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청 40년 변화의 물결, ‘정권의 시녀’ 탈피 ‘열린 세정’으로 납세 서비스
장면#1
때는 1985년 초. 국내 굴지의 기업 ㅅ이사는 세무서의 주사(7급)인 ㄱ씨를 서울 시내 한 술집에서 만났다. ㅅ이사의 목적은 세무조사를 하고 있는 ㄱ씨를 접대하기 위한 것. ㄱ씨에게 거의 90도 각도로 인사를 한 ㅅ이사는 ㄱ씨에게 공손하게 술을 따르며 "잘 봐달라"고 머리를 조아렸다. 비록 정중하게 술을 받았지만 ㄱ주사의 입가에 거만한 미소가 번졌다.
장면#2
20년이 흐른 2005년 초. 세무조사를 하기 위해 중소기업을 방문한 ㄴ씨 일행은 점심식사를 같이 하자는 ㅈ사장의 제의를 뿌리치고 인근 김치찌개 집에서 밥을 먹었다. 뇌물(?)을 안 받고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세무조사를 하겠다는 뜻이다. ㅈ사장도 별로 불안한 기색 없이 임원들과 같이 식사를 하러 갔다. 제대로 세금을 내고 있기에 세무서 직원에게 ‘따로 부탁’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
조사권과 과세권 등을 가진 국세청 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소불위’다. 그동안 국세청은 국가정보원, 검찰청과 함께 정권의 3대 핵심기관이라고 불려왔다. 24년간 국세청에서 근무한 김종상 전 부산지방국세청장(현 KT 이사회 의장)은 퇴임 후 펴낸 ‘국세청 사람들’에서 “국세청장이라는 자리는 정부조직법상 차관급이지만 정부 내의 기능이나 영향력으로는 장관 이상으로 느껴질 때가 많았다”고 실토했다. 사정기관인 국정원이나 검찰청과 달리 국세청은 국가운영의 근간인 세금을 걷는 기관이다. 세금을 얼마나 내느냐에 따라 기업이나 국민은 희비가 엇갈린다. 그 권력이 막강할 수밖에 없었다. 탈세를 한 기업엔 국세청(세무서)은 저승사자와 같은 존재였다. 1980년대에는 한 기업의 경리부장이 세무조사반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심장마비에 걸려 사망했을 정도다.
본청 조사국은 ‘국세청의 중수부’
또 국세청은 권력자의 정치적·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이용되기도 했다. 권력을 잡은 후 가장 먼저 하던 일이 정치적 경쟁자에 대한 ‘표적 세무조사’였다. 과거 현대그룹(정주영)이나 포항제철(박태준)에 대한 특별세무조사가 대표적인 사례다.
국세청이 1966년 재무부 사세국에서 떨어져 나와 개청한 지 40년이 흘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7년부터 시작될 제2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과 관련해 팽창하는 재정수요를 조달하기 위해 만들었다. 현재 국세청에는 본청과 서울청 등 6개 지방청 전국 99개 세무서 1만7000여 명이 근무한다. 국세청에서 핵심부서로 꼽히는 것은 단연 조사국이다. 탈세한 기업이나 개인에 대한 세무조사 업무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 물론 조직 안에서 영향력도 가장 크다. 따라서 엘리트 직원들이 조사국에 배치되고 이들을 진두지휘하는 수장인 조사국장도 최고 엘리트 세무관료가 발탁되는 것이 관례다. 특히 본청 조사국은 대검 중수부에 비교된다. 그래서 조사국장을 ‘국세청의 중수부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대 조사국장 중에는 추경석 전 건설교통부 장관, 이근영 전 금융감독위원장 등 쟁쟁한 인사가 많다.
근래 들어 국세청은 크게 변모했다. 시금석은 11대 이건춘 청장. 이 전 청장은 부임과 함께 ‘달라진 국세청’을 표방하며 ‘열린 세정’이란 슬로건을 내걸었다. 납세자에게 한 발짝 더 다가선 세정을 펼치겠다는 의지를 담은 ‘열린 세정’은 현재까지도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과거에 ‘정권의 시녀’로서 자행하던 표적 세무조사는 사라졌다. 국세청 관계자도 ‘무소불위’란 표현에 대해 “이제는 아니다”고 못박았다. 기업들도 낼 세금을 제대로 내고 있기에 세무조사에 대해 과거처럼 벌벌 떨지 않는다. 개업한 지 20년이 넘은 ㅎ세무사는 “과거에는 대기업 임원들이 7급 주사에게 굽실굽실하며 칙사대접을 했다”면서 “그러나 요즘은 오히려 (국세청 직원들에게) 대든다”고 설명했다. (박스 기사 참조) 실제로 투기펀드 론스타의 세무조사 때 론스타의 직원들이 몸싸움까지 하며 완강히 저항했다. 하지만 이들은 검찰의 압수수색 때는 순순히 응했다. 국세청의 현 위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기업 사외이사 국세청 출신 선호
국세청 직원들의 태도도 크게 변화하고 있다. ㅇ세무사에 따르면 과거에는 오후에 세무조사를 나가 잠깐 조사를 한 후 저녁 식사 대접(?)을 받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제는 오전에 나가 오후 늦게까지 세무조사를 실시한다고 한다. 물론 대접을 받는 경우도 크게 줄었다. 기업 등에서도 제대로 세금을 내고 있어 굳이 대접할 이유도 없다.
국세청은 지난 2월에는 세계 주요 10개국 국세청장이 참여하는 ‘G10국세청장 회의’의 창설 멤버로 확정됐다. 즉, 세계 조세 행정의 중심국가 그룹에 진입한 것이다. 이로써 해외에 진출한 국내기업에 대해 저승사자가 아닌 든든한 후견인 역까지 하게 됐다.
