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희의 <녹색의 문>은 일제 말기와 해방기,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현대사의 의미심장한 시기를 배경으로 이상적 삶을 동경하던 여학생이 섹슈얼리티를 훼손당하고, 애인과 남편의 변심으로 인한 수난을 겪으면서 단단한 어머니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여성 성장 서사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한국문학의 주요 플롯인 여성수난사와 여성 성장 서사의 궤적을 따라가는 듯하면서도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그리고 가부장적 질서에 미세한 균열을 내는 젠더 정치학을 수행하고 있다.여학생 시절 주인공 유보화는 “하늘에 문 달린 집 보리밭처럼 푸른 문(門) 안에 살고 있는 어느 나라 왕자와 같은 눈이 서늘한 남자와”의 연애를 꿈꾼다. 조선어 사용이 금지되고, 신사참배가 일상화된 식민지 현실은 흐릿한 배경으로 존재할 뿐 유보화는 낭만적 연애를 꿈꾸면서 막연히 어른이 되는 것에 대한 동경과 두려움 사이에서 갈등하며 성장기를 보낸다. 그런 그녀가 동경 여자미술학교로 유학을 가서 우연히 하...
1682호2026.06.05 1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