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헤어질 결심…적대적 두 국가 체제는 무엇을 바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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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기본합의서 폐기 가능성…영토 분쟁 소지에 핵 억제력도 잃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3월 15일 항공육전병부대(공수부대)들의 훈련을 지도했다고 조선중앙TV가 16일 보도했다. 조선중앙TV 화면=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3월 15일 항공육전병부대(공수부대)들의 훈련을 지도했다고 조선중앙TV가 16일 보도했다. 조선중앙TV 화면=연합뉴스

한국사회가 4·10 총선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남북관계도 변화를 향해 달음박질치고 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북한이 일관되게 외치는 것은 남한과의 결별이다. 보수 정권 시기 반복된 일시적 단절이 아니다. 한국 정부가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한반도 질서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밝힌 ‘적대적 두 국가’ 체제로 빠르게 전환하고 있다. 이를 위해 북한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여겨졌던 ‘선결 조건’을 해결하는 중이다. ‘한민족’, ‘평화통일’이라는 뿌리 깊은 인식의 삭제다.

북한 정권에는 김일성 시대부터 강조해온 두 가지 역사적 소명이 있다. 하나는 ‘사회주의 강국 건설’, 또 다른 하나는 ‘조국통일’이다. 김일성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통해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 원칙에 합의했다. 북한은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제시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 방안’, 1993년 4월 최고인민회의 제9기 5차 회의에서 제시한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 대단결 10대 강령’을 묶어 조국통일 3대 헌장으로 삼았다. 이는 곧 김일성의 통일 관련 유훈이 된다. 그런데 김 위원장은 김일성의 의지를 담아 평양에 세운 ‘조국통일 3대 헌장 기념탑’을 “꼴불견”이라며 철거했다. ‘적대적 두 국가’로의 관계 전환을 위해 김일성의 권위에까지 도전하는 모양새다. 북한이 일시적·감정적 결별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방증하는 대표적 사례다.

이제 북한은 한반도 내 두 국가 체제로의 전환을 위한 가장 상징적인 걸림돌도 치울 모양새다. “남과 북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특수관계”라고 정의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이른바 ‘남북기본합의서(1991)’의 폐기다. 지난 3월 28일 통일부는 “북한이 제14기 최고인민회의를 추가로 개최하고 헌법 개정뿐 아니라 남북기본합의서를 폐기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북한의 이러한 움직임은 논리적 일관성을 갖는다. 민족 부정→평화통일 포기→두 국가 체제로의 전환이라는 순차적 움직임이다. 그렇다면, 궁금한 것은 그다음 상황이다. 두 국가 체제의 한반도는 과거와 무엇이 다른가이다.

상황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국사회 일각에는 남과 북은 이미 사실상의 두 국가 체제 아니냐는 인식이 있다. 이는 남북이 별개 국가로 갈라지더라도 지금과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란 기대를 내포한다. 유사한 맥락에서 남북기본합의서 폐기도 평가절하하는 시각이 많다. 이미 합의서는 실질적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1991년 남북이 유엔에 동시가입함으로써 국제법적으로 남북은 별도의 독립 국가로 인식되고 있다. 각자 표결권을 갖고. 대사를 파견하는 식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사실상 남북은 이미 정치적 적대국임을 선언하고 있다”며 “북한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나 금강산국제관광국을 없애는 등 남북기본합의서를 유명무실화하는 실질적 조치를 끝내고 최종 폐기 선언만 남은 셈”이라고 말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4월 2일 극초음속 미사일 ‘화성포-16나’형의 첫 시험발사를 현지 지도했다고 조선중앙TV가 3일 보도했다. 조선중앙TV 화면=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4월 2일 극초음속 미사일 ‘화성포-16나’형의 첫 시험발사를 현지 지도했다고 조선중앙TV가 3일 보도했다. 조선중앙TV 화면=연합뉴스

문제는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가 명시적인 국가 대 국가 간 관계로 전환돼도 정말 현재와 아무런 차이가 없느냐는 점이다. 당장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면 남북관계는 커다란 모순에 직면한다. 민족관계라는 특수성은 그동안 국가 간 관계에선 볼 수 없는 독특한 상황을 용인하고 있다. 한국사회가 북한과의 관계에서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것들이 실상 굉장히 특수한 경우였다는 의미다.

대표적인 것이 영토의 정의다. 헌법 제3조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조항은 남북을 국가 간 관계로 치환할 때 그 즉시 분쟁 소지를 갖는다. 국경선의 확정 부분도 유사하다. 1953년 정전협정에서 육상경계선은 설정됐지만 해양경계선이 분명히 설정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해양 북방한계선(NLL)과 관련한 부분은 계속 논란을 만들어 왔다. 명시적 합의가 없었음에도 NLL이 용인됐던 것 역시 민족적 특수관계에 기반한다. 국가 간 관계로 전환 시 분명히 확정해야 할 사항이다. 결국 ‘남과 북이 사실상 별개’인 것과 ‘남과 북이 명시적 별개’인 것은 같은 의미일 수 없다는 것이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북한이 기존 헌법에는 없던 영토 조항을 헌법에 새로 삽입하겠다는 뜻을 밝혔는데 이는 대한민국 영토에 대한 권리 주장이라기보다 실효적 지배지역에 대한 주권을 명확히 하는 것이 될 가능성이 크다”라며 “헌법에 영토 조항을 명시하지 않는 국가도 많은데 (북한이) 굳이 이러한 조항을 삽입하는 것은 남북을 국가 대 국가 관계로 명확히 하겠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한이 새 헌법에 영토 조항을 어떻게 삽입하느냐에 따라 한반도가 국제법적 영토분쟁지역이 될 가능성이 있다”라고 덧붙였다.

