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로 생성한 이미지. 김우재 제공
1945년 7월,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부름을 받은 바네바 부시는 보고서 ‘과학, 끝없는 개척지’를 트루먼에게 제출했다. 그리고 81년 뒤인 2026년 7월, 도널드 트럼프의 부름을 받은 마이클 크라치오스가 ‘과학, 새로운 황금시대’를 내놓았다. 뒤의 보고서는 앞의 보고서를 거듭 인용하며 부시의 문장을 자기 논리의 주춧돌로 삼는다. 하지만 81년 사이, 과학을 형용하는 동사가 바뀌었다. ‘생각하다’에서 ‘만들다’로. 이 한 단어의 교체 안에, 나는 이 두 보고서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선형 모델의 죽음
새 보고서의 진단은 선명하다. ‘선형 모델은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기초연구에서 응용연구로, 다시 개발과 산업으로 흐른다는 부시의 파이프라인은 이제 낡았다는 것이다. 발견은 기초와 응용 사이를 오가는 반복적 고리이며, 스톡스가 말한 ‘파스퇴르의 사분면’이 오늘의 개척지를 정의한다고 보고서는 말한다.
여기까지는 옳다. 선형 모델은 1945년에도 이미 단순화였고, 스톡스의 교정은 정당하다. 부시 자신도 순수와 응용의 경계가 “고정된 것은 아니”라고 썼다. 문제는 새 보고서가 선형 모델을 버리면서 함께 버린 것이다. 부시의 진짜 통찰은 순서가 아니라 보호였다.
부시는 ‘끝없는 개척지’에 이렇게 썼다. “기초연구는 실용적 목적에 대한 고려 없이 수행된다.” 그리고 그가 ‘심술궂은 법칙’이라 이름 붙인 경고가 이어진다. “즉각적 결과를 향한 압력 아래, 이를 막을 신중한 정책이 없다면, 응용연구는 반드시 순수연구를 몰아낸다.” 대학과 연구소는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결과에 대한 압력에서 가장 자유로운 환경”이어야 하며, 과학의 진보는 “자유로운 지성이 스스로 택한 주제를, 미지를 향한 호기심이 이끄는 방식으로 탐구하는 자유로운 활동”에서 온다고 그는 못 박았다.
두 보고서의 어휘를 나란히 놓으면 차이는 더 또렷해진다. 부시의 문서를 지배하는 낱말은 자유, 호기심, 미지였다. 새 보고서를 지배하는 낱말은 우위, 안보, 생산성, 성과 그리고 ‘국가적 성격’이다. 부시가 과학 진보의 엔진으로 지목한 ‘호기심’이라는 단어는 새 보고서를 관통하는 가치의 지위를 잃는다. 낱말은 정책보다 정직하다. 무엇을 자주 말하는지가 곧 무엇을 지키려는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진단은 옳고 처방은 틀렸다
그렇다고 이 보고서를 낡은 이상주의로 반박할 수는 없다. 오히려 5장에서 보고서가 오늘의 과학출판을 해부하는 대목은, 망가진 과학출판생태계에 대한 정당한 비판으로 읽힌다. 학술지는 인위적 희소성을 만들어 협력보다 비밀을 보상하고, 소수의 익명 심사자가 무엇이 정당한 과학인지를 정한다. 논문이라는 형식은 정직한 연구 과정보다 매끄러운 서사를 보상하며, 부정적인 결과와 실패한 실험, 방법의 진실은 좀처럼 활자가 되지 못한다. 임팩트팩터와 인용 지수는 굿하트의 법칙에 걸려 조작 가능한 표적으로 전락한다. 보고서는 정확히 과학의 오염된 생태계를 직시하고 있다.
