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어느 어촌의 독도관련 조례 제정과 연관해서 온 나라가 격앙되어 있다. 일본산 자동차에 불을 지르고, 손가락을 자르며, 분신하는 일이 벌어졌다. 대통령도 나서서 매우 강경한 어조로 일본을 향해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반면에 우리를 자극하고 나선 일본측은 오히려 냉정을 되찾자고 한다. 우리의 반응에 그리 당황하는 것 같지도 않다. 시마네현에 이어 또 다른 지방자치 단체가 나서서 이것저것 주장하고 나섰다. 일본의 중앙정부는 가만히 있고 지방정부가 연이어 대표선수로 나서서 우리를 자극하고 있다.
자극과 반응은 실험의 기본 틀이다. 실험상황에는 실험을 하는 사람인 실험자와 실험의 대상이 되는 피험자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실험의 목적과 과정이 있다. 실험은 주로 대학이나 연구소에서나 하는 일이지만, 역사를 돌이켜 보면 국가간에도 일종의 실험적 상황이 수없이 전개된 바 있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의도적으로 자극해서 어떻게 나오는지 반응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반응의 양상에 따라서는 전쟁과 정복으로 이어졌다.
개인이든 국가든 자극을 받으면 화가 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화가 나는 단계가 다소 지났다면 이제는 마음을 가다듬고 우리 앞에 벌어지고 있는 한·일간의 상황에서 누가 실험자이고 누가 피험자이며 뒤에 숨어 있는 실험 디자인은 어떠한 것인지를 냉철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연구하는 공부에 꽤 시간을 들인 필자의 입장에서는 안타깝게도 지금의 사태에서 실험자는 일본이고, 피험자는 한국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우리는 일본이 우리를 자극하는 의도를 충분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반응을 보이고 있고, 실험자인 일본은 냉철한 눈으로 현재와 미래의 전개과정을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상대에게 우리가 느끼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반응이 전체적인 실험 디자인에 대한 이해없이 단순 반응에 그친다면, 우리 민족이 과거에 속아서 끌려가고, 고생하고, 다치고, 죽었던 굴욕적 경험을 앞으로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이제는 상대를 알기 위해 노력하고, 상대가 뜻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한사람의 일본인이 한국의 철도를 연구해 엄청난 양의 자료를 축적하는 동안 우리는 과연 일본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대다수의 일본인이 삶의 현장에서 묵묵히, 열심히, 꼼꼼하게, 그리고 정성을 기울여 일하고 있는 거대한 흐름을 우리의 신세대가 앞으로 어떻게 부딪쳐 나갈 것인가. 한·일간의 경쟁에서 적어도 밀리지 않을 만큼 우리의 교육 경쟁력을 어떻게 높여 나갈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국민 각자가 오늘 당장 다만 5분 동안이라도 순국선열에게 묵념하는 기분으로 답을 생각해 보는 것이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는 방어책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자극에 대해 단순 반응하는 식의 행태는 지속되어 보았자 얻는 것은 결국 국가적 에너지의 총체적 손실일 뿐이다.
묵묵히 의연하게 우리가 갈 길을 가는 것을 상대에게 보여주는 것이 때로는 격렬하게 저항하는 모습보다 훨씬 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아낄 때 나라도 부강해진다.
한·일간의 관계에서 우리는 이제 피험자의 위치가 아닌 적어도 공동연구자의 위치로 도약할 수 있는 국가적·개인적 전략을 개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선 행동보다는 신중한 생각, 상대가 무시하는 구호보다는 상대를 은근히 신경 쓰게 하는 실천이 중요하다.
<정도언 서울의대 교수·신경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