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년 동안 뮤지컬 [명성황후]의 타이틀 롤을 맡아온 배우 이태원(37)은 "인물에 대한 공부를 지속적으로 하면서 명성황후를 연기하는 데 날로 어려움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처음엔 노래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명성황후가 훗날 일본인의 표적이 될 만큼 막강한 카리스마를 지니게 된 배경에 여러 가지 요인이 중첩돼 있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아무 연고도 없이 홀로 궁에 들어와 살던 여인이 살아남으려면 독해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생각해요. 게다가 남편의 사랑을 잃었을 때, 자식을 연거푸 두 번이나 잃었을 때 명성황후의 심정은 얼마나 참담했겠어요. 서적 등에 따르면 명성황후가 집착과 질투가 심해 고종 주변 여인을 가만히 안 두었다는 내용도 있는데 아마 제가 그 입장이라도 그랬을 것 같아요."
그는 "명성황후의 남다른 모성애를 같은 여자로서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했다. 오랜기간 아기를 생산하지 못한 명성황후처럼 자신 역시 이혼 전 결혼생활 동안 자연임신이 안 돼 큰 고통을 겪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순종을 그렇게 어렵게 얻었으니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을 거예요. 전 그런 명성황후를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디테일한 연기에 신경을 쓰고 있어요. 배우의 호흡, 시선에 따라 같은 대사도 관객에게는 전혀 다르게 전달되거든요."
9월 5일부터 20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다시 막을 올리는 [명성황후]는 국내 공연만 11번째. 이번 무대는 지난 4월 LA공연에서 호평받았던 새로운 버전으로 국내에는 처음 소개된다. 임오군란 장면이 빠지고 대원군의 재집권 장면과 게이샤 장면이 첨가된다.
[명성황후]가 모든 곳에서 호평받은 것은 아니다. 지난해 영국 공연에서는 일부 현지 언론이 혹평을 쏟아냈고, 국내 언론도 이같은 반응을 앞다투어 소개했다. 그러나 이태원은 이에 대해 할말이 많다. 그는 "영국에서 돌아오니 국내 언론의 보도로 명성황후 이미지가 크게 실추돼 있었다"며 "현지 언론에 난 기사를 자세히 보면 작품에 대한 건 대부분 호평이었고, 혹평을 한 건 가사가 고급스럽지 않다는 점이었는데 그 가사는 영국인이 번역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중학교 3학년때 미국으로 이민 가 줄리어드 음대를 졸업한 뒤 브로드웨이 뮤지컬 [왕과 나]의 티엥 왕비 역으로 1,200여 회나 무대에 선 그가 한국에 온 이유는 단 한 가지, 한국에서 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교포들은 고국에 와서 사는 게 꿈 중 하나예요. 특히 어릴 적에 이민가서 외국생활을 한 사람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맘이 유난히 강하죠. 그래서 [명성황후] 오디션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막무가내로 일면식도 없는 윤호진 감독에게 전화를 건 거예요. 왜 배우라면 누구든지 진출하고 싶어하는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를 두고 거꾸로 한국으로 왔냐고 묻는 분이 지금도 적지 않은데 전 한국 사람 앞에서 연기하는 게 행복해요. 실제로 브로드웨이에 처음 섰을 때보다 한국 무대에 처음 섰을 때 더 가슴이 뭉클했어요. 성공보다는 하루하루 제가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추구하자는 게 제 신조예요."
그는 "10월부터 내년 1월까지는 '나 죽었소' 하고 살아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10월 첫주부터 11월 둘째주 주말마다 [명성황후] 지방 순회 공연이 있고 그가 화장실 관리반장 역할을 맡은 뮤지컬 [유린타운] 재공연이 10월 3일부터 한 달간 열린다. 뿐만이 아니다. 11월 13일부터 내년 1월 초까지 막을 올리는 뮤지컬 [왕과 나]에도 출연한다. SJ엔터테인먼트와 오디뮤지컬컴퍼니가 공동제작하는 [왕과 나]에서 이태원은 브로드웨이에서와 마찬가지로 티엥 왕비역을 맡는다.
얼마 전 자서전 [나는 대한민국의 뮤지컬 배우다](넥서스 Books)를 펴내기도 한 이태원은 지인의 도움으로 지난 8월 27일 거처를 경기 용인으로 옮겼다. 국적이 미국인 그는 공연을 위해 한국에 체류하는 기간 동안 1년에 한 번꼴로 이사를 했다. 공기가 맑은 곳에 자리한 50평대의 아파트를 마르티스-시추 등 애완견 세 마리와 함께 사용하게 됐다는 그는 "외로울 틈이 없다"고 말한다. 눈앞에 닥친 공연 셋을 성공적으로 마치는 게 발등에 떨어진 불이라는 것이다.
<인터뷰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사진 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