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 상륙 후 상·하층 시장으로 나뉘며 방송 콘텐츠 생태계 무너져
가장 큰 과제는 이중시장의 완화…구조조정은 하되 연착륙 유도해야
JTBC가 2022년 방영한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포스터. JTBC 제공
‘대한민국의 디즈니’를 꿈꾼 JTBC가 몰락했다. <부부의 세계>, <재벌집 막내아들> 등 여러 히트 상품을 내놨던 JTBC이기에 대중의 충격이 컸다. 경영 부실이 가장 큰 원인이지만, 투자가 메말라버린 방송 콘텐츠 시장의 환경도 원인이 됐다. <오징어게임>으로 대표되는 K콘텐츠가 세계 시장에서 위상을 펼쳤다는 소식을 들은 게 엊그제다. 대체 한국 콘텐츠 생태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상·하층 분리된 이중시장
콘텐츠 생태계는 누가 수익성 높은 상품을 만들어 어떻게 공급하느냐의 문제로 요약된다. 현재 생태계는 해외 소비자를 겨냥한 고가 시장과 국내 소비자를 겨냥한 저가 시장으로 나뉘어 있다. 이는 넷플릭스·디즈니플러스(이하 넷플로 통칭)가 국내 사업자와 경쟁에서 승리해 만들어진 구조다.
넷플은 돈을 더 써서라도 해외 소비자를 붙잡아야 한다. 해외 가입자를 늘리는 게 사업의 핵심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한국 드라마 1회당 30억원씩 투자했다. A급 배우, 작가, 감독은 넷플에 줄을 섰다. 넷플과 손잡으면 높은 수익은 물론 해외 진출 기회까지 얻기 때문이다. 결국 넷플은 K콘텐츠를 활용해 해외 시장을 넓히는 데 성공했다.
반면 지상파·종합편성채널은 콘텐츠를 만들수록 손해를 보게 됐다. 해외 판매망이 탄탄치 않은 방송사는 내수 시장을 중심으로 수익을 얻는다. 국내 방송 광고 시장을 고려하면 드라마 1회의 적정 제작비는 8억원 이하다. 하지만 A급 배우 출연료와 전체 제작단가가 넷플 수준(회당 30억원)으로 오르면서, 방송사는 10억~15억원을 들여 드라마를 만들었다. 해외 흥행에 성공하지 못하면 2억~7억씩 손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방송사는 자체 제작을 줄이고, 재방송을 늘렸다. 예컨대 MBC는 <무빙>, <킬러들의 쇼핑몰> 등 디즈니플러스의 작품을 재방송하기도 했다. 방송사가 해외 OTT의 ‘다시보기 채널’로 전락한 셈이다. 노동렬 성신여대 교수는 “핵심 생산요소(A급 배우·작가·감독)가 자본을 따라 이동하는 것은 창조 산업의 기본적인 속성”이라며 “넷플에 핵심 생산요소가 쏠리면서 방송사는 도태돼가고 있다”고 말했다.
하층 시장은 한계상황에
방송사가 도태되는 상황에 놓이면서 넷플과 손잡지 못한 제작사는 폐업을 고민해야 하는 수준이 됐다. 투자자는 찾기 어려워졌고, 제작단가는 올랐으며 흥행 실패에 대한 리스크는 커졌다. 한 외주 제작사 관계자는 “그나마 자금력 있는 제작사가 자체 제작한 작품을 지상파에서 방송했다가 실패하면서 회사 문을 닫아야 하느냐를 고민하게 됐다”며 “소수의 제작사를 제외하고, 국내 제작 업계는 무너진 상태”라고 말했다.
배우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드라마의 해외 성공 여부는 티켓 파워가 있는 배우의 출연 여부로 결정된다. 그러다 보니 A급 배우의 몸값이 제작비의 절반에 이르게 됐다. 한국방송실연자권리협회 상임이사 유태웅 배우는 “주인공을 제외한 다른 역할은 출연료가 저렴한 신인·연극 배우로 채워진다. 이들은 출연료보다 출연 기회를 얻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라며 “하지만 이들이 촬영을 위해 쓰는 교통·숙박비를 고려하면 손해를 보고 드라마에 출연하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말했다.
방송사에 편성되는 드라마가 줄면서 출연 기회도 줄어들었다. 유 배우는 “과거 주말드라마의 고정 출연자가 25~30명이었지만, 지금은 12명 수준”이라며 “출연 기회가 적어진 배우들은 배달업으로 생계를 이어가거나 업계를 떠나고 있다”고 말했다.
<오징어게임> 시즌 3 포스터. 넷플릭스 제공
작가 업계에서도 빈익빈 부익부가 뚜렷하다. 한 중견작가는 “드라마 한편을 수년 동안 준비해온 작가는 A급 배우의 캐스팅 여부에 따라 자신의 생계가 결정된다”고 말했다. 이 작가는 “넷플에 협상력을 가진 작가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며 “생활고에 시달리는 작가들이 많다”고 말했다. 가령 넷플에 밀린 방송사는 자체 제작한 드라마를 동남아시아 국가에 판매해 수익을 얻어야 하는데, 동남아에서 선호되는 배우가 캐스팅되느냐가 드라마 제작 여부를 결정한다.
