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렇게나 무너져내린 가옥들의 잔해로 뒤덮인 산동네. 불에 그을려 곳곳에 나뒹구는 각목과 기왓장, 깨진 병조각들 사이로 먼지를 뒤집어쓴 곰인형이 삐죽 머리를 내밀고 있다. 인적이라고는 경찰과 철거용역 직원, 그리고 이들과 대치하며 농성 중인 철거민들뿐이다.
2003년 겨울, 서울 동작구 상도2동 159번지 일대 철거 현장은 '전쟁 중'이다. 2001년 건설업체들의 컨소시엄인 ㅇ사가 이곳 2만4천여 평의 부지를 매입, 아파트 건축 방침을 발표하면서 2년이 넘도록 세입자들과 갈등을 겪고 있다. 불과 수백m 떨어진 장승배기역 인근은 성탄 캐럴과 장사꾼들의 호객으로 세밑 분위기가 물씬하지만, 이곳은 외부와 철저히 고립된 채 숨죽인 연말을 맞고 있다. 그 경계에는 붉은색 글씨가 적힌 입간판이 놓여 공포마저 자극한다. '사제총 쏨! 위험! 통행금지!'.
어린이-노인들 고통 극심 살벌한 경계망을 넘어 지난 12월 13일 밤 철거민들의 '요새'를 찾았다. 전쟁을 방불케 했던 11월 28일 충돌 이후 세번째. 하지만 그 사이 사람들의 낯빛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지난번까지는 철문을 열고 들어갔으나 무슨 이유에선지 이번에는 건물 뒤편 담을 넘어오라고 했다. 안내를 위해 내려온 한 청년은 검은 복면을 벗으며 "전후 사정도 보지 않고 우리를 전범(戰犯) 취급하는 언론에 진절머리가 난다"며 "아픈 사람이 많으니 얼른 끝내고 돌아가라"고 짧은 말을 뱉었다.
한동안 사람 구경을 못해서일까. 달갑지 않은 객을 반기는 건 그나마 아이들이었다. 네 살된 지연이는 재성(3)-재환(2) 두 남동생과 뛰어나와 머리를 꾸벅 숙였다. 옷이며 목덜미에 땟국물이 선명한 지연이는 감기를 앓는지 코끝이 헐어 벌갰다.
"어른들이야 어떻게든 견디겠지만 애들이 걱정이죠. 어제부터 전기마저 끊겨 집안이 온통 냉골이에요." 3남매의 아버지 김모씨(36)는 "빨리 나가서 애들을 따뜻한 방에서 재우고 싶다"면서 "분유가 없어 젖먹이 재환이에게 쌀뜬물에 설탕을 타 먹일 때가 가장 괴롭다"고 했다. 김씨는 그러면서도 '노약자들의 임시 거처를 마련해주겠으니 일단 그들을 내려보내라'는 시공사측의 제안에 대해 "그말을 어떻게 믿느냐"며 "아무리 춥고 굶주려도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게 편하다"고 말했다.
철거민 20여 명 중에는 팔순을 바라보는 할머니 등 노인 3명도 끼어 있다. 상도동에 10년 넘게 살았다는 김모 할머니(66)는 "가뜩이나 먹을 것도 없지만 몸살 때문에 먹고 싶은 것도 없다"며 덮고 있던 점퍼를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 허리 통증이 부쩍 심해졌다는 70대 노파도 차디찬 전기장판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최근 철거 현장이 '휴전' 상태인 것은 그나마 노인들과 아이들 때문이다. 철거민들에게는 그저 '동고동락하는 한 식구들'일 뿐이지만, 시공사측 입장에서 이들은 철거민들의 '방패'이자 '볼모'인 셈이다. 경찰도 충돌 과정에서 노약자들이 희생될까 잔뜩 우려하고 있다.
한 네티즌은 전국철거민연합 인터넷게시판에 "애들과 노인들을 동원해 동정 여론을 일으키려는 투쟁방법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시공사인 ㅇ사의 한 관계자도 "어린이와 노인들에게 전셋집을 얻어준다고 했는데도 요지부동"이라며 불만을 터뜨린다. 그러나 '상도철거대책위원회'의 김영재 위원장은 "그들도 이곳에 주소지를 둔 우리와 같은 억울한 세입자들"이라며 "물만 먹더라도 우리는 끝까지 갈 것"이라고 단언했다.
'사제총'은 진실인가 상도2동처럼 당국과 대치 중인 철거촌은 전국을 통틀어 수십 곳을 헤아린다. 그런데도 이곳이 유독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는 것은 11월 말 화염병과 골프공, 쇠구슬 등이 난무하며 전쟁을 방불케 했던 충돌 실황이 방송에 공개되면서다. 특히 이 과정에서 불거진 철거민들의 '사제총' 사용 의혹이 여론을 들쑤신 결정적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경찰은 이날 현장에서 부상한 용역 직원들의 몸에 박힌 쇠구슬과 금속 파편 등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내 감식을 의뢰했고, 국과수는 이를 "화약에 의한 추진체에서 발사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소견을 밝혔다. 그러나 쇠구슬 등에서 직접 화약 성분이 검출되지는 않아 '사제총 논란'은 아직까지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관할 노량진경찰서의 한 관계자는 "인체를 관통할 정도의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는 화약 발사체가 아니고서는 물리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다"고 밝혀 사제총 사용을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다. 이미 시위 주동자 15명에 대해 발부받은 체포영장 외에 철거민들이 머물고 있는 가옥과 망루에 대한 압수수색영장까지 12월 초에 받아놓은 상태다.
이에 대해 철거민측은 펄쩍 뛰는 반응이다. 김영재 위원장은 "골프공과 쇠구슬 등을 사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새총으로 쏜 것"이라며 "경찰이 주장하는 총성은 용역 직원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삐리릭탄'이라는 어린이 장난감을 사용한 것"이라고 밝혔다.
협상이냐, 파국이냐 대치가 장기화하면서 시공사와 철대위 양측은 12월 13일 처음으로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양측은 철거민들이 농성을 벌이고 있는 망루 안에서 접촉했으나, 서로 입장차만 확인한 채 협상은 별무소득이었다. ㅇ사측은 "철거민 대표들을 만나 추가보상 문제 등을 논의하려 했지만 세입자들의 요구 내용이 전혀 달라지지 않아 진전이 없었다"고 밝혔다. 철대위 관계자도 "당초 철대위-시행사-시공사-동작구청-경찰 모두 참여키로 했으나 시행사만 나와 협상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철거민들은 영구임대주택과 가수용 시설 마련을 요구하고 있지만, 시공사측은 이주비 1백50만원 외에 한 푼도 더 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시공사측은 특히 "정부 개발 지역은 경우가 다르지만, 민영업체에 그 이상의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못박았다.
양측이 끝내 의견 조율에 실패할 경우, '파국'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1년 이상 착공조차 못하고 있어 금전적 손해가 막심하다는 시공사측에 더는 여유가 없어 보인다. 사건을 담당 중인 노량진경찰서 역시 "철거촌에 경비 인력을 24시간 배치하느라 관내 치안이 위협받을 만큼 인력 공백이 크다"는 주장. 노량진서의 한 관계자는 "어린이와 노인들이 다칠까 섣불리 강제 집행을 못하고 있다"면서도 "장기적으로 철거민들의 고립이 계속돼 노약자들의 고통이 더욱 심해진다고 가정하면 이들의 '고통 최소화'를 위해서라도 결행할 수밖에 없다"며 경찰특공대 조기 투입 가능성마저 내비쳤다.
허유신[사회부 기자] whynot@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