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연애 사회] 안전 찾는 청년 여성들, ‘비연애’ ‘비결혼’의 흐름 확산
과도한 젠더 갈등 담론 속 페미니즘 불신…건강한 관계 맺기 논의해야
청춘의 사랑과 불안을 그린 영화 <만약에 우리> 한 장면. (본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 없습니다.) 쇼박스 제공
청년들의 연애가 사라진 이유를 생각할 때 페미니즘을 빼놓을 수 없다. 2016년 페미니즘 리부트(재부흥) 현상과 함께 여성들은 ‘4B’를 외쳤다. 가부장 중심의 가족을 유지하기 위한 연애와 섹스,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며 남성과의 관계가 아닌 여성 스스로의 삶에 대해 목소리를 낸 것이다. 한편 교제폭력, 스토킹 같은 친밀한 관계에서의 성범죄가 반복되면서 여성들은 ‘안전한 관계 맺기’에 불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연애는 더 이상 여성들에게 꼭 해야 하는 것도, 쉽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는 단순히 ‘남성이 싫다’는 것을 넘어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어떻게 평등한 연애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더뎠고, 청년들의 연애는 지나치게 ‘젠더 갈등적’인 측면에서 다뤄졌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대선 출마를 준비하던 2021년 “페미니즘의 정치적 악용이 남녀 간 건전한 교제도 막는다. 페미니즘도 건강한 페미니즘이어야지”라고 발언한 게 대표적이다. ‘무연애 사회’의 원인을 페미니즘으로 돌린 편협한 시각이다. 정치가 경제 양극화, 경쟁체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갈등을 부추기면서 청년 남성들도 페미니즘을 향해 날을 세웠다. 국책 연구기관, 국회의원 등은 단편적인 연애 장려, 4B 금지 대책을 내놓으며 구설에 올랐다.
이대로 괜찮을까. 청년들은 실제 정치성향과 연애, 페미니즘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주간경향은 한국·중국·일본·미국·스페인 등 5개국, 총 8242명 대상의 설문조사를 확보해 분석했다. 한국의 경우 KDIS 이창근 교수 연구팀이 엠브레인에 의뢰해 2024년과 2025년 두 차례 실시한 별도 조사를 추가로 전달 받아 분석했다.
조사 결과에선 한국 청년 여성들이 배우자 선택 때 정치성향을 남성에 비해 1.5~2배 많이 고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청년 남성들은 12·3 불법 계엄에 대한 문제의식이 상대적으로 약했고, 다른 국가에 비해 페미니스트 불신도가 높았다. 전통적 성역할과 남성성 규범에 대해서는 다른 국가에 비해 적게 동의하면서, 동시에 젠더 권력의 문제는 인지한다고 볼 수 있는 단서도 포착됐다. 젠더 갈등 프레임에서 벗어나 청년들의 연애, 관계 맺기를 제대로 논의할 때라는 의견이 나온다.
여러 사람이 걷고 있는 뒤로 한 여성이 홀로 걷고 있다. 이준헌 기자
2030 여성 “다른 정치성향 배우자 안 돼”
이번 조사에선 먼저 ‘나와 다른 정치성향의 사람을 배우자로 삼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2025년 조사에서는 46.8%가 ‘아니오’라고 답했다. 2024년 조사(32.6%) 때보다 14.2%포인트 늘어난 수치다. 다른 정치성향의 사람을 ‘친구’로 삼을 수 없다는 답변 비율은 배우자보다는 낮았지만, 2024년보다 2025년에 늘어난 점은 같았다. 2024년엔 13.1%만 다른 정치성향의 사람은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했지만, 2025년엔 약 2배 증가한 26.6%가 그렇게 답했다.
이는 극심한 정치 양극화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두 조사 사이에는 12·3 불법 계엄이 있었다. 계엄 이후 광장에선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 촉구 집회가 열리는 한편, 윤 어게인과 같은 극우 세력이 집단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일상의 관계에서도 정치성향 일치가 필요해졌다. 20대 여성 A씨의 경험은 하나의 예다. A씨는 스타벅스의 ‘5·18 탱크데이’ 프로모션 논란이 불거진 지 얼마 안 돼 소개팅을 했는데 상대방으로부터 스타벅스에 가자는 말을 듣고 마음이 식는 것을 느꼈다. A씨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다르면 만나기가 힘든 것 같다”고 했다. SNS에선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 이후 올림픽공원 시위 현장에서 청년들이 연애 대상을 찾거나 커플이 된 일이 회자하기도 했다.