한반도 내 두 국가 체제로의 전환은 무력 충돌 가능성 측면에서도 종전과 다른 상황을 만든다. 북한이 추진하는 ‘통일 조항 삭제’ 작업을 꼼꼼히 살펴보면 특징이 있다. 일관되게 평화통일 원칙만 삭제하고 있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북한이 말해 온 대남 적화통일 노선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평화통일, 또 다른 하나는 전쟁에 의한 통일이다”라며 “이중 김정은이 포기하겠다고 하는 것은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전제로 한 평화통일이지 유사시 전쟁을 통한 통일까지 포기하겠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많은 이들이 혼동하는 것이 지금 북한이 말하는 두 국가론이 평화적인 질서하의 두 국가를 의미하는 줄 아는데 전쟁관계의 두 국가다”라고 덧붙였다. 통일부 당국자 역시 “김 위원장의 언급을 볼 때 헌법 개정은 통일 조항 삭제, 적대국 관계, 영토조항 추가 등이 반영될 것으로 보이며 ‘무력통일 조항’이 추가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무력충돌 가능성은 오히려 증가할 수 있다. 이는 한국을 겨냥한 핵무기의 실질적 사용과도 관계된다.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는 것은 맞나

남북을 막론하고 통일에 관한 논의는 ‘외세 간섭 없는 평화통일’에 맞춰져 왔다. 크고 작은 분쟁 속에서도 남북 정권 어디도 이를 부정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다. 문제는 북한이 핵무기를 실전화한 상황에서는 이러한 통일정책이 외교적·군사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제로 북한이 배치한 무기들은 한반도 내의 억제력을 담보한다. 즉 유사시 북한을 타격할 수 있는 미군을 포함한 각종 전략 자산을 핵무기로 억제한다는 의미다. 문제는 같은 민족에게 핵을 겨누는 행위가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평화통일의 유훈을 어기는 것이 된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북한은 민족 개념 탈피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는 해석이다. 홍 위원은 “북한이 한반도 문제에 관한 억제력을 갖기 위해서는 미국에 유사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신호를 줄 수 있어야 한다”라며 “북한으로선 한민족이라는 개념을 탈피하는 것이 한국을 공격할 수 있다는 가장 확실한 신호”라고 말했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 역시 “민족적 특수관계를 탈피한 상태의 북한은 한국을 겨냥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한 셈”이라며 “전쟁 초반에 선제적으로 핵무기를 사용해 주도권을 잡겠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했는데 이를 달성하기 위해선 동족·민족 개념부터 없앨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월 1일 서울 중구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제105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월 1일 서울 중구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제105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이는 다음 단계인 외교 협상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미 미국 정치권을 중심으로 북핵 문제의 현실적 접근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는 ‘비핵화’가 아닌 ‘핵 군축’이 핵심이다. 조 위원은 “바이든이든 트럼프든 미국은 북한과 핵 문제와 관련한 협상을 할 생각이 있다고 봐야 한다”라며 “이미 유럽, 중동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미국에 북핵은 반드시 관리해야 할 현실”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런 기조가 한국 정부의 ‘비핵화’ 원칙과 전면 배치된다는 점이다. 홍 위원은 “북한으로서는 핵보유국 승인과 군축협상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에서 비핵화를 주장하는 한국이 걸림돌일 수밖에 없다”며 “결국 통일을 포기하고 적대 국가 관계로 전환해 한국을 당사국에서 배제해 버리는 선택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양 교수는 “이대로 가면 한반도 문제에 있어 한국이 패싱(무시)되고, 미국과 북한의 협상 결과에 우리 운명을 맡기는 상황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남북관계의 전환은 북한의 외교적 무대를 넓힌다기보다 한국의 개입 가능성을 줄이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의미다.

‘그렇게 보이는 것’과 ‘그런 것’은 유사해 보이지만 큰 차이가 있다. 한반도 내 두 국가 체제의 확립은 기존 남북관계와 유사해 보이지만 분명 다른 차원의 문제다. 전문가들 역시 현재 상황에 대해서만큼은 “남북관계가 지금까지는 없던, 처음 보는 상황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 맞다”고 입을 모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3월 1일 ‘3·1절 기념사’에서 “우리의 통일 노력이 북한 주민들에게 희망이 되고 등불이 돼야 한다”며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역사적·헌법적 책무를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헌법 제4조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는 조항을 재확인한 것에 가깝다. 문제는 통일이 한쪽의 말만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북한이 남북관계를 국가 대 국가 간 관계로 빠르게 전환하고 있지만, 한국 정부에 이를 막을 전략과 의지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조 위원은 “북한의 통일 포기는 주민이 아닌 정권의 포기에 가깝다”며 “차라리 정부에서 평화통일 공세를 강하게 추진해 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양 교수 역시 “북한이 헌법에 적대적 두 국가를 명시하기 전에 대화와 교류협력을 재기해볼 필요가 있다”며 “과거 사례를 보면 남북이 대결할 때는 북한이 주도권을 잡고, 대화할 땐 한국이 주도권을 잡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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