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는 미래세계를 보고 체험할 수 있는 축제가 열린다. CES, ‘국제전자제품박람회’라는 다소 밋밋한 제목이지만 역사와 전통이 쌓이고, 유수의 글로벌 기업들이 신제품을 선보이는 장으로 자리 잡다 보니 패션계에서 뉴욕·파리·밀라노 등 유명 패션쇼의 트렌드 세터 위상 못지않다. 디지털 얼리어답터들의 관심과 열광이 쏟아질 뿐 아니라 각 국가와 산업, 기업들에는 정책적 영감과 비즈니스 정보를 제공하는 행사로 성장했다고 평가해도 좋다.
필자도 20세기 말, 21세기 초에는 정보기술(IT) 벤처업종에 몸담아 CES 시즌에는 라스베이거스를 방문하곤 했다. 재미있는 추억은 평소 국내에서는 만나기도 어려운 사업가들을 만나 한국 IT의 미래에 대해 즉석 토론을 곳곳에서 벌였던 장면들이다.
이번 ‘CES 2020’도 의미 있는 화두를 산업계와 소비시장에 던졌다. 인공지능을 활용한 다양한 제품과 혁신 모빌리티를 비롯해 블록체인과 보안기술 등이 깊은 인상을 주고 각광 받았다. 우리 기업 중에는 가장 호평을 이끌어낸 현대차의 도심 항공 모빌리티(UAM)를 필두로 이미 세계를 선도하고 있는 LG전자의 롤러블 OLED TV, 삼성전자가 선보인 테니스공 모양의 홈네트워킹, 홈오토메이션 집사 로봇 볼리 등이 화제의 중심을 점하는 데 성공했다.
이 쇼에는 충분히 화려하고, 미래지향적이며 서프라이즈가 있지만 아쉬운 대목이 있다.
첫째, 2000년을 전후해 한국 벤처산업계의 황금 시기에 수많은 전통 대기업을 몰아낼 기세로 성장하던 진짜 혁신벤처들의 기세는 어디로 증발한 것일까. 21세기가 도래하고도 20년, 여전히 코리아는 삼성·LG·SK·현대뿐인가. 스티브 잡스가 외쳤던 ‘우리는 해적이다’라는 거친 반항심으로 돌풍을 만들었던 그 ‘벤처 붐’을 지금 여기에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 고민이 된다.
둘째, SF 영화에서 본듯한 첨단 제품과 하이테크놀로지 기기들이 그저 오감을 자극하고 확장하는 어른을 위한 값비싼 장난감이 아닌가 하는 공허감이다. 인간의 삶과 공동체에 새로운 발상과 관점을 제공하는 인식, 의식의 혁명적 전환에 영감을 주는 아이디어는 빈약했다고 평가한다.
CES 2020에서 전시된 기기들을 보고 상상해본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 나오는 것 같은 개인용 비행체(PAV)를 타고 퇴근하고 스타워즈에 나오는 인공지능 로봇과 비슷한 볼리가 관리해준 첨단주택에 귀가한다. 거실 소파에 앉아 현실보다 더 현실감 있는 롤러블 OLED TV 전원을 켠다. 그것으로 된 걸까. 첨단 기기를 통해 인간은 하루의 피로를 해소하고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까. 인간의 감정을 지배하는 것은 디바이스가 아니라 콘텐츠다.
할리우드가 꿈의 공장이라면 라스베이거스 CES는 공장의 꿈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할리우드나 라스베이거스나 모두 거기서 거기인 판타지 시장에 머물러 있다. 그 이유는 돈과 CG만 퍼들인 블록버스터처럼 철학과 인문, 유머와 감성이 버무려진 스토리라인이 보이지 않는 데 기인한다.
꽉 막힌 퇴근길 교통체증을 뚫고 집에 도착해 씻고 낡은 가죽소파에 파묻혀 하일랜드산 스모키위스키 한잔에 지글지글 LP 노래 몇 곡이면 피로가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디지털은 아직 멀고 차갑고, 아날로그가 익숙하고 따뜻하다. 난 구시대인인가. CES 2021에서는 메마른 가슴에 한줄기 감동을 달라.
<최영일 한국인터넷전문가협회 이사·시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