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구에는 사적 101호로 지정된 삼전도한비(三田渡汗碑)가 서 있다. 원래 ‘삼전도 청태종 공덕비‘였던 이 비석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이 인조의 항복을 받고 그 공덕을 뽐내려고 세운 전승비다. 비 앞면에는 한자로 청태종의 공덕을 적고 뒷면에는 이 사실을 번역한 몽골 문자와 만주 문자를 새겼다.
이 자리에서 새삼 국치(國恥)의 유적인 삼전도비를 거론하는 것은 비석 뒷면에 새겨진 만주 문자가 소멸 직전에 놓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청나라는 1911년 신해혁명으로 무너질 때까지 270년 동안 중국대륙을 지배한 만주족의 나라였다. 그런 청나라의 공용어가 망국 1세기도 채 안돼 소멸운명을 맞았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다. 2001년 중국 사회과학원 민족연구소는 중국 전역에 1000만명의 만주족이 퍼져 있지만 만주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은 수십명에 불과하다고 발표했다. 만주족의 문화가 자기 정체성을 잃고 한족(漢族)의 문화에 흡수 동화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민족의 문자나 언어는 그 민족의 문화를 지키고 가꾸는 기본적인 요소다. 한때 동북아지역에 군림했던 거란족이나 여진족이 지금은 중국의 변방민족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자신들의 문자나 언어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란족이나 여진족뿐 아니라 선비족이나 흉노족 등 대부분의 소수민족이 중국에 흡수동화된 것 역시 고유언어나 문자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즘 전자정부니 뭐니 해서 종이 없는 결재를 선진화의 척도인 양 말한다. 이제는 ‘앙 결재(仰 決裁)‘판을 들고 다니는 것이 시대에 뒤떨어진 듯 보이는 세상이 되었다. 얼마 전에는 청와대에서도 인터넷으로 상의하달과 하의상달이 이루어지고 대통령의 결재도 인터넷으로 처리한다는 보도자료까지 나왔다. 아마도 이 보도자료에 담긴 뜻은 이제는 대통령까지도 인터넷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는 점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대통령의 인터넷 결재가 어느 선까지 이루어지고 있는지 몰라도 종이서류 추방을 선진화의 척도로 아는 것은 큰 잘못이다. 더구나 대통령이 서명하는 서류에는 영구적으로 보관해서 후세에 길이 남겨야 하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정부는 엊그제 정부기록 관리 시스템 개편안을 발표했다. 이 안에 따르면 앞으로는 문서의 작성단계부터 관리, 활용, 보존, 폐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정문서의 전 과정을 일관성있게 관리한다고 한다. 그러나 정부의 모든 서류가 전자시스템으로 바뀌어 종이로 된 문서가 사라진다면 정부의 기록관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물론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전자시스템을 도입하는 것까지 나무랄 생각은 없다. 그러나 전자정부를 지향한다고 해서 종이에 기록된 모든 서류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몰아붙여서는 안된다. 종이 없는 세상이 맞게 될 함정과 그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인류문화가 지금까지 전승되고 발전한 것은 종이가 있었기 때문이고,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는 양피지나 대나무가 한 시대의 문화를 담는 그릇이 되어왔기 때문 아닌가. 사무실에서 종이를 추방하는 것을 선진화를 앞당기는 것으로 아는 요즘 세태가 걱정스러워서 하는 얘기다.
이광훈[경향신문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