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은 겉으로는 다양성이 존중되는 것처럼 보이는 대학에도 불평등과 모순이 만연하다는 데 분노하고 있다. 흑인 정교수의 비율이 전체의 4%에 불과하고, 명문대일수록 흑인 학생의 비율이 낮다.
1960년대 민권운동과 베트남전 반대 시위로 뜨거웠던 미국 대학들이 최근 다시 달아오르고 있다. 이번에는 인종차별 문제다. 각 대학 캠퍼스에서는 학내 소수자, 특히 흑인 학생이나 교수들에 대한 차별을 개선할 것을 요구하는 시위가 연일 벌어지고 있다. 시위는 아이비리그부터 공립대학까지 미 전역에 걸쳐 확산되고 있다. 미국 중서부의 미주리대에서는 인종주의 문제로 총장이 퇴진하는 초유의 사태도 빚어졌다.
이뿐 아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차별을 자행한 대학의 어두운 유산을 지적하거나, 학교의 발전을 이끈 상징적 인물의 문제적 행동을 지적하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구호와 함께 일부 대학에서는 충격적인 인종혐오 발언이나 범죄도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지난해 8월 미주리주 퍼거슨에서 흑인 청년 마이클 브라운이 백인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진 사건 이후 다시 불거진 인종 갈등이 이제 캠퍼스 안으로 깊숙이 파고든양상을 보이고 있다.

미국 미주리대에서 11월 9일(현지시간) 인종차별 논란에 휩싸인 팀 울프 총장이 사퇴한 뒤 학생 대표 조너선 버틀러(가운데)가 연설을 하고 있다. 버틀러는 총장 면담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여 왔다.
미주리대, 총장 퇴진하는 초유의 사태
미주리대 총장이던 팀 울프는 지난 11월 9일 오전 이사회에서 사임을 발표했다. 두 달가량 지속된 학생들의 반대시위에 결국 백기를 든 것이다.
미주리대에서는 새 학년이 시작된 지난 9월부터 인종문제가 쟁점이 됐다. 흑인인 총학생회장이 백인 남학생으로부터 흑인 비하 발언을 들었다고 밝힌 것이 발단이었다. 이후 유사한 인종 비하 발언을 경험했다는 증언이 터져나왔고, 급기야는 기숙사 화장실 벽에 인분으로 나치 문양이 그려진 것이 발견됐다. 분노한 흑인 학생들은 시위를 시작했다. 하지만 총장은 쏟아지는 면담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총장 책임론이 커졌다. 학생들과 교수들은 총장 퇴진 촉구 서명운동을 벌이며 수업 취소도 불사했다. 학생 측 운동 리더인 대학원생 조너선 버틀러는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미식축구팀 미주리 타이거스도 동참했다. 선수들은 총장이 물러나지 않으면 남은 경기 출전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궁지에 몰린 울프는 “모든 것은 내 책임”이라며 사퇴했다. 미식축구 경기 결장 시 발생하는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우려한 대학 이사회도 즉각적인 대응에 나섰다. 미주리대 사건은 인종주의에 관한 학생들의 문제제기를 소홀히 다뤄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겼다.
비슷한 시기 동부의 명문 예일대에서도 인종차별 논란이 거세게 일었다. 발단은 11월 초 한 학부 남학생 사교클럽이 연 파티에서 흑인 여성이 피부색을 이유로 쫓겨나면서였다. 연일 수백명의 학생들이 참여해 학내에서 경험한 차별과 모욕을 성토하는 시위를 벌였다.

