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는 죽 쒀도 CEO는 돈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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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P 여성회장 칼리 피오리나 경영 문책... 퇴직금 등 5년간 보수 2천억원 챙겨

"한편으로는 나와 이사회가 HP 전략을 어떻게 이끌어갈지에 관해 이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만, 나는 그들의 결정을 존중하겠다." 지난 2월 9일 이런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고 '권좌'에서 쫓겨난 칼리 피오리나(50) 휴렛팩커드(HP) 전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가 뉴스메이커가 되고 있다.

한때 '세계 비즈니스업계의 여제(女帝)'로 불리던 피오리나의 실패가 세간의 관심을 끌기도 하거니와 아무리 뛰어난 경영자라도 실적을 내지 못하면 옷을 벗을 수밖에 없는 미국식 시장논리의 냉엄한 현실을 보여주는 까닭이다.   

미 경제전문지 '포춘' 최신호는 'HP로부터 칼리 피오리나 축출, 왜 그녀의 거대한 도박은 실패했는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자신들이 1998년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기업인 1위로 손꼽았던 피오리나의 실패원인을 되짚었다.

'여제(女帝)' 칼리 피오리나 '포춘'은 7년 전 미국 최고의 여성기업인 50인을 소개하는 첫 기사에서 "여러분은 1위 여성 기업인에 대해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당황할지 모르겠다"며 기사 리드를 시작했다. 사실 그때까지 피오리나는 말 그대로 무명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1954년 9월 6일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태어난 피오리나는 스탠퍼드대학에서 중세사 등을 전공한 후 메릴랜드대에서 경영학석사(MBA), MIT에서 공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26살이던 1980년 AT&T에 입사해 16년간 근무했고 97년 루슨트테크놀로지스가 AT&T에서 분사될 때 루슨트테크놀로지스로 옮겨 글로벌서비스사업부문 사장 자리에 오른 것이 이력의 전부였다.

하지만 피오리나는 포춘 기사가 나온 뒤 1년이 채 못돼 세계 2위 컴퓨터 기업인 HP의 최고경영자로 영입됐다. 침체된 조직문화에 활기를 불어넣어 줄 인물을 찾던 HP가 1990년대 말 정보기술(IT) 붐과 함께 일시에 루슨트테크놀로지스를 세계적인 통신회사로 끌어올린 젊은 '야전사령관'에 주목한 결과였다. 그녀의 등장은 여성이라는 점도 한몫 했지만 HP 외부인사로서는 처음으로 최고경영자로 스카우트 됐다는 점, 컴퓨터 업계에서 일해본 경험도 없다는 점 등이 맞물려 월가에 충격을 안겼다.

낙마(落馬) 원인은 피오리나는 특유의 결단력, 뛰어난 의사소통 능력, 차가운 분석력을 무기로 세계 비즈니스 역사상 어느 여성도 등정하지 못했던 정점에서 무려 5년 반을 머무는데 성공했다. 재임하는 동안 83개에 이르던 HP의 사업부문을 단 몇개로 줄이는 구조조정에 성공하는 등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2002년 컴팩컴퓨터 인수합병이 실패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그녀는 PC사업을 강화해 경쟁업체인 델 컴퓨터를 따돌리려 했고 이를 위해 이사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190억달러를 쏟아부으며 인수를 성사시켰다. 컴팩 인수를 통해 매출은 어느 정도 끌어올리는데 성공했지만 문제는 수익성이었디. 인수를 통한 수익 기여율은 전체 수익의 단 1%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인수합병 실패는 HP 주가하락으로 이어졌다. 컴팩 인수 후 주식시장 침체와 함께 하락곡선을 긋던 주가는 단 3년 만에 반토막이 났다. 지난 2월 9일 뉴욕 증시에서 HP 주가가 6.9% 급등하며 피오리나의 퇴장을 반겼다는 소식은 주식시장이 피오리나와 그녀의 컴팩 인수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말해 준다.

