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라프’지는 중국 명(明)나라의 해군제독 정화(鄭和)를 콜럼부스보다 72년 먼저 북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하고 마젤란이나 바스코 다 가마보다 1세기 앞서 세계일주를 한 인물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정화는 아시아인들도 그 이름을 모를 정도로 낯선 인물이다.
그 정화가, 폴 케네디가 ‘강대국의 흥망’에서 명나라 해군의 위력을 평가하면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1420년 명나라 해군은 400척의 대형 해상요새와 250척의 장거리 순양함을 포함하여 1350척의 전함을 보유했다. 정화제독이 이끈 일곱차례의 해외원정은 말라카와 실론에서 홍해입구와 잔지바르까지 진출했다. 인도양을 침략한 유럽인들과는 달리 중국인은 약탈이나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
정화가 2만7000여명을 태운 200여척의 거대선단을 이끌고 최초로 해외원정에 나선 것은 1405년 6월이었다. 그가 최초로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했다는 주장의 근거는 1428년께 이미 남미대륙을 표시한 지도가 포르투갈에 등장했고 당시 이런 지도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정화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1430년 중국에서 나온 ‘이역도지(異域圖志)’에도 아메리카 표범 등이 실려 있고 남미에 정화부대가 남긴 표석이 남아 있다는 것이 영국 해군출신 역사학자 개빈 멘지스의 주장이다.
정화가 세계 최대의 함대를 이끌고 7차례에 걸친 원정항해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영락제(永樂帝)를 비롯한 거국적인 지원에다 길이 400m에 폭 160m에 이르는 거대선박을 건조할 수 있는 앞선 조선기술과 치밀한 사전준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항해중에 사용할 담수(淡水)를 실은 선박만도 20여척이나 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항해준비가 얼마나 철저했던가를 말해준다. 참고로 콜럼부스의 산타 마리아호 길이는 185m였다.
중국은 정화항해 600주년을 맞아 거국적인 기념행사를 추진하고 있다. 1987년에 이미 해군 원양항해 연습함 ‘정화호’를 진수시켰고 텔레비전 특집방송과 기념우표-주화 발행, 전시회와 국제세미나 등 다양한 행사로 ‘정화 띄우기’에 나서고 있다. 중국정부가 이처럼 정화 띄우기에 나선 것은 15세기에 이미 세계의 대양을 누비고도 어떤 나라도 식민지화하지 않았던 정화의 업적이 평화적으로 세계무대에 우뚝 서겠다는 중국의 대외정책과 상통하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새삼 600년 전의 정화함대를 떠올리는 것은 4명의 우리 젊은이가 뗏목을 타고 1300년 전 발해의 해상교역로를 탐사하려던 꿈이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7년 전에도 4명이 목숨을 잃은 발해뱃길 탐사에 또 다시 엉성한 뗏목에 항해 전문가도 없이 겨울바다에 나선 것이 무모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무모함을 탓하기에 앞서 옛 조상들의 발자취를 되짚어 보려는 그들의 열정을 우리 사회가 제대로 뒷받침해 주었느냐는 점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정부가 나서기 어려웠다면 기업이나 민간단체라도 적극 나서 이들을 후원했더라면 엉성한 뗏목 하나로 겨울바다로 뛰어들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발해뱃길 탐사가 또 다시 좌절된 것을 보면서 우리 역사를 되찾기 위한 젊은이들의 열정에 우리 사회가 너무 냉담했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이광훈[경향신문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