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의 사전적 의미는 크게 3가지다. ①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②다른 일을 먼저 한 뒤의 차례, ③순서상이나 시간상의 맨 끝. 그런데 어떤 나중은 기약 없음의 다른 말로 쓰이기도 한다. 나 역시 “나중에”란 말을 핑계로 원치 않는 약속이나 다짐을 회피한 적이 있다.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다”, “나중에 보자”는 말만 남기고 거절을 완곡히 표현했다고 스스로 위안 삼는 식이다. 반대로 “나중에”라는 상대의 완곡한 거절을 이해하지 못하고 꽤 오랜 시간 뒷말을 기다린 경험도 있다. 혹자는 회피를 목적으로 한 ‘나중에’를 치사한 언어라 표현했다. 두고 보자는 의미를 내포해 상대의 행동이나 상황을 지켜본 뒤 확답을 내리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최근 더불어민주당에서 ‘나중’과 관련한 두 개의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다. 우선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논란이다. 혹시 있을 미래의 5000만원 이상 주식 수익에 세금이 붙을까 두려운 이들이 금투세 폐지론을 외쳤다. 민주당은 이에 화답하듯 유예론을 꺼내 들었다. 금투세 시행 시기는 당장 내년 1월이다. 당내 토론이 한창이지만 지도부의 마음은 유예 쪽으로 기운 듯하다. 약세를 보이는 주식시장을 고려해 시장이 회복세를 탄 나중에 금투세를 도입하자는 게 표면적 이유지만,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대선 가도를 위한 셈법이 깔려 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시행을 주장하는 이들은 법안이 재차 유예되면 결국 나중은 없을 것이라 우려한다.
다른 한 장면은 지난 10월 2일 이 대표가 장종현 한국교회총연합 회장과 만난 자리에서 나왔다. 이 대표는 동성혼 합법화와 차별금지법 추진에 관한 생각을 질문받자 “먹고사는 문제들이 충분히 해결되는 게 지금은 더 급선무”라고 답했다. “충분히 논의하고 사회적인 대화·타협이 충분히 성숙한 다음에 논의해도 되겠다”라고 덧붙였다. ‘나중에’라는 표현이 직접 쓰이진 않았지만, 차별금지법은 사실상 먹고사는 문제 나중의 일이라고 말한 셈이다.
기독교계의 강한 반발에 완급 조절을 시사하면서도 법 제정의 뜻은 굽히지 않은 것이란 해석도 있다. 그러나 기시감이 든다. 민주당의 ‘나중에 정치’는 유독 차별금지법에 가혹했다. 게다가 차별·혐오 범죄의 표적이 된 이들에게 차별금지법은 먹고사는 문제보다 시급한 생존 문제다. 이 대표의 답변에 좌절감을 느낀 이들이 적지 않은 이유다.
“인간 존엄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만들기 위해 지난 몇 년간 입법 청원, 도보행진, 집회, 문화제, 거리유세, 토론회, 성명 등 할 수 있는 모든 활동을 했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임기가 끝나던 날 한 활동가는 국회 앞 기자회견에서 목놓아 외쳤다. 차별금지법은 2007년을 시작으로 회기마다 발의됐지만 한 번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민주당은 여당일 때도, 국회의 과반 의석을 차지한 제1야당일 때도 ‘나중’을 외치고 있다.
금투세와 차별금지법을 대하는 온도 차에 유감을 표한다. 서민과 약자를 위한다는 민주당의 약속은 껍데기만 남은 듯하다. ‘이재명의 나중’을 위해 분투할 뿐이다. 내 짐작이 틀렸다면 금투세에 쏟는 관심의 절반만이라도 차별금지법에 쏟아봤으면 한다. 인간 존엄의 문제 앞에 지금보다 절실한 나중은 없다.
<이유진 기자 yjle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