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노래 하나씩 하자고 해서 신영복의 차례까지 오게 되는데 한사코 사양하다가 어쩔 수 없이 노래를 하게 된다. 감옥살이 20년간 만기 출소하는 사람을 위해 그가 부른 노래는 동요 ‘시냇물’이다.
나는 노래를 잘 못한다. 이것이 일차적인 문제다. 인생의 걱정거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못하는 것보다는 잘하는 게 낫지 않은가. 더 큰 문제는 잘 못하면서 자꾸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분위기는 잘 띄운다. 안 가본 지 10년도 더 넘었지만, 옛날의 회식이나 음주 풍습에 따라 2차로 노래방에 가자면 못 이기는 척하고 일어나고, 에라 모르겠다, 메들리로 몇 곡씩 불렀다. 그러다 보면 누군가 중간에 끊었다.
음악을 집중적으로 들으면서 산 지 어언 30여년이 넘는다. 그저 어디선가 들려오는 공기의 흔들림을 듣는 게 아니라, 집중적으로 찾아서 듣고, 모아서 듣고, 골라서 들은 지 30여년. 그러다보니 그동안 들은 음악들이 몸속에 배어 있어서 그 음악들이 스스로 새어나오는 수가 있다. 연구실에 혼자 있을 때, 황량한 벌판에 혼자 있을 때, 천천히 혼자 걸어갈 때, 그러니까 나 혼자 있을 때, 그렇게 한다.
오랫동안 들은 음악들, 그것이 지닌 정치·사회적 의미와 문화사적 가치를 나름 궁구하여 책을 쓰고 강의도 한다. 강의를 하다보면 어떤 음악가의 어떤 작품에 대해, 만약 그것이 존 콜트레인의 색소폰처럼 가사 없는 연주음악이라면 허밍으로 흥얼거리고, 만약 그것이 바흐의 미사곡이거나 슈베르트의 가곡이라면 주요 소절 몇 마디를 직접 부르면서 강의를 하는데, 가르치는 사람 체면 봐서 들어주는 시늉은 하지만 어서 빨리 음반을 틀어줬으면 하는 수강생들의 얼굴이 갑자기 떠오른다. “노래만 안 했어도 명강의라는 소릴 들을 텐데” 하며 걱정해주던 그 표정들 말이다.

성공회대학교 성미가엘성당에서 15일 열린 신영복 선생 1주기 추도식에서 참석자들이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 정윤수
음악학자 노동은, 음악평론가 강헌, 남미 역사와 음악의 최고수 이성형 등도 강의하면서 이따금 흥얼거리거나 직접 노래를 했는데, 장안 최고의 명강의임에도 노래실력이 꼭 그렇지는 않았던 듯싶다. 아, 이렇게 쓰고 나니, 그가 남긴 책 제목처럼 ‘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나는 고독한 여행자처럼 중남미의 피에 물든 역사와 바로 그 피가 만들어낸 위대한 노래들을 직접 불러주면서 강의했던 고 이성형 선생님이 갑자기 생각난다.
그래서 자제한다. 노래를 시켜도 안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꾹 참는다. 국가주의, 승리지상주의, 스포츠상업주의 등등의 이유이기도 하지만 2002 월드컵 때 이후로 그 흔한 ‘대~한민국’이라는 구호나 노래도 안 부른다. 어쩔 수 없이 1년에 한두 번? 집안 어른들의 회갑연? 다만 그뿐, 노래를 부르는 삶이 아니라는 걸 내가 잘 안다. 그랬는데, 지난주에 노래를 불렀다. 실은 다 부르지도 못하고 울먹거렸다. 그 얘기를 하고 싶다.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그밖의 여러 저서들과 더불어 일종의 ‘감옥 문학’, ‘유배 문학’의 높은 성취다. 대체로는 정치적인 이유로 감옥에 갇히거나 권력으로부터 멀리 추방당하여 쓴 책들, 그런 책들은 각별하다. 언젠가 그런 상황이 닥치겠지 하고 대비는 할 수 있어도 일부러 책 한 권을 쓰자고 감옥을 간다거나 유배를 자처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응당 해야만 하는 일을 확신에 차서 결행한 끝에 피치 못하여 감옥에 갇히고 추방을 당하게 되는데, 그 절박한 상황에 임하여 간신히 구한 최소한의 집필도구로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간 그 기록들은 그야말로 피의 기록, 최후의 기록, 몸으로 쓴 기록이라고 하겠다.
