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9월 12일부터 16일까지 4박5일간 국회 국방위 시찰단 일원으로 이라크 나시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서희-제마부대를 둘러봤다. 이라크 시찰은 추석 위문 형식으로 계획된 것이었지만 미국이 한국 전투병의 이라크 파병 요청을 해옴에 따라 자연스럽게 현장 실태 파악의 계기가 됐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10m까지 저공비행을 하기도 했다. 황토사막-붉은 사막-자갈 사막.... 수송기 속에서 본 것은 서너 군데 소규모 민가 이외엔 전부 사막이었다. 사막의 풍경에 전쟁이라는 말이 덧칠해지면서 삭막한 느낌은 더해졌다.
제마부대 진료 연말까지 예약
주둔지 나시리아는 문명의 발상지 우르에서 불과 40㎞ 정도 떨어진 곳이다. 우르는 '갈대야 울어라'라는 뜻이라고 한다. 주둔지에 도착하기 전에 '갈대의 울음' 대신 포성을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679명의 주둔 병사의 생활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커졌다.
문명의 발상지도 역사의 풍화작용에는 견디지 못하는 것일까. 주둔지 주변 어디에도 고대 문명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서희-제마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은 나시리아 중 한 곳인 안나시리아였다. 이곳은 미군 통제 아래 있는 옛 후세인군 비행장이었다. 기온은 40℃를 넘었다. 나무 그늘 하나 없는 평지였다. 더위로부터의 도피처는 텐트가 유일했다. 텐트 밖에서는 잠시만 서 있어도 숨이 막혔다.
서희부대장인 정관춘 대령으로부터 부대 상황을 듣고 곧바로 주둔지 시찰에 나섰다. 야간에는 사병들이 동초를 서는 것과 똑같이 완전무장을 하고 주둔지 울타리를 돌았다. 주둔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텐트 속에서 잠을 잤다. 이렇게 한 것은 장병에게 조금이라도 안도감을 줘야 한다는 선배 군인으로서의 마음을 전해주고 싶어서였다.
방문 기간 중인 13일 비상 사태가 발생했다. 나시리아에서 돌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라크 전직 경찰이 이탈리아 담당 지역에서 시위를 벌인 것이다. "직장을 보장하라" "봉급을 지급하라"라는 민생시위였지만 진압 과정에서 이라크 시민 2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나 서희-제마부대 주둔지에는 주둔을 시작한 지난 4월 이후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의료지원부대인 제마부대는 물론 공병부대인 서희부대도 철저히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공사 지원을 한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군에 대한 반감은 찾아볼 수 없고 심지어 환영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는 보고를 받고 뿌듯했다.
이런 보고가 사실임을 확인하는 데는 전혀 노고가 필요하지 않았다. 13일 알슈알 마을 공사 현장(시가지 정비공사, 축구장 건설, 주택부지 조성)과 쿼터바라 초등학교 공사 현장(학교시설 보수와 정비)을 방문했을 때 한국군에 대한 지역주민의 적대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태극기를 단 군용차가 지나는 곳마다 주민이 손을 흔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환대했다.
이튿날 탈릴기지 내 미군부대(171 군수지원단)를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로렌스 라센 171지원단장은 "2004년 신(新)이라크군 창설 계획에 서희부대를 1개년, 5개년 계획에 포함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군이 이라크를 돕는 다국적군으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며 서희-제마부대의 임무수행 능력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쿠웨이트에서 나시리아에 이동하는 데 이용한 수송기도 미군의 자발적인 지원이었다는 사실을 안 뒤 먼길을 달려온 보람을 느꼈다. 미군 고위 관계자는 "한국이 다국적군에 참여하면 후세인 잔류 세력의 축출이 아니라 주민 치안활동을 맡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라크인에게 좋은 인상을 준 한국과 터키가 치안을 담당하면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을 것"이라며 기대감을 표시했다.
후세인 세력의 적대행위 미군 집중
후세인 추종 잔류 세력은 아직도 "나의 적에 대한 적은 나의 친구"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둔군에 한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고 오히려 환대를 받고 있다는 게 너무나도 대견스러웠다. 이라크 전역에서는 지난 6월과 7월 두 달 동안 303건, 8월 중 19건의 적대행위가 발생했다. 동맹군의 희생 규모는 하루에 한 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을 당하는 꼴이다. 물론 이런 희생은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 중부 지역의 미군에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다보니 전반적으로 우리 군의 사기는 높아 보였다. 의식주 생활도 수준급이었다. 호주산 쌀과 쿠웨이트에 구입한 부식으로 식사가 제공되고 있었으며 병사들이 식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병사들과 함께 비상식량으로 한끼의 식사를 했는데 이 역시 만족스러워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그렇다고 전장생활이 편안한 것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물 부족이었다. 물 공급이 어렵다보니 아껴 쓰는 게 최고이다. 물을 아끼기 위해서 '적시고 헹구기'라는 목욕법을 하고 있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여성 장교가 11명, 그 중에서도 아이 엄마가 5명이나 된다니 놀라웠다. 파견 병사는 한 달 해외근무 수당으로 1백90만원에서 2백만원을 받는데 거의 모든 돈을 저축하고 있다고 한다.
귀국길은 수송기를 제공하겠다는 호의를 물리치고 육로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미군의 한국군 파병이 요청이 있었던 만큼 이라크 내부의 '전시 상황'에 대해 꼼꼼히 둘러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시리아서 국경까지는 고속도로로 이동했다. 거리는 350㎞ 정도였다. 광활한 사막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에는 군용 차량 이외에는 볼 수 없었다. 전쟁 중임을 실감했다. 하지만 4시간여를 달리는 동안 총소리는 듣지 못했다. 이라크 군정이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느낌을 받았다. 만일 미국이 후세인 잔류 세력의 축출이 아니라 주민의 치안에 치중하는 역할을 우리 군에게 맡긴다면 우리 군의 추가 파병을 긍정적으로 검토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세환〈국회의원-한나라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