미국 뉴저지주 프린스턴대 나소홀 안에서 ‘흑인정의연맹’ 소속 학생들이 앉은 채로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학생들은 프린스턴대 총장 사무실을 점거하고 인종차별 논란이 제기된 우드로 윌슨 전 대통령이자 전 총장의 이름을 학교 프로그램이나 건물에서 제외하라고 요구해 왔다.
에피소드에 그칠 수도 있을 법한 사건이었지만, 학생들은 이내 대학 전반의 폐쇄적 관행에 대한 문제제기에 나섰다. 예일대에서 소수자 연구 분야가 위축되고 있고, 흑인 정교수 비율이 최근 3년간 오히려 감소해 전체의 3.6%에 그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예일대 피터 살로비 총장은 “소수자들을 제대로 감싸안지 못한 점을 인정한다”고 밝혔다. 이어 지난 18일에는 인종·종족 등 소수자 연구센터를 건립하고, 관련 분야 교수를 확충하겠다고 발표했다. 또 유색인 학생들을 위한 예산을 증액하고, 자신을 포함한 모든 교직원들에게 차별 방지 훈련을 실시하기로 약속했다.
미 대학들의 인종차별 반대운동은 학생들이 학내 현실에 눈을 돌리면서 점점 힘을 받고 있다. 지난해 퍼거슨 사태 이후 확산된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라는 구호가 대학가에도 울려퍼지는 것이다. 실제로 미주리대 메인 캠퍼스가 위치한 컬럼비아는 퍼거슨에서 2시간 정도 떨어져 있다.
학생들은 겉으로는 다양성이 존중되는 것처럼 보이는 대학에도 불평등과 모순이 만연하다는 데 분노하고 있다. 미국 대학의 흑인 정교수 비율이 전체의 4%에 불과하고, 명문대일수록 흑인 학생의 비율이 낮다. 대학을 졸업한 경우에도 흑인이 실업자가 될 확률이 다른 인종보다 두 배나 높다는 조사도 있다.
현실의 모순만이 아니라, 과거로부터의 인종차별의 잔재를 뿌리 뽑아야 한다는 움직임도 나오고 있다. 백인에 비해 인종적 대표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대학일수록 문제제기는 더 격렬하게 나타나고 있다.

하버드대 로스쿨 로고. 일부 학생들은 이 로고가 로스쿨 설립에 기여한 노예상 아이작 로열 가문의 문장을 따온 것이라며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노예제 등 역사적 유산도 도마에 올라
역사를 되짚는 시도는 대개 미국 사회 특유의 인종적 모순의 출발점이 된 노예제도와 연관돼 있다. 최근 하버드대 로스쿨에서는 노예상 가문의 문장을 딴 로고가 도마에 올랐다. 예일대에서도 유명한 노예상의 이름을 딴 칼훈 칼리지 등 학교 명칭을 개정하자는 요구가 계속돼 왔다. 이는 아이비리그 등 주요 대학들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노예무역을 통해 얻은 기부금이나 노예노동이 들어간 경우가 많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미셸 오바마 여사의 모교이기도 한 뉴저지주 프린스턴대의 흑인정의연맹 소속 학생들은 ‘우드로 윌슨’의 유산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20세기 초 이 대학 총장이자 제28대 미국 대통령을 지낸 윌슨의 인종차별 전력을 문제 삼은 것이다. 실제로 윌슨은 확신에 찬 백인우월주의자였고, 노예해방 후에도 흑인들에게 공정한 대학 교육이나 공직 참여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꺼렸다. 하지만 윌슨의 이름을 딴 기숙사와 공공정책 대학원까지 있는 프린스턴대에서 이 같은 면모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건물과 학교 명칭에서 윌슨의 이름을 빼야 한다는 학생들의 주장을 과격하게 보는 시선도 있지만, 학생들의 요구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는 견해도 많다. 하버드나 예일대보다 수십년 늦은 1940년대에야 흑인들에게 입학 허가를 내줬을 정도로 백인 중심 문화가 강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흑인 학생이 8%, 흑인 교수는 2%에 그칠 정도로 소수자에게는 벽이 높다.
캠퍼스 내의 인종차별 항의 물결은 소셜미디어 시대를 맞아 힘을 받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종혐오 발언도 소셜미디어를 타고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다. 일간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는 1980년대 이후부터 ‘새로운 인종주의’가 대학가를 점령했다는 우려가 제기됐지만, 소셜미디어의 발달로 확대재생산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고 지적했다.
집회나 시위, 캠페인 등 학생들이 주도하는 액티비즘은 문제를 알리는 데는 분명 효과적이다. 소수인종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을 두고 오히려 ‘역차별’이라는 주장이 나오는 상황에서 흑인 학생들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하지만 제도적 개선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근본적인 변화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대학 내 흑인 교수 채용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다. 전미흑인고등교육협회 케네스 몬테이로 회장은 “다양한 교실일수록 더 혁신적이다”라며 “윤리적으로 옳을 뿐 아니라 실제로 더 생산적이고 창의적이다”라고 말했다.
<경향신문 국제부 김유진 기자 yj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