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다시, 7·4 공동성명의 정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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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78)의 올해는 특별하다. 경기도교육감 3선 출마를 접고 야인으로 돌아왔다. 1972년 성공회 사제로 서품돼 공직을 맡은 이후 꼭 50년이 되는 해다. 1970년대 이후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며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종교계를 대표하는 진보 정치인으로 동분서주의 나날을 보냈다.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은 “미국과 일본에게 우리 외교안보의 주도권을 내줘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 주미영 작가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은 “미국과 일본에게 우리 외교안보의 주도권을 내줘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 주미영 작가

공직 생활 내내 에너지가 넘치고, 열정적인 성품에 조직을 꾸리고 관리하는 능력도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국민의정부 시절 16대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해 정계에 입문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신뢰가 두터웠다. 청와대 민정수석을 맡아달라고 했지만 고사했다. 참여정부 때는 대통령직속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 부의장과 통일부 장관을 잇달아 지냈다. 노무현 대통령의 통일정책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당사자다.

2007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노무현·김정일 두 정상의 회담 전 과정을 준비하고 조율했다. 남북정상회담을 총괄했다는 것은 공인으로서 분명 커다란 행운이었다. 역사의 참여자로서, 또 관찰자로서 한반도 위기의 본질과 평화로 가는 길의 어려움을 두루 통찰하는 기회를 얻었다. 2014년부터 8년간 민선 3기와 4기 경기도교육감을 지내고, 올해 드디어 진정한 의미의 안식 휴가를 얻게 됐다. 2차례 인터뷰를 통해 긴박하게 돌아가는 북핵 위기의 본질, 초고도로 경직된 남북관계를 타개할 그의 해법을 들어봤다.

한반도 긴장… 민간 참여로 위기관리 필요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갑니다. 최근 한·미·일의 합동군사훈련이 (동해) 독도 근해에서 이뤄지면서 남북의 군사적 긴장과 대결 상황은 더욱 고조되고 있습니다. 일본의 자위대가 일본의 방위만을 위한 군대가 아니라는 점을 과시라도 하는 것 같은 상황인데요. 한반도 정세에 직접 영향을 주는 해상훈련을 동해에서 실시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한국사회는 물론이고 북한이나 중국에도 상당한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한·미·일 연합훈련에 자극받은 북한이 핵무력 강화의 길을 더욱 치열하게 걷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조만간 7차 핵실험 강행이 예정돼 있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제재와 압박, 군사적 위협과 이에 따르는 군비 확장은 결코 한반도 평화의 길이 아닙니다. 평화의 방안을 새로운 문법으로 써야 합니다. 아주 엄중한 시점에 우리는 처해 있습니다.”

이 전 장관은 북한이 전술핵 운용을 현실화하고 있다는 점을 특히 우려했다. 지난 9월 28일 전술핵탄두를 모의 탑재한 2발의 단거리 탄도미사일(SRBM) 발사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7차례에 걸친 대규모 미사일 발사 훈련을 하고 있다. 10월 8일 사상 처음으로 150여대의 각종 전투기를 동시에 출격시킨 항공 훈련도 충격적이었다. 그는 민간 차원의 노력을 하나의 물꼬로 제시했다. 과연 북한이 그런 제안에 관심을 기울일 것인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아마도 여러 전제가 충족돼야 가능할 터인데, 그 전망이 아직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민간 베이스의 참여와 노력을 여러 번 강조했다. 위기관리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에서의 전면 충돌은 취약한 대북 억제력보다는 위기관리의 실패로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그는 보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관계는 2019년 하노이회담의 결렬 이후 계속 증폭됐죠. 코로나19 상황에서도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는 완화되지 않았습니다. 인도적 지원까지도 길이 막혀버렸어요. 정부 차원의 남북교류 통로가 막혔을 때는 민간이 역할을 맡아 소통의 맥을 이어갈 수 없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과감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남북교류협력기금도 민간을 통해 사용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농업과 문화 예술, 학술 분야 등에서 민간이 참여하는 루트와 접촉면을 새로 개척하고 활용해야 합니다. 비군사적 분야에서 대화의 길을 찾아봐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게 하려면 남북관계의 기본 환경에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요. 우선 극단적인 적대 관계의 해소가 필요합니다. 해묵은 숙제이지만 한미 합동군사훈련과 국가보안법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한미 군사훈련을 중지하거나 유보하는 것, 국가보안법을 전향적으로 폐지하는 것 등은 상징성이 매우 커서 북한의 태도 변화에 상당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조치로 판단합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0월 10일 김정은 총비서의 지도 하에 전술핵운용부대의 군사훈련을 실시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나라의 전쟁억제력과 핵반격능력을 검증 판정하며 적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보내기 위한 조선인민군 전술핵운용부대의 군사훈련이 9월 25일부터 10월 9일까지 진행되었다”라고 전했다. / 경향자료·뉴스1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0월 10일 김정은 총비서의 지도 하에 전술핵운용부대의 군사훈련을 실시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나라의 전쟁억제력과 핵반격능력을 검증 판정하며 적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보내기 위한 조선인민군 전술핵운용부대의 군사훈련이 9월 25일부터 10월 9일까지 진행되었다”라고 전했다. / 경향자료·뉴스1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우리는 방어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북한은 매우 공격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받아들인다. 미국이 여전히 전제하고 있는 선제공격 가능성, 유사시 북한 수뇌부를 제거하는 이른바 ‘참수작전’ 개념이 한미 합동훈련에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미·일 합동군사훈련은 매우 부적절합니다. 일본과의 군사적 동맹은 북한을 불필요하게 자극합니다. 한반도의 긴장 국면을 평화롭게 관리하고 통제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미국이나 일본에 한반도와 동북아 안보의 주도권을 양도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도 있는데,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사태입니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 시점에 덜컥 수를 두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자주·평화·민족적 대단결 ‘위대한 3원칙’