진단은 옳다. 문제는 처방이다. 보고서는 생산의 논리에 병든 과학을 더 순수한 생산으로 치료하려 한다. 인간 논문 공장을 AI 논문 공장으로 바꾸고, 임팩트팩터를 블록체인 크레딧 토큰으로, 위원회 심사를 에이전트들의 입찰로 대체한다. ‘10년 안에 미국 과학의 생산성을 두 배로’라는 제네시스 미션의 구호, 자율 실험실이 발견의 시간표를 ‘한 자릿수 규모로 압축한다’는 약속, 현상금과 예측시장과 자율분산조직(DAO)이 연구비를 배분하는 ‘에이전트 기반 과학 경제.’ 이 모든 것은 발견으로의 귀환이 아니라 생산의 완성이다. 생산이 부른 병을 더 많은 생산으로 다스리려는 동종요법이다.
가장 서늘한 대목은 신뢰에 관한 것이다. 보고서는 과학적 협력의 오랜 모델인 “명성과 근접성에 기대던 작고 신뢰에 기반한 네트워크”를 형식 검증으로 대체하면 “개인적 신뢰를 넘어 협력을 확장”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이 문장 앞에서 오래 멈췄다. 모건의 방에서 브리지스가 그린 침샘 염색체 지도, 데메렉이 문을 활짝 열어둔 초파리 계통 보관소, 계통을 청하면 계통으로 답하던 그 증여의 경제—그것의 실체가 바로 신뢰였다. 보고서는 과학의 도덕 경제에서 신뢰라는 물질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암호학적 검증을 놓자고 제안한다. 이것은 마지막 공유지의 인클로저다.
백악관 홈페이지에 게재된 마이클 크라치오스의 청사진 ‘과학, 새로운 황금시대’ 홍보 문구. 김우재 제공
‘As We May Build’, 혹은 이해를 포기한 과학
부시가 ‘끝없는 개척지’와 함께 발표한 ‘As We May Think’(생각하는 방식대로)는 1대의 기계를 상상하는 글이었다. 바로 메멕스(memex·연구보조시스템). 한 인간이 자신의 모든 책과 기록과 소통을 저장하고, 놀라운 속도로 연결해 불러내는 “기억의 확장된 친밀한 보완물”. 부시가 이 기계를 꿈꾼 이유는 분명했다. 연구의 산은 자꾸 높아지는데, 전문화가 깊어질수록 탐구자는 오히려 수렁에 빠진다. 부시에게 과학의 병목은 생산량이 아니라 이해였다. 메멕스는 늘어나는 지식을 한 인간의 정신이 계속 이해할 수 있도록 붙들어 두려는 도구였다.
새 보고서의 마지막 장은 그 제목을 ‘As We May Build’(만드는 방식대로)로 고쳐 쓴다. 그리고 그 장은 이렇게 끝난다. 우리 세대의 과제는 “역사상 그 어떤 것보다 크고, 빠르며, 개별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과학 기업을 설계하는 일”이라고. 나는 이 문장이 발견의 묘비명이라고 생각한다. 부시가 메멕스로 지키려 했던 바로 그것(과학이 한 인간의 머릿속에 들어올 수 있다는 조건)을 새 보고서는 포기하려 한다. 과학이 ‘개별적으로 이해 불가능’해지는 순간, 그것은 부시적 의미의 발견이기를 멈추고 순수한 생산이 된다.
언젠가 나는 “과학은 자동화되지 않는다”고 썼다. 그 말을 여기서 다시 꺼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오해를 막기 위해 밝혀둔다. 나는 AI를 거부하는 사람이 아니다. 지난해 우리 실험실은 AI로 설계한 펩타이드 ‘PAN4’를 발표했고, 나는 지금도 알파폴드(단백질 구조를 예측하는 AI)로 초파리의 수용체를 스크리닝한다. 도구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 도구가 무엇을 위한 것이냐의 문제다. 그 펩타이드가 파리의 신경계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었는가, 아니면 그저 작동하는가. 보고서는 결코 앞의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발견은 이해를 남기고, 생산은 제품을 남긴다.
부시의 개척지가 끝이 없었던 이유는, 호기심에는 시장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황금시대는 언젠가 끝난다. 금은 세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초파리 방을 생각한다. 산업화하지 않는 작은 방, 발견이 아직 이해를 뜻하는 방. 새로운 황금시대의 설계도 어디에도 그 방을 위한 자리는 없다. 그러나 과학이 끝내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나는 그것이 황금이 아니라 그 방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