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평전]문재린 목사에 세례 받은 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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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평전]문재린 목사에 세례 받은 YS

입력 2003.07.31 00:00

문익환은 프린스턴의 마지막 시간을 성서에 심취해서 보냈다. 어떠한 예술적 진리도 통일성도 없는 그 유서 깊은 묵시문학을 통하여 문익환이 추구한 것은 한마디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가 성서의 세계를 탐구하기 위해 처음 프린스턴에 당도했을 때도 그에게 가장 커다란 문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2차 도미(渡美)에서 바뀐 게 있다면 그의 시선이 신약에서 구약으로 옮겼다는 사실뿐 새로운 일이라곤 없었다. 그러나 신약에서 구약으로! 예수의 탄생을 사이에 두고 흐르는 그 간단한 경계의 강을 넘은 것은 엄청난 사색의 은어떼였다.

그가 전쟁의 기억과 싸우면서 발견한 '영혼의 미개지'가 얼마나 넓은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혼자서 머나먼 히브리 사람의 광야를 헤매면서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그와 함께 자신의 사색이 아직 가보지 못한 어떤 광활한 영역을 체험하면서 멀리서 어렴풋이 동터오는 세계의 윤곽을 보기 시작했다.

[문익환 평전]문재린 목사에 세례 받은 YS

그것이 그를 신경쇠약에 빠뜨릴 것은 당연했다. 그가 지속해서 꿈꾸는 일은 모두가 당시 문명의 풍요에 도취해 있는 미국 문화-앤디 워홀이 출현하고 팝아트가 퍼지면서 겸손하지도 경건하지도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이성만을 신격화하는 시대적 분위기에 역행하는 일이었다. 그는 한편에서 학문적 열정이 샘솟는 것과 달리 다른 한편으로 또다른 피로에 사로잡혔다. 육신은 갈수록 야위었으며 감정은 메마르고, 몽상의 시간은 나날이 늘어갔다. 그로 인해 한없이 야윈 어느 지점에서 그는 마침내 예언자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보다 차라리 '자신의 자리'를 되찾는 것이 더 시급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나오는 소년처럼 "저 지금 아파요. 어머니, 저를 데려가주세요"라고 말해야 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때 이미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 그가 자녀를 길러서 가정을 건설하는 '하느님의 기업' 속으로 복귀할 결심을 한 것은 1955년 봄이었다. 석사를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아야 할 순간에 신체의 에너지는 고갈되고 마음은 길을 잃자 그는 홀연히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에 돌아와 가족의 품에 안겼다. 그것은 짧게나마 감격이요 환희의 기쁨을 주었다.

가족. 문익환의 가족. 그에게서 가족은 결코 사사(私事)에 얽매이게 하는 부양인력이 아니었다. 전쟁으로 인한 방랑을 마치고 서울에 입성한 지 불과 3개월밖에 안 된 문씨 일가가 '신앙적 유목민'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만큼 그에게 중요한 일은 없었다.

당시 문씨 일가의 삶은 마치 통일신라 시대를 사는 고구려의 몰락한 귀족 같았다. 그는 자신의 가족이 정착지를 갖지 못한 사정을 통해 언제나 '잘못된 해방'과 분단을 통탄했다.

사실이 그랬다. 전쟁의 와중에서 문재린 목사가 가족을 이끌고 서울을 빠져나간 것은 1951년 1-4후퇴 때였다. 중공군의 입성을 앞두고 정부에서는 납북될 위험성이 있는 국회의원과 주요 목사 가족을 인천항으로 불러서 배에 실었다. 피난선은 처음에 부산항에 접안할 예정이었으나 여의치 않아 기수를 제주도로 돌렸다. 그 낯선 땅에서의 배고픈 평화를 겪은 게 몇 개월, 전쟁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자 문재린 목사는 또다른 양떼를 찾아 나섰는데 그렇게 도착한 것이 거제도 옥포교회였다.

과거의 권위에 연연치 않고 오직 새로운 신도를 찾아 정진할 뿐인 아버지의 유산을 문익환은 수시로 승계받았다. 어떤 유산은 그것이 훗날 무슨 의미를 띠게 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문익환의 것이 되었다. 가령, 후에 조선소가 들어서는 거제 옥포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신도 중 김영삼씨가 있었는데, 그로 인한 문씨네와 김영삼씨의 인연은 나중에 민추협 시대가 열릴 때 모 신문이 보도했듯이 문동환은 친DJ계 재야인사로 분류되고, 문익환은 친YS계 재야인사로 분류하게 만들었다. 문씨네의 장남으로서 아버지와 맺어진 관계 때문이었다.

어쨌든 문익환이 귀국했을 때 아버지는 을지로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는데, 그 무렵 한국의 기독교는 참혹하게 변질돼 있었다. 전쟁을 겪으면서 그리스도의 정신이 왜곡되어 거의 종교개혁이 필요할 정도였다. 막대하게 쏟아진 서방의 구호물자는 교회의 자립정신을 빼앗고, 교인들로 하여금 남을 도우려는 마음보다 받으려는 생각만 만연케 했다.

또 전쟁의 이름으로 가정이 파괴되고 인명이 훼손당한 수많은 죽음과 상처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같이 예수의 이름으로 병도 고치고 물질적 축복과 정신적 위로도 받자는 기복신앙에 사로잡혀 깨어날 줄 몰랐다. 게다가 북측 정권의 탄압을 피해 대거 남하한 기독교 세력이 이승만 정권과 연대하면서 반공은 열심히 외치면서 다른 사회 문제에는 기형적으로 무관심했다. 이러한 시기에 오직 양떼만 위하며 살아온 아버지에게 문익환은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올렸다.