대학에서 독일문학을 전공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독일 분단과 통일의 과정, 그 이전 2차례 세계대전의 중심에 섰던 나라 독일에 주목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독일어 작가 프란츠 카프카(체코 태생이지만 독일어로 썼다)의 작품이 자신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그는 고백했다. 오직 ‘쓸모’만을 강조하는 자본주의식 인간관과 광범위한 인간 소외의 현실에 카프카는 절망했는데, 자신도 그의 절망에 깊이 공감했다는 것이다.

대학 시절 히틀러의 나치즘과 ‘홀로코스트’라는 전대미문의 전쟁 범죄를 깊이 들여다보기도 했다. 4·19 이후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울지역 30개 고등학교 학생들이 ‘향진회’라는 역사와 사회연구 클럽을 만들었는데, 그 모임에 참여해 열띤 토론을 했던 기억도 토로했다. 당시에는 고등학생도 민족문제, 국가와 사회의 현실에 대해 관심이 깊었다는 회고다. 향진회는 전국적 조직으로 확장할 계획이었는데, 5·16으로 그 열기가 된서리를 맞았다. 1970년대 그가 유신을 반대하는 운동에 투신하면서 알게 된 것이 남북 평화공존의 가치다. 남북이 무력으로 대치하는 한 민주화 운동은 제대로 진전되기 어렵다는 깨달음이다. 민주화 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 통일부 장관을 맡아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기까지, 전쟁을 막고 평화를 구축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은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됐다.

이재정 전 장관은 “한반도에서의 전면 충돌은 취약한 대북 억제력보다 위기관리의 실패로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 주미영 작가

이재정 전 장관은 “한반도에서의 전면 충돌은 취약한 대북 억제력보다 위기관리의 실패로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 주미영 작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높이 평가합니다. 당시 성명에서 밝힌 통일의 원칙은 지금 읽어봐도 통일의 대장전입니다. 통일은 자주·평화·민족적 대단결의 토대 위에서 도모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외세에 의존하거나 간섭을 받지 말자는 것이고, 상호 무력을 행사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사상과 이념, 제도적 차이를 초월하자는 호방하고도 과감한 선언이었습니다. 이 선언으로 남북조절위원회가 구성돼 분단 26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대화의 통로가 마련됐습니다. 7·4 공동성명의 3대 원칙은 이후 남북한 모든 접촉과 대화의 기본지침이 됐고요. 1990년 9월 시작한 남북 고위급회담도 이 원칙에 따라 이뤄졌고, 1991년 합의한 남북기본합의서 전문에도 3대 원칙이 언급됐습니다. 10월 유신 단행을 위한 정치적 계략이었다는 평가도 있지만, (7·4 공동)성명이 담고 있는 방향과 가치는 보수와 진보를 떠나 지금도 결코 버릴 수 없는 위대한 원칙입니다.”