눈에 띄는 점은 청년 여성과 남성의 답변 차이다. 2025년 조사를 기준으로 20대 여성은 66.7%, 30대 여성은 60.8%가 다른 정치성향의 사람을 배우자로 삼을 수 없다고 답변했다. 20대 남성(38.9%)보다 1.7배, 30대 남성(38.8%)보다 1.5배 높은 비율이다. 청년 여성들이 정치성향이 일치하는지를 더 민감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 2024년 조사에서도 2030 미혼 여성이 정치성향과 다른 사람과 결혼할 수 없다고 답변한 비율은 52%로 남성(25%)보다 약 2배 많았다.
12·3 불법 계엄에 대한 공감도에서 남녀 간 차이는 더 선명하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 선포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말에 공감한다는 답변 비율이 20대 여성은 19%, 30대 여성은 19.9%에 불과했다. 반면 20대 남성은 32.9%, 30대 남성은 31.4%가 공감한다고 답했다. 격차가 각각 13.9%포인트, 11.5%포인트로 40·50대의 남녀 간 격차(4.8%·2.3%)보다 훨씬 높았다. 20·30대 남성의 계엄에 대한 공감도는 60대와도 비슷했다. 공정·능력주의 담론에 이어 계엄을 거치면서 청년 남성들이 보수화·극단화되고 있다는 세간의 분석을 어느 정도 뒷받침하는 통계로 볼 수 있다.
결혼에 의구심을 갖는 여성 일러스트. 이아름 기자
잇따른 교제폭력에 연애 때도 안전 확보
청년 여성들이 배우자 선택에 중요하다고 본 정치성향은 페미니즘에 대한 태도와 관련이 있다. 최근 10년간 정부 정책과 정치 영역에서 성평등은 주요 이슈였고, 정치 구도로 보면 보수정부·정당(국민의힘)보다는 진보정부·정당(더불어민주당)이 상대적으로 성평등 의제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른바 ‘우파 페미’ 개념이 등장하긴 했지만, 극우보수 청년을 대표하는 성별 이미지는 남성이다. 서울서부지법 폭동, 혐중 시위 등에서는 폭력성, 약자에 대한 공격성이 논란이었다.
김연웅 남다른성교육연구소 총괄사업국장은 “여성에게 연애나 관계 맺기의 영역에서 가장 어렵고 위협이 되는 것은 여전히 안전의 문제”라며 “본인을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회) 구성원을 조롱하는 정치성향을 가진 남성은 안전하지 않은 행동을 한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페미니스트인 20대 여성 B씨는 “외모보다 더 보는 건 사실 정치성향”이라며 “다른 게 다 괜찮아도 나와 페미니즘 이야기를 아예 못 하면 그런 사람과는 만날 수 없다. 일상을 공유하기 어렵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감대가 없는 느낌”이라고 했다. B씨는 극우적 정치성향에 대해 “온건한 가부장이라 오히려 ‘여자들을 지켜줘야 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여성이나 소수자에게 함부로 혹은 자기도 모르게 비하, 혐오 표현을 쓸 것 같다”며 안전하지 않다고 느낀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 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 남성의 페미니스트 불신은 한국, 중국, 스페인, 일본, 미국 5개국 중 가장 심했다. 5점 척도(점수가 낮을수록 불신)로 물었을 때 한국 남성은 1.95점으로 미국(2.85점), 중국(2.36점), 스페인(2.3점), 일본(2.23점) 남성들보다 낮았다. ‘매우 불신’ 비율만 따져보면 한국 남성이 42.1%로 5개국 중 가장 높았다. 미국(17.3%)보다는 무려 24.8%포인트, 중국 남성(28.9%)보다 매우 불신 비율이 높았다.