그리스도의 길을 잃은 한국의 기독교에 문익환은 격앙되고 도발적인 태도를 가졌지만 그의 도전성은 천부적인 부드러움 때문에 언제나 은폐되었다. 그 가득한 불만을 사람들로 하여금 못 읽게 만드는 것은 역시 용모였을 것이다. 오랫동안 내면세계에 틀어박혀 살았던 그의 용모는 많은 사람을 경탄시켰다. 그는 마음의 빛이 꺼진 듯한 어둠 속에 살면서도 숲에서 죽어가는 한 마리 새처럼 절대로 타인의 영토를 넘보지 않았다.

남 앞에서는 늘 세련된 예절을 지켰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의견만을 주장하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인간적인 소통을 중시하는 것은 그가 오랫동안 훈련해온 삶의 방식이자 문화였으니, 그는 가능한 한 그림자처럼 머물며 누구에게든 자신의 빛을 투영하도록 노력할 뿐이었다. 그럴 때 그의 마음이 어떤 상태였는지는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숭덕교회 청년회에서 한 설교'가 증명한다.

"주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어둠의 자식들이던 우리가 이미 빛의 자녀로서 세상의 빛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하기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셨습니다. (...) 이미 우리가 빛이라 할 것 같으면 빛이 되려는 부자연스런 노력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빛은 스스로 어둠을 몰아낼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익환 평전]문재린 목사에 세례 받은 YS

"내가 1956년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하여 문익환 교수에 대하여 처음 받은 인상은 지극히 여성적이고 문약(文弱)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해맑은 용모와 가냘픈 몸매도 그러했고 마음도 그러했다."(이해동, [꿈의 사람, 믿음의 사람])

이렇게 보호본능을 자극하면서도, 모던하고 신세대적이며 낭만적인, 그리하여 전쟁을 겪고 오직 황폐한 것만 체험해온 젊은이에게 인기 있을 여건을 모두 갖춘 그였지만, 학교에 나가자 그는 금방 매력없는 별명을 얻고 말았다. 사관생도처럼 찬바람을 일으키며 다닌다고 해서 "문익환!"이 신경질적으로 문이 닫히는 소리 "문이 쾅!"이 되어버린 것이다.

학생에게 그의 성격이 매우 까다로운 것으로 이해되었을 것은 당연했다. 잘 생기고 눈물이 많으며 인정이 헤펐지만 깎아지른 원칙과 엄격성으로 인해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이미지 때문이었다. 사실 학생의 반응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만성 비염 때문에 그가 복도에 나타나면 벌써 킁킁거리는 소리가 낭하를 따라 길게 울렸다. 학사과장을 맡았는데 납부금이 하루만 늦어도 등록이 안 되었으며, 구약이나 히브리어 한 과목 때문에 낙제하는 경우도 흔했다. 인기가 있을 수가 없었다.

문익환이 가르치는 구약과 히브리어 그리고 작문에서 "베리 굿"을 받기는 굉장히 어려웠다. 특히 그의 히브리어 수업은 교육의 엄격성 때문에 많은 학생이 탈락하고, 또 그로 인하여 인식이 부족한 나이 어린 신학생은 히브리어 교육을 기피하는 현상까지 생겼다. 그 독특하고 특유한 수업 방식을 알려면 김이곤의 [늦봄 문익환 목사의 구약 성서 신학]을 참고해야 할 것이다. 그에 의하면 문익환은 우선, 전통적인 문법의 액센트 체계에 따라 리듬을 맞춘 읽기 연습을 강조했다.

유대교 회당 예배에서 사용하는 리듬을 가르치는 그런 본격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몇 가지 주요 액센트를 유념하게 했고 특히 중간 휴지와 마지막 휴지를 살리는 독음(讀音)을 강조하였다. 말하자면 한 자 한 자 겨우 더듬거리며 읽어가는 것은 질색이어서 호된 질책이 따랐다. 또한 문익환의 히브리어 교육은 외국 문법책을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토착적인 문법을 적용하려 하였다. 예컨대 히브리어 자음-모음의 음역 또는 문법 용어를 모두 최현배 선생의 우리말본처럼 순수 한국 음역과 문법 용어로 바꾸었던 것이다.

이렇게 어려운 방식으로 문익환은 동사의 불규칙동사는 물론이고 규칙 형태도 다 가르치지 않은 채 학기를 끝내곤 하였지만, 그럼에도 그런 학생에게조차 원전 읽기를 요구하였다. 3분의 2는 더 남은 부분을 미뤄둔 채 원전을 읽자는 데는 그 나름의 지론이 있었다. 즉 못다 배운 문법의 틀은 학생이 자습하면 되는 것이고 히브리어의 지식은 히브리어의 '형태소'에 관한 관찰에 숙달되면 문제없이 난관을 헤쳐갈 수 있다는 것이 지론이었다. 뿐만 아니라 구약학의 가장 기초적인 과제를 수행한 '구약개론서'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비평은 당시의 구약학 전반에 대한 그의 해박하고도 정확한 지식을 크게 시위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것은 시위였다. 그의 구약학 수준이야말로 당대 한국의 학계를 석권하는 내공이 있었다.

김형수〈소설가-중앙대 예술대학원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