 어디서든 자신이 사랑하는 것과 닮은 것을 발견한다”는 노발리스의 말은 ESG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인류로 하여금 비관과 낙관을 동시에 품게 한다.

<안치용 ESG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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