여기에 피오리나는 개인적으로 컴팩 인수를 반대했던 이사회 임원 월터 휴렛과는 법정공방까지 벌여야 했는데 월터 휴렛은 HP의 공동창업자 윌리엄 휴렛의 아들이다.

암초는 또 있었다. '뉴욕타임스'는 기존 HP 조직문화에 피오리나 스타일이 융합되지 못했던 것도 또다른 요인이었다고 지적했다. HP는 설립 당시부터 경영진과 종업원 간에 격의없는 대화가 강점이었다. 창립동지인 휴렛과 팩커드는 반팔차림에 사내를 어슬렁거리며 직원들과 식사하고 대화하기를 즐겼다. 반면 외부에서 영입된 CEO인 피오리나는 딱딱한 회의와 사업계획 발표를 중요시했다. 또 직원들이 그녀를 면담하려면 수주 전부터 날짜와 시간을 잡아야 할 정도로 '먼 곳'에 군림했다. 

하버드대 비즈니스스쿨 교수인 윌리엄 조지는 "피오리나는 HP 문화에 적응하지 못한 변방인이었다"고 평가했다.

HP와 피오리나의 진로는 '로버슨-스티븐 투자은행'의 샌포드 로버슨 공동대표는 HP의 실패는 CEO가 아니라 전략의 실패라고 규정했다. 그는 "HP가 PC사업부에서 선두인 델을 따라잡을 수는 없을 것"이라며 "경쟁이 치열하고 마진도 낮은 PC사업부를 팔고 기본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했다. 월가 일각에서는 HP의 분사를 기정사실화하면서 분사 이상의 구조조정을 요구하는 실정이다.

반면 고든 유뱅스 오빌릭스 CEO는 "회사를 팔아치우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옳은 접근법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1990년 초반 컴퓨터부문을 해산했던 IBM의 전례가 이를 증명한다는 주장이다. TVG어드바이저 제프리 무어 이사도 PC사업부를 매각하거나 분사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거든다. 그는 "HP는 델과 IBM 양쪽과 싸울 무기를 가지고 있다"며 "둘 중 하나를 죽이는 것은 바보짓"이라고 역설했다.

결국 HP의 항로는 향후 피오리나를 대신해 차기 CEO에 누가 앉느냐에 따라 결정될 전망이다.

한편 'USA투데이'는 피오리나가 경제계를 따나 정계에 입문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이미 경제계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 더 이상 옮길 곳이 마땅찮은데다 그동안 쌓아온 막대한 부와 매력적인 외모, 스타기질, 만만찮은 정치적 성향이 이를 뒷받침한다는 분석이다. 신문은 만약 피오리나가 정치판에 뛰어들면 캘리포니아 주지사나 상원의원을 겨냥할 수 있으며 부시 행정부에서 경제각료로 활약할 가능성도 있다고 예상했다.

피오리나가 지난해 부시 대통령을 만나 미국 경제에 대해 토론한 전력이나 최근 스위스 다보스포럼에 참석한 사실 등이 이 시나리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HP에서 물러난 피오리나는 현재 시스콤 시스템즈의 임원직을 유지하며 남편 프랭크 피오리나, 그리고 의붓딸들과 뉴저지에 머물고 있다. 이번 퇴임으로 피오리나는 경영자의 이력에는 오점을 남겼지만 금전적으로는 오히려 엄청난 금액을 챙겨 호사가들의 입길에 오르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은 최근 HP가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자료를 근거로 피오리나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퇴임한 '덕분'에 연봉의 2.5배에 달하는 2100만달러의 퇴직수당을 받게 됐다고 전했다. 통신은 대규모 퇴직금 뿐 아니라 막대한 HP 자사주, 스톡옵션 등으로 피오리나가 지난 5년 반 동안 거둬들인 보수는 무려 1억8800만 달러(약 2000억원)에 달한다고 덧붙였다.

국제부/이상연 기자 lsy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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