구체적으로 ‘여성은 공정한 경쟁에서 패배했을 때도 성차별이라고 주장한다’는 문장에 대해 한국 남성의 동의율은 3.61점(점수가 높을수록 동의)으로 5개국 중 가장 높았다. ‘여성은 친절한 배려를 성차별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문장에 대해서도 한국 남성의 동의율은 3.37점으로 5개국 중 가장 높았다. 두 문장은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와 역차별 정서를 담은 것으로 온라인 커뮤니티, 정치권을 통해 확대 재생산돼왔다. 두 문장에 대한 동의율의 남녀 간 격차는 5개국 중 한국이 가장 컸다. 연애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결혼 이미지. 경향신문 자료사진
페미니즘 불신하지만 젠더 권력은 인지
특이한 부분은 ‘권력을 지닌 남성들은 여성을 성희롱하는 경향이 있다’는 문장에 대해 한국 남성의 동의율은 3.41점으로 5개국 중 가장 높았다는 점이다. 한국 여성(3.56점)의 동의율과 비교했을 때 격차가 0.15점으로 남녀 간 인식의 차이가 사실상 없었다. 세대를 쪼개봐도 해당 문장에 대한 20대 한국 남성(3.32점)과 30대 한국 남성(3.37점)의 동의율은 다른 국가들보다 높았다. 이는 청년 남성 집단이 페미니즘을 불신하는 것과 별개로 기성세대에 공유돼온 가부장적 혹은 유해한 남성성, 젠더 권력의 문제를 잘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단서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이번 조사에서 한국 남성들의 전통적 성역할과 남성성에 대한 인식은 다른 국가들보다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남자 일은 돈벌이, 여자 일은 가정’이라는 문장, ‘남자는 감정을 통제해야 한다’는 문장에 대해 한국 남성의 동의율은 5개국 중 4위에 그쳤다.
미혼인 한국 남성의 페미니스트 신뢰도(1.8점·점수가 낮을수록 불신)가 기혼인 한국 남성(2.09점)보다 낮은 것도 볼 수 있다. 페미니스트 신뢰도의 남녀간 격차도 기혼일 땐 0.28점에서 미혼일 때 0.85점으로 3배였다. 청년 남성의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 태도가 연애 횟수에 따라 유의미한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페미니즘에 부정적인 비율이 연애 횟수 0회는 68.1%, 5회 이상은 74.4%였다. 연애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청년 남성들이 페미니즘에 적대적이 된다기보다는, 현실에서 여성과 직접 가족 구성 등으로 교류하지 않은 경우 온라인 커뮤니티, 정치권에서 형성된 반페미니즘 정서를 수용한 것 아닌가 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청년 남성들이 주로 온라인에서 페미니스트에 대한 부정적 정보를 접하지만, 이를 현실 속 주변 여성들과는 다른 존재로 구분한다는 연구(논문 ‘20대 남성의 젠더 의식과 연애 경험 연구’)도 비슷한 취지다.
바뀌지 않는 가부장제와 성차별적 문화로 인해 일각에선 ‘이성애 비관주의’가 나타났다. 다른 쪽에선 페미니즘과 함께 건강한 관계 맺기를 고민하는 흐름도 있다. 지난 6월 출간된 책 <이제 진짜 남자 안 만날 거야>는 이성애자 페미니스트의 욕구와 딜레마를 숨기지 않고 이야기한다. 임국희 여성학 연구자는 2024년 심층 인터뷰를 통해 청년 여성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고 짚어냈다. 다만 가부장제에서 여성의 생애가 가족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노동 중심으로 바뀐 차이가 있다. 임 연구자는 논문 ‘한국의 청년 세대 여성에게 사랑은 왜 어려운가?’에서 “오늘날 청년 세대 여성들은 ‘사랑하기’의 소망을 버린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기’를 원하고 있다”며 “그 소망의 중심에는 가족 제도나 근대적 성역할 규범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 자아에 대한 상호인정이 가능한 관계 맺기에 대한 욕구가 자리 잡고 있다”고 했다.
김연웅 국장은 청년 남성의 반페미니즘 정서를 일반화하거나, 젠더 갈등이라는 피상적 차원에서만 다룰 게 아니라 구조적 차원에서 살펴보고 대안적 남성성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 국장은 “2030 남성들이 또래 여성에 대해 감정이 나쁘다는 것은 과대 대표된 의견”이라며 “그것보다는 아버지 세대의 남성들이 잘못됐다는 감정이 더 크다. ‘난 저들과 달라’, ‘난 저렇게 성희롱하는 사람 아니야’ 하고 살아가는 게 청년 세대인데 너무 쉽게 젠더 갈등이나 극우로 규정하거나 구분짓는다”고 했다. 김 국장은 “문제는 대안적인 남성성이 무엇인지를 안 알려줬다는 점”이라며 “맨 박스(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성)에서 벗어나도 괜찮고, 네가 힘든 것은 너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성의 문제라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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