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부ㆍ평통 등과 역할 중복 논란 속 야당ㆍ국민의견 배제한 채 일사천리…
보수진영만의 반쪽 기구로 ‘실효성 없는 준비작업’ 예고
대통령 직속 통일준비위원회(통준위) 출범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통준위는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위원장을 맡을 예정이어서 통일과 관련한 핵심적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하지만 통준위가 통일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평통) 등 통일 관련 부처와 기능과 역할이 중복되면서 ‘옥상옥 기구’가 아니냐는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정부와 국회 등에 따르면 청와대는 외교안보수석실과 통일비서관실 주도로 통준위의 사무처 설립 등 조직 구성과 부위원장 등 위원 인선작업을 해 왔다. 통일부는 태스크포스(TF)팀을 만들어 청와대를 지원해 왔다. 최근 통준위 위원 인선작업이 마무리됐으며, 통준위 출범은 박 대통령의 최종 재가만 남은 것으로 알려졌다.
‘통일준비위원회 설치 및 운영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통준위는 한반도 평화통일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 확산, 통일 추진의 구체적 방향 제시, 민·관 협력을 통해 한반도 통일을 체계적으로 준비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같은 통준위의 역할은 기존 통일 관련 부처나 기관들이 하는 일과 비교했을 때 전혀 새로운 게 없다. 통일부, 평통 및 대통령 자문기관인 통일고문회의와 기능과 역할이 겹친다.
통일부는 통일 및 남북대화, 교류·협력, 인도적 지원에 관한 정책의 수립과 북한 정세 분석, 통일 교육·홍보 그 밖에 통일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고 있다. 통일부의 올해 예산은 3374억원이다. 통준위가 통일 관련 사안을 주도해 나갈 경우 통일 주무부처인 통일부는 그 위상이 흔들릴 게 뻔하다.
수십억에서 수백억 예산낭비 불 보듯
헌법상 대통령 자문기구인 평통은 통일에 관한 국내외 여론수렴과 국민적 합의 도출, 통일에 관한 범민족적 의지와 역량 결집 등의 역할을 하고 있다. 평통자문위원은 국내외에 2만여명이 있으며, 이들의 회의 참석비 지급 등 1년 예산으로 238억원을 쓴다.
뿐만 아니라 정부 내 다른 부처와 공기업, 국책연구기관에서도 비슷한 업무를 하고 있는 곳이 많다. 법무부에는 통일시대를 대비하기 위한 법무부 통일법제과가 있으며, 외교부 산하의 국립외교원에도 안보통일연구부가 있다. 또한 국무총리실 산하 통일연구원은 통일 및 북한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등 통일부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고 있다. 이밖에 LH(한국토지주택공사), 광물자원공사 등 공기업들도 남북협력사업을 담당하는 조직을 갖추고 있다.
통일부와 평통 등이 있는데도 굳이 통준위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다.
통준위가 예산 낭비만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통준위를 운영하는 데 수십억원에서 수백억원까지 ‘국민 혈세’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박주선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은 “박근혜 정부는 돈이 없어서 ‘65세 이상 모든 어르신들께 20만원씩 지급하겠다’는 복지공약마저 파기했다”며 “통일부와 평통이 있는데도 수십억에서 수백억원을 들여 통준위를 만드는 것은 전형적인 예산 낭비”라고 말했다.
통준위는 박근혜 정부와 일부 보수진영만을 위한 ‘절름발이 기구’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정부는 통준위가 국민적 통일 논의를 수렴하고, 통일 한반도의 청사진을 만들어갈 것이라고 밝혀 왔다. 통준위가 명실공히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범정부기구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통준위 설립과정에서 새정치민주연합 등 야당과 전혀 소통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의견수렴은 도외시하고 속도전으로 일관했다.
통일부는 지난 3월 14일 ‘통일준비위원회 설치 및 운영에 관한 규정’을 입법예고했다. 통일부는 ‘이 제정안에 대해 의견이 있는 기관, 단체 또는 개인은 3월 17일까지 의견서를 제출하라’고 홈페이지에 공고했다. 통준위 관련 의견수렴을 단 4일만 한 것이다. 그나마 4일 중에 평일은 14일(금)과 17일(월) 이틀에 불과했다. 당연히 이 기간에 들어온 국민들의 통준위에 대한 찬·반 의견은 한 건도 없었다. 보통 법 제정과 개정을 위한 입법예고 기간은 충분한 의견수렴을 하기 위해 40일 정도를 준다. 이에 대해 통일부 관계자는 “보통 입법예고는 찬반 양측의 대립되는 의견이 있을 때 하는 것인데, 통준위 설립의 경우는 그럴 것이 없다고 판단해서 짧게 했다”고 해명했다.
박 대통령 ‘대박론’ 내세워 진두지휘
통준위 설립과정에 야당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고 청와대에 요구했지만 그 역시 철저히 무시됐다. 박 대통령이 통준위 설립계획을 발표하자 당시 민주당은 “통준위가 또 하나의 관제기구가 아닌 그야말로 국민통합적 기구가 돼야 한다”며 여·야·정 실무준비팀 구성을 제안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이에 대해 지금까지 야당과 단 한 번도 상의하지 않았다.
정부 관계자들은 통준위는 기존의 통일 관련 기구와 달리 통일에 대비해 각 부처와 전문가가 참여해 구체적인 준비작업을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난 대선 때 박근혜 후보 캠프에 참여했던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지난 2월 한국국제정치학회 학술회의 만찬사에서 “단순히 통일 담론 논의 단계를 넘어 방법론으로, 구체적인 액션 플랜으로 구체화해 나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통준위가 특정 시점에 통일이 될 것을 염두에 두고 화폐통합 같은 준비작업을 한다 해도 실효성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통일 준비작업을 남한에서만 일방적으로 하면 아무런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통일 이후에 남북한이 공통으로 따를 제도나 액션 플랜은 남북한 당사자들이 시간을 두고 논의해 합의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게 상식이다. 전문가들은 이 부분에서 박근혜 정부가 통일을 과정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결과로만 이해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는 “통일 시점을 미리 정해놓고 하는 남한만의 통일 준비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라며 “만약 북한에 급변사태가 발생한다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통일과는 더욱 거리가 멀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북한 급변사태에 따른 남한 정부의 대응계획은 역대 정부 때마다 만들어 왔다. 때문에 이와 관련된 각 분야에서의 축적된 자료도 꽤 많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통일 이후에 남북한이 모두 따를 수 있는 액션 플랜은 아니다.
통일의 파트너인 북한도 박근혜 정부의 통일 구상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북한은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독일 방문을 통해 내놓은 ‘드레스덴 통일 구상’에 대해 “흡수통일로 이뤄진 독일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는 것 자체가 불쾌하다”며 거부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조만간 통준위를 진두지휘할 예정이다. ‘통일대박론’에 이어 통준위를 통해 강력한 ‘통일 드라이브’를 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역대 정권에서 만든 수많은 위원회들이 정권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사라졌듯이 통준위도 그런 운명에 처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다.
한 북한 전문가는 “통준위는 정말로 필요 없는 조직이다. 오히려 한쪽 진영의 목소리만 대변하는 국론분열기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