이렇게 변화하는 국세청이지만 ‘무소불위’의 여진(餘震)은 여전하다. 이는 기업의 사외이사에 국세청 출신이 다수 포진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컨대 삼성전자는 황재성 전 서울지방국세청장, 삼성물산은 서상주 전 대구지방국세청장이 사외이사다. 현대차는 박병일 전 서울지방국세청 조사2국장, 현대제철(옛 현대INI스틸)은 전형수 전 서울지방국세청장이 사외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이밖에 삼호F&G는 황수웅 전 국세청 차장을 사외이사로 임명하는 등 기업들의 국세청 출신 인사의 선호도는 결코 줄지 않고 있다.
어느 세무사의 고백 세무사 ㅎ씨(48)는 상고를 나와 20대 초반에 세무사 시험에 합격, 수도권에서 20년 가량 세무사를 하다가 몇년 전부터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그가 20여 년간 지켜본 세무서를 그대로 서술한다. 〈편집자〉 세무서는 기업이 제일 무서워하던 곳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탈세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당한 세금을 내고 있다. 그래서 무서워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세무조사도 크게 줄었다. 세금을 잘 내니까 조사 나갈 필요가 없어져서다. 세금을 잘 내는 것은 사회가 투명해진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불만있는 내부 직원이 탈세에 대해 투서를 할 수도 있고, 노조가 시퍼렇게 감시하기 때문인 것도 있다. 이제는 세무공무원을 칙사대접 하지 않는다. 이제는 오히려 대든다. 1980년대에는 대기업 임원들이 7급 주사에게 굽실굽실했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 대기업 임원들이 평소에 친분있는 국장급 인사와 골프를 치기는 하지만 하위직 공무원에게는 안 그런다. 과거에는 세무서가 소득세과, 부가가치세과 등 세목별로 과가 조직돼 있었다. 그런데 세무서에 ‘내무’라는 비공식 직책이 있었다. 추석 등 때가 되면 이 ‘내무’가 직원들로부터 돈을 걷었다. 금액은 담당구역, 즉 상권의 크기에 따라 차이를 뒀다. 이 돈은 주로 공동경비로 사용했다. 일부는 경찰에게 준 것으로 안다. 직원들은 기업이나 상가에서 돈을 안 받을 수가 없다. 안 받으면 자기 월급에서 내놓아야 한다. ‘내무’도 당연히 기업이나 상가에서 받았을 거라고 전제하고 돈을 걷었다. 또 목돈이 생기면 직원들이 나눠 갖는 경우도 있다. 이때 안 받으면 왕따 당한다. 그래서 받는다. 과거에는 구조적으로 ‘청백리’가 나올 수 없었다. |
역대 국세청장은 정권의 핵심
안무혁씨, 추경석씨, 이건춘씨 등 역대 국세청장의 면면을 살펴보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국세청은 청와대의 의지에 따라 세무조사를 실시하는 등 정권 안보의 도구 노릇을 했다. 권력 최고위층과 인연이 없으면 국세청장이 될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정권의 실세가 국세청장 자리에 올랐다. 예컨대 박정희 전 대통령 당시에는 5·16 군사쿠데타의 주역들이 주로 국세청장을 맡았고, 전두환 전 대통령 때에는 육사 후배가 주로 국세청장에 임명됐다. 노태우 전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때에는 각각 TK, PK, 호남 출신이 두드러졌다.
개청 이후 역대 국세청장은 모두 14명이다. 초대 이낙선씨, 2대 오정근씨, 3대 고재일씨, 4대 김수학씨, 5대 안무혁씨, 6대 성용욱씨 7대 서영택씨 8·9대 추경석씨, 10대 임채주씨, 11대 이건춘씨, 12대 안정남씨, 13대 손영래씨, 14대 이용섭씨 15대 이주성씨 등이다. 이중 절반이 넘는 8명이 장관으로 영전됐다. 계속해서 출세 가도를 달리는 엘리트 코스였던 셈이다.
역대 국세청장 중 가장 실세는 육군 준장 출신인 안무혁씨다. 육사 14기인 안씨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발탁으로 1982년 임명돼 무려 5년간 국세청장을 재직했다. 이후에는 권력의 최측근에만 돌아가던 안기부장에 임명될 정도로 전두환 전 대통령 집권기간 내내 정권의 최고 실세를 유지했다. 이런 막강함 힘을 바탕으로 안씨는 국세청이 청와대에 가까워야 한다는 논리를 펴며 양평동에 위치했던 국세청을 지금의 수송동으로 옮겼고, 서울청장의 1급 승격 등 조직을 개편하는 등 국세청을 최강의 권력기관으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8·9대 연임청장인 추경석씨는 공직생활 대부분을 국세청에서 보낸 실무형 국세청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10개 중앙언론사에 대해 세무조사를 실시해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다. 추씨는 4년이란 비교적 긴 기간 국세청장을 지내고 건설교통부 장관으로 영전했다. 정권 내내 대통령으로부터 따뜻한 배려(?)를 받았음을 엿볼 수 있다. 14대 청장이던 이용섭씨는 청와대 혁신관리수석을 거쳐 행정자치부 장관에 임명됐다.
하지만 이러한 막강한 힘을 남용해 국세청장이 권력형 비리에 연루되는 경우도 있었다. 10대 청장 임채주씨는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 당시 ‘세풍’사건에 연루돼 유죄판결을 받았다. 13대 청장 손영래씨는 썬앤문 등과 관련한 비리혐의로 법정에 섰다. 6대 성용욱씨는 청장 재임시 아내가 돈뭉치를 받은 사실이 문제가 돼 재임 1년도 되지 않아 국세청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조완제 기자 jwj@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