인류사의 고전들 중에 그런 상황의 위엄 있는 결실들이 숱하다. 법정의 최후 진술 및 그 이후의 수감 및 사형 상황에서 남겨진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포함한 기록들을 시작으로 하여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쓰여진 단테의 <신곡>, 밀턴의 <실락원>,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그람시의 <옥중수고> 등 이루 셀 수가 없으며, 우리의 경우에도 조선의 빛나는 고전들이 대개는 왕으로부터 배척을 받아 실각하고 낙향하여 썼거나 정약용의 강진 기록이나 정약전의 흑산 기록들처럼 철저히 추방되어 고립된 상황에서 이뤄진 성취들이 한둘이 아니다. 일제와 독재를 거치면서 우리의 현대사에 남겨진 고결한 기록들이 서대문형무소를 집필실로 삼은 것임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이상의 기록들이, 그러나, 감옥이나 유배지에서 멀리 떠나온 권력의 중심을 향하여 고언을 하고 질책을 하고 새로운 사상과 상상을 펼쳤다는 공통점이 있다면, 몇몇의 경우는 바로 그 감옥 안의 상황을 주목하고 그 안의 절박한 삶을 묘사하여 그 안의 속박된 삶에서 최후의 상황에 처한 인간의 밑바닥 모습을 그려내는가 하면, 바로 그것을 통해 감옥의 안이나 밖이나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양상이나 보편의 가치를 밝혀냈는데, 그 중 대표작으로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과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가장 높은 자리의 결실로 여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기록은 그가 황제 암살 및 혁명 기도 등의 정치범이 되어 유형을 살게 된 시베리아의 검은 체험이다. 감옥살이 5년 동안 인류의 구원자이자 기록자인 도스토예프스키는 정치적인 이유로 시베리아 유형을 살게 된 귀족이나 추문과 횡령으로 끌려온 관리들, 그리고 사사로운 일이 확대되어 결국 감옥살이를 하게 된 하층민 잡법들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수많은 인간들, 수많은 사건들, 수많은 피와 죽음들, 수많은 사연과 원망들이 얽혀 있다. 하루하루의 자잘한 이야기를 통해 온갖 인간들이 짐승우리 같은 데서 벌이는 처절하면서도 희극적인 일들, 이를테면 거위나 독수리나 염소 같은 동물들까지 끼어드는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삶의 가장 비참함과 가장 고결함 사이가 그리 멀지 않음을 깨닫는다.
깨달음의 이야기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이런 깨달음의 이야기가 거의 모든 페이지마다 깊이 있게 배어 있는 책이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 마흔쯤 된 죄수인데, 집도 절도 없어 접견(면회)도 오지 않는 고립자. 그런데 어느 날 접견 호출을 받게 된다. 본인도 놀라고 동료 죄수들도 다 놀란다. 나중에 물으니 대꾸를 하지 않고 침울하다. 자기도 모르는 사람이란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이 죄수가 두세 살 때 누이동생과 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살 길이 없어 어머니는 아이들을 삼촌댁에 맡기고 돈 벌러 가셨다가 못 돌아오고, 결국 재가(再嫁)하게 된다. 재가한 집에도 이미 어머니를 잃은 어린아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자기 자식은 키우지 못하고 남이 낳은 자식을 키우며 살았다. 바로 그 아이가 나름대로 성장하여 교도소까지 면회 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약, 당신 어머니를 우리 어머니로 모시고 오지 않았다면, 내가 그 속에 있고, 당신이 밖에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이런 이야기. 어느 죄수는 한밤에 변소를 다녀오면서 문을 쾅 닫았다. 시끄럽다고 매번 핀잔을 받았다. “다른 사람이 다 싫어하는데, 왜 그래?”라고 물으니 이렇게 답하더란다. “제가 야간에 주거침입을 하고 달아나다 축대 위에서 떨어져서 다리를 다쳤어요. 쪼그렸다 일어나면 완전히 마비가 돼요. 변소 가서 앉아 있다 나오면 마비가 와서 늘 문이 꽝 닫히는 걸 놓쳐요.” 그래서 신영복은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양해를 구하라”고 했더니, 이 죄수가 하는 말, “어떻게 그렇게 세세한 것까지 이해를 받고 사나요. 그냥 욕먹고 살아야죠.”
그밖에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느 죄수가 만기 출소를 하게 되면 건빵이라도 사서 조촐하게 파티를 하게 된다. 건빵 한 봉지씩 나눠받으면 훈훈해진다. 누군가가 노래 하나씩 하자고 해서 결국 신영복의 차례까지 오게 되는데 한사코 사양하다가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노래를 하게 된다. 감옥살이 20년간 만기 출소하는 사람을 위해 그가 부른 노래는 동요 ‘시냇물’이다.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 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강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지난 15일 오후, 신영복 타계 1주기 추모식이 열렸고 그 자리에 참례했다. 엄숙하게 진행된 추모식의 맨 마지막 순서는 고인의 생전 영상을 잠깐 보는 것이었고, 그 영상 속에서 고인은 ‘시냇물’ 이야기를 했다. 그 영상 후에 추모객 모두가 ‘시냇물’을 함께 불렀다. 나도 불렀다. 따라 부르다가, 2절을 차마 다 못 부르고 말았다. 꼭 노래를 잘 못 불러서 그런 것은 아니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