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나라 이혼 에디션 PC’에 얽힌 사연, 진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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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것인 듯 새것 아닌 새것 같은 중고/ 150시간도 채 안 썼지만 중고는 중고. 마치 돌싱의 인생과 같이.” 이건 차라리 한 편의 시다. 10월 중순, ‘중고나라 이혼 에디션’이라는 게시 글이 화제를 모았다. 한 누리꾼이 중고물품 거래 커뮤니티인 중고나라에 내놓은 PC 소개 글인데, 신혼 때 맞춘 PC를 이혼으로 팔 수밖에 없게 된 사정을 PC 사양 설명에 맞춰 구구절절하게 풀어놓았다. 이를테면 CPU 소개는 다음과 같다. “i5-8400(인텔의 CPU 제품명)처럼 뜨거웠고, 두 장의 RAM(램)처럼 마주보던 신혼, 제법 괜찮은 듀오로 치킨도 먹어가며 행복한 시간을 이 녀석들과 함께했습니다. 아 물론 우리의 뜨거웠던 신혼만큼 발열이 심하지는 않습니다.”

중고나라

중고나라

PC 사양 소개 군데군데 묻어 있는 사연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게임이라는 공통 취미로 만난 두 사람은 LH행복주택에 입주해 단출한 신혼살림을 차렸다. 딸을 임신했는데 남편의 야근은 잦아졌고, 불화가 계속됐다. 갈등의 골은 깊어졌고 애를 낳았지만 신뢰는 회복되지 못했다. 새출발하면서 이 PC도 정리하게 되었다.”

‘판춘문예’라는 누리꾼 용어가 있다. 네이트 판 인기글에 오르기 위해 없는 소설을 진짜처럼 지어낸다는 이야기인데, 이 ‘이혼 에디션’ 이야기도 너무 극적이라 일종의 ‘중고나라판 판춘문예’가 아니겠느냐는 의심이 나왔다. 확인해봤다.

“아, 그거 진짜 제 이야기 맞습니다. 메인보드를 소개하며 LH행복주택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도 맞고요.” 10월 23일 통화한 게시글의 주인공 한모씨(29)의 말이다. 그도 자신이 올린 글이 인터넷에서 유명세를 얻은 줄 몰랐다가, 친구가 링크를 보내줘서 알았다고 덧붙였다. 들은 이야기를 다 옮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내밀한 가정사다. 잘잘못을 가리기엔 정답이 없는 문제다. 한씨는 다만 누리꾼의 해석 중 틀린 부분이 있다고 덧붙였다. “‘딸아이가 태어나고 알아버린 와이프의 거대한 비밀’이라는 표현에서 그 딸이 제 아이가 아니라서 이혼 계기가 된 것이 아니냐고 하는데, 제 아이 맞습니다. 외도나 그런 것은 아니고 다른 이유로 갈등한 거예요.”

그래서 87만원에 내놓은 PC는 팔렸을까. 한씨에 따르면 두 달 할부로 받는 것으로 하고, 친구가 조금 싼값에 가져갔다고 한다. 누구나 살다보면 인생에 굴곡이 있게 마련이다. 한씨나 한씨의 전처 모두 상처를 딛고 앞으로는 좋은 일만 가득하길. 파이팅이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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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뒤척인다. 겨우내 마음 편히 잠을 자지 못해 머리에 스모그가 낀 듯 무겁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린다. 이상기온이 일상이 돼간다. 기후변화의 징후인 3월 중순 눈 쌓인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불길하다. 자연 시스템의 불안정성만큼이나 정치와 사법 시스템 또한 아슬아슬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둘러싼 사회적 긴장은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일만 년간 이어온 기후 안정성과 40여 년이 채 안 된 한국의 민주주의는 기간으로는 비할 데 아니지만, 우리 삶에 당연히 주어지는 조건으로 여겨졌던 점은 흡사하다. 이번 겨울 기후환경이든 정치체제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기후위기와 정치위기라는 무관해 보이는 두 위기는 사실 그 원인 면에서도 맞닿아 있는데, 효율과 성과가 최우선시되는 과정에서 다른 중요한 가치는 간과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법을 배웠지만,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구조를 전환하는 데 게을렀고, 정치적 다양성과 세대 간의 이해를 구현하지 못했다. 우리는 경쟁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방식의 성장이 우리 사회를 갉아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