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최장의 장마, 비 피해로 여름답지 않은 여름이 지나고 있지만 그래도 역시 여름은 바다 아닐까. 여름 바다를 떠올리다 보니 상상은 해적으로 흐른다. 어린 시절 영국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 이탈리아 작가 에밀리오 살가리의 <검은 해적> 등을 보며 모험을 동경했던 세대의 흔적이랄까.
요즘 젊은 세대도 다르지 않은 것이 텍스트 문학이 아니어도 디즈니의 시리즈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과 블록버스터 영상 콘텐츠 덕에 잭 스패로 선장 스타일의 자유분방한 삶을 선망하는 것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철이 들고 성인이 되어서는 산속에 산적, 물 위에 해적은 결국 도둑 떼에 불과하며 범죄자임을 인식하는 시기가 온다. 소말리아 해적처럼 종종 우리의 선박과 승선원을 괴롭히기도 하는 현실의 해적은 비참함과 폭력성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뉴스에 등장한다. 아, 해적과 IT는 무슨 상관이냐고?
스티브 잡스가 창업한 애플사가 매킨토시를 개발하던 1983년, 잡스는 팀원들에게 “해군이 될 바에는 해적이 돼라”며 저항정신을 고취했다. 2016년 4월 1일 애플 창사 40주년에는 초기부터 사무실에 걸려 있던 해적기(애플의 해적기에는 검은 안대 대신에 무지개색 사과가 그려져 있다)를 건물에 게양하기도 했다.
그런데 올해의 해적왕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될 것 같다. 중국의 앱 서비스 ‘틱톡’이 세계적 열풍을 일으키자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인수 시도를 반대하며 틱톡을 폐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다가 갑자기 인수를 환영하면서 9월 15일까지라며 날짜를 못 박고 인수를 독려했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인수에서 나오는 이익 일부를 수수료로 정부에 내놓으라는 무슨 브로커 같은 요구를 한 것이다. 대선을 위한 경제 성과도 중요하고 재선도 급한 것은 알겠는데 대통령과 사업가, 혹은 해적의 정체성을 혼동하는 이런 행태는 도대체 뭘까 궁금하다. 이에 당혹한 중국이 던진 경고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말라’는 것. 해적은 보물지도를 두고 다툼을 벌이다 늘 마지막에 보물상자를 파내서 여는데, 이때 부가 나오기도 하고 화가 나오기도 하는 상반된 결과를 목도한다.
그러고 보니 디지털 시대에는 정치에도 디지털 세대의 정치를 추구하는 해적들이 등장했다. 우리나라에 있는 녹색당은 아직 의석도 못 낸 원외 소수 진보정당이지만 유럽에서는 집권 경험도 있는 낡은(?) 기성정당이 되었고, 급진적 정당은 2006년 스웨덴에서 시작하여 온라인을 기반으로 카피레프트를 주창하는 해적당이다. 유럽 각국 의회에서는 이미 7~25%의 득표율을 내며 의석을 탈취(?)하고 있다.
국경을 넘어 시대적 의제로 뭉치고 헤어지는 세계연합정당이 활동하는 먼, 혹은 가까운 어느 때 남북연합정당이 등장한다면 그 또한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아직은 북한에 노동당 외에 활성화된 정당의 등장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말이다.
큰 도적, 나쁜 해적이 국가를 앞세워 기업을 강탈할 때,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무고한 세계시민의 권리를 약탈할 때 나서야 하는 것은 사용자 네트워크이고, 우리는 자신의 존재 일부인 데이터를 스스로 지켜야 한다. 국가 간 발전의 경쟁도 알고 보면 해적질이었고, 기업 간 약육강식도 해적질이 기반이었다면 이제는 해적 개미 떼가 이러한 약탈의 역사를 바꿔볼 때도 되었다.
<최영일 한국인터넷전문가협회 이사·시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