그는 1994년 8월로 예정됐던 김영삼·김일성 정상회담의 무산에도 큰 아쉬움을 토로했다. 당시 한반도 정세와 분위기에는 훈풍이 불었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발표와 한반도 비핵화 선언 등으로 팀스피릿 훈련을 중단했다. 1994년 북미 간에 이뤄진 제네바 합의도 호재였다. 핵무기 개발 동결과 북미 평화협정 체결 후 수교를 골자로 북에 1000MWe급 경수로 2기를 제공한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2003년까지 완공한다는 사업계획이 확정돼 한반도는 일순 평화 무드에 휩싸였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그해 10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평양방문, 2002년 고이즈미·김정일 간의 ‘평양 북일 선언’ 등 새로운 역사의 진전이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와 동시에 북한이 고농축우라늄 개발을 하고 있다는 미국 측의 주장이 나왔습니다. 경수로 사업이 2002년 완전 중단되면서 한반도 문제는 다시 불안과 공포의 상황으로 변화됐습니다. 2005년 6자회담으로 비핵화의 새로운 방안을 합의한 9·19 선언을 채택했지만, 놀랍게도 바로 이튿날 미국의 엄청난 대북제재가 시작됐습니다. 북한 핵개발 저지의 명목으로 미국이 북한 돈줄 죄기에 나선 것입니다. 방코델타아시아(마카오에 있는 중국계 은행)의 북한 관련 계좌 동결 조치로 이후 6자 회담은 장기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 9·19 선언이야말로 북핵 문제 해결의 분수령이자 기회였는데, 그 계기를 상실했습니다. 큰 손실이었습니다.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 평화협정의 길이 열리기 직전이었는데 말이죠. 방코델타아시아에서의 북한 돈세탁 혐의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져 더 큰 아쉬움이 남습니다.”

윤 대통령 ‘담대한 제안’ 안 먹히는 까닭

분단이 고착된 지 내년이면 70년이다. 이 전 장관은 “분단은 공존과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형벌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분단체제가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고, 사회를 대립과 증오의 구도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지난 2007년 7월 4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린 환송오찬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재정 당시 통일부 장관과 건배하고 있다. / 경향자료·청와대사진기자단

지난 2007년 7월 4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린 환송오찬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재정 당시 통일부 장관과 건배하고 있다. / 경향자료·청와대사진기자단

“분단은 정치적 반대세력을 몰아세우는 도구로 이용됐고요. 수구세력은 전쟁을 부추기고 상대를 제압하려는 힘의 논리로 분단체제를 활용했습니다. 선거 때마다 분단에 따른 이념논쟁으로 사회를 분열시키고, 그 갈등과 대결 구도로 정치적 이득을 챙겼습니다. 이제 그런 시대는 막을 내려야 합니다.”

그는 “북한 체제는 가만히 놔둬도 무너지고 말 것”이란 미국 네오콘의 전통적 논리와 정세관을 경계했다. 경수로 사업의 좌절, 9·19선언의 무효화는 미국 네오콘 세력의 힘이 작용한 결과였다고 파악한다. 이 전 장관이 보기에 북한은 그렇게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체제가 아니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를 극복하며 끈질긴 생존력을 이미 입증했다고 그는 분석했다.

“미국이 반러, 반중 노선을 걸으면서 형성된 신냉전 체제하에서 북한의 체질은 더 강화됐습니다. 인도적 지원까지 막아버린 제재와 압박, 북에 대한 불신과 혐오는 핵능력 강화로 귀결됐습니다. 북한은 ‘핵무력 사용 법제화’까지 선포했습니다. 자위적 핵보유국의 지위를 넘어서겠다는 선언입니다. ‘선제공격’이 가능한 핵무력 법령을 채택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내놓은 ‘담대한 제안’을 북한은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새로운 제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반도는 지금 불안하고 미래가 불투명합니다. 특히 한·미·일 군사동맹의 방향이 그렇습니다. 한·미·일 군사동맹의 길은 한반도 평화를 만들 수 없습니다. 위기관리마저 어렵게 합니다.”

현 단계에서는 신뢰의 복원보다 위기관리가 급선무인지 모른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겪고 난 후 당시 맥나마라 미 국방장관이 했던 말이 현재 한반도의 상황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맥나마라는 “오늘날 군사전략이란 것은 더 이상 없다. 있다면 오직 위기관리가 있을 뿐”이라고 했다. 핵미사일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오늘, 그의 말이 귀에 쏙 들어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 전술핵의 한국 배치, 심지어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론이 여권발로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위기관리의 마인드가 전혀 보이지 않으며, 미국의 핵 정책에 대한 완벽한 무지가 드러난다. 이 전 장관은 ‘보수층의 결집을 노리는 혹세무민’이라고 단언했다.

“미국은 한국에 전술핵 배치를 용인할 수 없습니다. 한국에 핵무기가 반입되면 일본과 대만도 핵을 가지려 하겠지요. 핵 도미노는 미국의 세계 전략과 배치됩니다. 한·미·일이 군사동맹을 향해 나아가면, 북·중·러가 뭉쳐 대응하게 될 것입니다. 잘못하면 한반도가 세계대전의 전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남북관계는 우리 정부가 주도권을 쥐어야 합니다. 기시다 일본 총리가 바이든 대통령을 대신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미국과 일본에 우리 외교안보의 이니셔티브(주도권)를 내줘선 안 됩니다. 윤석열 정부의 독자적인 한반도 구상이 있어야 합니다.”

※이번 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한기홍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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