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유세차량의 소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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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한국 선거운동의 독특한 풍경 중 하나는 온 거리를 소란스럽게 만드는 유세차량이다. 수십 년 동안 ‘소음 공해’를 둘러싼 논란이 반복됐지만, 정당 색깔로 도배된 트럭과 고성능 확성기는 여전히 선거운동의 주요 수단으로 사용된다. 물론 유세차량이 무조건 좋다 나쁘다 평가하기는 어렵다. 소음에 고통받는 사람이 많다고 해도, 시민의 정치 참여를 위한 효과적 방법이 될 수는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질문은 남는다. 왜 한국에서는 다양한 정치적 행위가 ‘시끄러움’을 주요 소통 수단으로 사용하는가?

시끄러움이라는 소통 방식

공개된 장소에서 시끄러움을 활용하는 경우는 다양하다. 광화문 광장을 가보라. 차량에 달린 고성능 확성기에서 ‘예수 믿고 천국 가라’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누군가는 휴대용 확성기를 들고 다니며 설교문을 반복 재생한다. 자신이 증오하는 정치인 집 앞에서 소음 공격을 하는 집단도 있다. 노동조합, 극우집단, 정당, 시민단체, 종교단체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종류의 집회에서 확성기를 사용한다. 큰소리를 내서 주변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시끄러움이라는 언어 전달 방식은 이토록 다양한 상황에서 활용되지만,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을 가진다. 무엇보다 일방적이고 강제적이다. 즉 발언자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지만, 듣는 쪽은 말할 수 없고, 듣기를 거부하기도 어렵다. 확성기에서 나오는 말의 목적은 내용 전달이 아니라 ‘여기서 우리가 말을 하고 있다’는 상황 자체를 만드는 데 있다. 그래서 아무 말 없이 시끄러운 노래나 구호를 반복해서 틀어놓기도 한다.

물론 이런 방식의 소통 방법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정치적 공간에서 배제된 소수자들, 큰소리로 울부짖는 것 말고는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할 방법이 없는 절박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시끄러움은 ‘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다’는 존재 선언이다. 여기에다 ‘덜 과격한 행동’이나 ‘합리적 대화’ 따위를 요구하는 건 한심할 정도로 위선적인 짓이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런 소통 방식을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시끄러움을 통해 전달되는 것은 말의 내용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존재다. 즉 누가 어떤 태도로 말하는지가 중요할 뿐, 말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상관없다. 유세차량에서는 끊임없이 정치인의 발언이 흘러나오지만, 화자와 청자 모두 발언의 내용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확성기 주변에 있으면 귀가 아파 내용에 집중할 수 없고, 멀리 있으면 그냥 웅웅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그럼에도 유세차량이 계속 사용되는 것은 소음 생산 그 자체가 핵심 기능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당의 정치인 아무개가 여기서 시끄럽게 굴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 그래서 후보자의 이름, 정당, 색깔, 기호를 각인시키는 것이 최종 목적이다.

한국의 언어문화는 언어의 내용보다 언어 행위의 방식이나 환경(컨텍스트)에 중요성을 부여한다. 말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말하는 태도가 중요하고, 주장의 논리와 타당성보다 주장하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더 결정적이다. 글 잘 쓴다는 평가를 받으려면 체계적인 논변보다 수사법에 신경 써야 한다. 언어의 내용에 집중하는 ‘합리적’ 문화보다 이런 컨텍스트 중심의 언어문화를 더 우월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는 공동체의 관점에서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말을 하면 내용보다 말투에 신경 쓰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은 환경에서 제대로 된 토론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토론이 의견 차이가 아니라 ‘말하는 싸가지’ 때문에 파국으로 끝난다. 다수는 말의 내용보다 말하는 사람에게 집중하고, 주장의 타당성보다 주장자의 ‘명함’을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말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논쟁과 말싸움에서 이기려면 무엇보다 공격적 말하기 태도가 필요하다. 이런 언어문화에서 유세차량의 시끄러움은 결코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300개의 확성기

생각해보면 한국에서는 거의 모든 정치적 언어 행위가 시끄러움을 만드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국회 청문회를 보라. 자기 말의 내용을 정확히 전달하려는 의원보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안달하는 의원이 더 많다. 그래서 호통과 짜증이 주요 소통 수단으로 사용된다. 국회의원의 호통이나 유세차량의 확성기나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시민이 정치인의 발언을 평가할 때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은 말의 내용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돌아가는 곳에서는 정치인의 언어가 그의 정체성을 규정하겠지만, 한국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누구 편인지다. 내용 있는 말을 하는 정치인은 극소수이고, 정치 공간의 언어 상당수가 ‘아무 말’이다. 그런 말의 목적은 내용 전달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 편인지, 자신의 적이 누구인지를 선언하는 데 있다. 시민, 정치인, 언론 모두 말의 내용에는 별 관심이 없고, 발화가 일어나는 상황과 역량 관계에 집중한다. 상황에 따라 정치인의 말이 매번 바뀌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물론 모든 정치 공간이 이렇게 작동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정치적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협상의 자리에서는 내용을 가진 언어가 필요하다. 그래서 두 가지 정치 언어 공간이 분리된다. 폐쇄적이고 내부적인 협상의 공간에서는 실질적 소통이 이루어지는 반면, 시민들에게 열려 있는 공적 공간에서는 모두 확성기에 소리 지르듯이 말한다. 결국 정치 집단 사이의 은밀한 협상 말고는 언어적 소통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남지 않는다. 본디 의미의 정치적 토론, 즉 공동체의 삶을 운영하기 위한 시민 간 대화는 어디에서도 찾기 힘들다.

대한민국 국회는 300개의 유세차량이 모인 곳이나 다름없다. 확성기 뒤에서는 정치인끼리 내적 대화와 토론을 하겠지만, 앞에서는 말의 내용을 최대한 축소하고 컨텍스트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친구와 적을 선언하고, 화내고 호통치고, 소리 지르고, 눈물 흘리고, 읍소하고, 큰절하고, 말을 돌리거나 얼버무리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정치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식의 언어 행위는 듣는 쪽의 말을 필요로 하지 않고 허용하지도 않는다. 한국 선거에서 유권자는 언제나 ‘심판자’의 역할을 할 뿐, 정치적 토론에 참여하는 시민으로서 존재한 적이 없다. 애초에 그런 토론이 이루어질 정치적 언어 공간 자체가 형성되지 못했다. 따라서 이제 우리 모두 자문해 봐야 한다. 한국의 정치체제를 민주주의라고 부른다면, 그건 도대체 어떤 의미의 민주주의인가.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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