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시대의 기록
부끄러운 고문 역사를 증언하다

박원순 지음, 역사비평사, 전3권, 각권 2만5000원~3만5000원
‘고문(拷問)’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무자비하고 가혹한 폭력과 인권 유린, 절규가 혼재하는 고문은 직접 당해보지 않은 사람도 몸서리를 칠 만큼 끔찍한 것이다. 하물며 직접 당한 사람은 오죽하겠는가.
이 땅에는 아직 고문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이 많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처럼 정치권의 중심부에 있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우리 사회의 구석진 곳에서 신음하거나 정신병원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들의 아물지 않는 상처를 지켜보며 시름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들을 외면한 우리의 현실은 고문을 단지 악랄하고 처참한 지난 시절의 치부로 돌려세울 수 없게 만든다.
박원순 변호사가 10년간의 노력 끝에 ‘야만시대의 기록’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출간했다. 아무도 말하지도, 기록하지도 않은 고문의 역사에 대해 그가 마침내 입을 연 것이다. 박원순 변호사는 새삼 ‘과거의 일’을 들추기 위해 이 책을 펴낸 것이 아니다. “파괴된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사회와 격리”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아직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고문의 시대를 청산하는 데 밑거름이 되기 위해서이다.
박 변호사는 일제시대부터 오늘날 참여정부까지 고문의 역사를 통사적으로 정리,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고문과 관련한 법률, 관행, 의식구조, 국제사례까지 망라해 우리 현대사에서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고문에 대해 총체적으로 얘기한다. 고문을 얘기하면서 민주화운동을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슬 퍼런 독재정권 시절,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비인간적인 폭력이었던 고문은 그 기술과 방법, 목적이 모두 일제시대의 유산이다. ‘통닭구이’를 비롯한 각종 고문 기술,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과 같은 고문 방법, 억지로 꿰맞추고 자백을 얻어내겠다는 목적은 일제시대 고등경찰이 독립운동가들에게 하던 것 그대로이다. 고등경찰로 일하던 조선인 대부분은 광복 후 이승만 정권에 흡수됐고 이후 정권이 바뀔 때도 이들은 내내 같은 위치에서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우리나라에서 수십 년간 고문이 그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반공이데올로기를 이용한 정권과 ‘자백은 증거의 왕’이라는 인식을 철통같이 고수했던 법체제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오늘날 정부는 반공이데올로기를 악용하지도 않으며 ‘강요에 따른 자백은 증거불충분’이라는 인식이 법조계에 퍼져 있다. 강압수사·심문을 하는 경찰·검찰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쫓겨나는 시대다.
그렇다면 정녕 고문이 사라진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놀랍게도 고문은 아직도 당당하게 우리 주변을 활보한다. 가정폭력, 학교폭력, 아동학대, 빚독촉…. 구타는 물론 욕조에 머리를 처박는 물고문도 예사로 벌어지고 있다.
일부 사람은 ‘시한폭탄론’을 내세워 고문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한 테러리스트가 사람이 많이 모인 공공건물에 시한폭탄을 설치했다. 폭발시간은 다가오고 체포한 테러리스트는 폭탄을 숨긴 곳을 실토하지 않는다. 그러니 고문이라도 해서 실토하게 만들어야 한다. 테러리스트가 실토해야 수많은 무고한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고문을 허용하면 예외, 즉 틈이 생긴다. 일단 틈이 벌어지면 그것은 점점 더 커질 것이다. 테러리스트를 고문한다면, 당장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할지 모르나 더 많은 테러리스트를 양산해 결국 더욱 더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 소탐대실인 셈이다. 따라서 어떠한 경우에도 고문은 절대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 박원순 변호사도 이에 동감한다.
우리 현대사의 혐오스러운 역사를 생생히 증언하는 이 책은 우리의 인권 현장의 변모상을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앞으로 우리의 인권정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는 역작이다.
<임형도 기자 lhd@kyunghyang.com>
걷기, 인간과 세상의 대화
인간의 걷기는 소통의 언어

조지프 A. 아마토 지음, 김승욱 옮김, 작가정신, 2만5000원
인류 진화의 결정적인 기틀이 된 것은 직립보행이다. 두 발로 걸음으로써 인간은 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고 이로부터 도구 개발, 기술 진보가 비약적으로 이루어졌다. 600만 년 전의 일이다.
이후 ‘걷기’는 인간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농사지을 때는 물론, 사냥할 때, 전쟁할 때, 여행할 때, 산책할 때, 장사할 때 인간은 걷지 않을 수 없었다. 걷기는 동물의 가축화, 신발의 발달, 새로운 길 발견과 도로 건설 등으로 이어져 인류 발전을 주도했다.
걷기의 가장 큰 의미는 세상과 대화하고 자아를 발견하는 사유와 소통의 장이라는 점이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인 조지프 아마토는 ‘걷기, 인간과 세상의 대화’라는 책에서 600만 년에 걸친 인간의 걷기 역사를 설명하면서 이 점을 강조한다.
걷기가 사유와 관련돼 있음은 여러 가지 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걸으면서 참의미를 깨친 수도자, 산책하며 사상을 키워냈던 철학자, 걷기를 통해 작품을 배출해낸 시인과 소설가를 우리는 여럿 알고 있다. 이런 이유로 장 자크 루소, 키에르케고르, 니체 등 많은 사상가가 걷기를 예찬했다.
사람들은 생김새가 다르듯 걸음걸이 역시 모두 다르다. 걸음걸이는 ‘나’란 존재를 대변한다. 걷기가 지극히 실존적이고 명료한 소통의 언어임을 강조하는 저자는 “걷기는 말하기다”라고 정의한다.
한때 걷기는 빈부의 차를 보여주는 행위이기도 했다. 귀족들은 말과 마차를 타고 다니고 평민은 길 한 쪽으로 걸으며 귀족이 탄 말과 마차를 피해 다녀야 했다. 말과 마차를 타고 다니던 귀족은 신분을 과시하고 싶을 때, 걸었다. 귀족은 풍경 아름답고 공기 좋은 곳을 걸으며 우월한 지위를 향유한 것이다.
그러나 ‘탈것’이 많이 등장하면서 인간의 걷기는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되어버렸다. 현대 인간은 쇼핑하기 위해, 등산하기 위해, 운동하기 위해 따로 걷기를 선택한다. 그렇다 할지라도 걷기가 자연과 소통하고 세상과 대화하고 자아를 발견하는 통로를 의미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오늘날은 그 의미가 특히 강해졌다.
숨막히는 도시생활, 뒤돌아볼 여유조차 없는 바쁜 일상에서 현대인이 자연을 접하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방법은 걷기가 유일할지 모른다. 저자는 앞으로는 걷기의 의미가 더욱 부각할 것이며 그 중요성이 지금보다 더 클 것이라고 암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