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노동운동을 연구하며 [일제하 노동운동사] [한국 근대 노동사와 노동운동] 등의 저서를 펴낸 바 있는 김경일 교수(한국정신문화 연구원-사회학)가 이번에는 '신여성'에 주목했다. 저자의 논지는 '신여성의 출현은 근대성의 주요한 표상'이라는 것. 1920년대 본격 등장한 신여성은 앞서 말한 근대의 표상들을 압축시켜놓은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항상 조신해야 했고 현모양처를 최고의 선으로 '강요'받았다. 그렇지만 신여성들은 한복을 벗고 양장을 했으며 쪽찐 머리를 풀어 짧게 잘랐다. 그들은 유성기에서 울려퍼지는 음악에 맞춰 '댄스'를 즐겼으며 카페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고 소비와 최신 유행을 주도했다. 또한 '전문학교'에서 '신지식'까지 배웠다.
신여성의 출현은 '모성과 가족'이라는 테두리에 갇혀 살던 여성이 거기에서 과감히 탈피해 관심의 초점을 자기 자신에게 돌렸다는 의미다. '여성해방'에 눈을 뜬 것이다. 그들은 자유연애를 서슴없이 말했고 나혜석이나 윤심덕같이 '자기 일'을 했으며 봉건적 가족제도와 결혼제도를 비판하면서 여성의 개성과 평등을 강조했다. 오늘날 '페미니즘 전사'들 못지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논리와 주장, 활동은 '조선의 특수성'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다. 따라서 자기 자신보다는 나라를 먼저 생각해야 했던 것이다. 민족주의적 저항이라는 거대담론 앞에 페미니즘은 설 자리가 없었다. 게다가 일제의 식민교육정책으로 인해 여성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이는 곧 자유와 평등을 얻는 데 중요한 수단인 교육과 지식이 온전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 책에서 저자가 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신여성의 생활방식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근대를 형성해가는 과정이다. 알다시피 조선의 근대화는 자의가 아닌 타의(주로 일본)에 의한 것이었고 더욱이 서구에서는 오랜 기간을 두고 형성된 틀이 조선에서는 단기간에 형성됐다. 따라서 표상만 근대일 뿐 사고방식은 여전히 봉건적이었다. 이 점은 가치관의 혼란이라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연구서라면 으레 딱딱하기 일쑤인데 이 책은 마치 옛날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느낌을 준 데에는 풍부한 자료와 사진, 삽화도 일조했겠지만 무엇보다 동시대의 현상, 역사적 배경, 담론 등을 한데 아우른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관점이 큰 힘이었다. 김경일 지음, 푸른역사 16,500원.
임형도 기자 lhd@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