일각에서 제작비 상승의 가장 큰 요소인 A급 배우의 출연료를 제한하자는 의견이 나오지만, 실현 가능성은 매우 낮다. A급 배우가 이를 받아들인 유인이 없기 때문이다. 2000년대 중후반 지상파와 제작사가 배우 출연료 상한제를 시행했으나 실패한 바 있다. 당시 A급 배우와 그를 섭외한 제작사가 ‘이면 계약’으로 이를 우회했다. 지금도 A급 배우에게 많은 수익을 낼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단역 배우의 처우 개선을 위해 최저 출연료를 도입하는 방안이 더 현실적이란 평가가 나온다.
상층 시장에선 IP 싸움
상층 시장에선 넷플이 보유한 지식재산권(IP)을 돌려받기 위한 줄다리기가 진행되고 있다. 넷플은 드라마를 제작할 경우 제작사에 제작비 전액과 10% 내외의 이윤을 보장해준다. 그 대신 IP를 넷플이 가진다. 글로벌 판권 수익은 물론 2차 저작물작성권, 스핀오프·리메이크와 같은 파생 콘텐츠, 후속 시즌 제작권이 모두 넷플 소유가 되는 것이다. 반대로 제작사는 추가 이익을 얻지 못한다. 제작사들이 넷플의 하청업체가 됐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업계에선 2016년 한국에 상륙한 넷플에게 IP를 너무 쉽게 내준 것이 패착이었다고 본다. ‘넷플이 돈을 다 대니 IP를 가져야 한다’는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는 것이다. 당시 넷플의 논리에 맞설 만한 제작사나 작가 단체의 힘은 미약했다.
한국감독조합 부대표인 박이웅 감독은 “2023년 미국 할리우드에서 배우·작가 조합은 파업을 통해 글로벌 기업으로부터 추가 보상금을 받을 수 있도록 했고, 프랑스는 아예 법으로 창작자에게 저작권에 대한 일정한 보상을 지급하도록 정해놨다”며 “유독 한국에서만 자본의 논리가 세계 표준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발 한류를 불러왔던 SBS의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포스터. SBS 제공
넷플이 창작자의 활동에 개입하려는 분위기가 강해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박 감독은 “현장에서 감독이나 작가가 대사를 바꾸려면, 넷플 측에 몇개의 보고라인을 거쳐 컨펌을 받아야 한다고 들었다”며 “이것이 창의적인 환경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최정화 영화사 ‘해월’ PD는 “넷플과 창작자 사이에 한쪽으로 힘이 쏠리면서 ‘갑질’이라고 의심받을 만한 일이 생기는 것”이라며 “결국 IP 확보와 자율성 보장 문제는 창작자가 얼마나 협상력을 확보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류 착시’…돈 벌 수 있는 구조 만들어야
사실 콘텐츠 시장의 붕괴는 넷플 탓만이 아니다. A급 배우의 출연료가 높아지고, 방송사가 적자를 보는 구조는 넷플의 상륙 이전부터 있었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당시 유료방송(IPTV·위성방송·케이블TV)의 가입자는 날로 줄어들고 있었고, 광고시장은 2000년대 중반부터 포털 등 온라인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불특정 다수를 향한 방송 광고는 맞춤형 광고를 원하는 광고주에게 매력을 잃었다.
그러나 시장의 토대가 약화되는 것은 쉽게 인식되지 못했다. 2003년 <겨울연가>, 2015년 <별에서 온 그대>를 계기로 각각 일본·중국발 한류가 불었기 때문이다. 국내 콘텐츠 시장이 건강해 일본·중국에서 대규모 자본이 들어오는 것 아니냐는 착시가 생겼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당시 한류는 배용준·김수현·이민호와 같은 A급 배우 팬덤에 기댄 영향이 컸지, 국내 드라마 제작 능력 덕분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콘텐츠 생태계를 되살릴 방법은 무엇일까. 가장 큰 과제는 상·하층으로 나뉜 시장 구조를 완화하는 것이다. 당장 해외 판매망을 확대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웨이브·티빙 같은 국내 OTT들은 해외 판매망을 확보하지 못했으며, 내수 시장에서 영역을 넓히는 데도 한계를 노출했다. 그러다 보니 방송사의 다시보기 채널로 전락했다는 지적을 받는 실정이다.
업계에서는 시장의 구조조정은 피하기 어려우며, 구조조정이 연착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노창희 디지털산업정책연구소장은 “넷플 도입 이전부터 자체 제작은 하지 않고 정부지원금에 기댄 사업자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라며 “시장에서 건강하게 자생할 수 있는 플레이어만 남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 소장은 “넷플과 협력해 K콘텐츠를 발전시키는 방안과 넷플과 독립돼 발전시키는 방안을 동시에 구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부는 K콘텐츠 육성을 위해 6000억원의 자금을 지원하고, 관련 규제를 풀어준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 방안이 이중시장을 완화할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노동렬 교수는 “6000억원이 각 생산자에게 나뉘어 지급되는 방식으로는 충분한 투자가 되지 못하며, 방송사에 중간광고 규제를 풀어준다고 해서 광고주가 광고를 하러 오지는 않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노 교수는 이어 “정상적으로 사업을 해서 돈을 벌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K콘텐츠가 경쟁력을 얻을 수 있다”며 “현재 판을 바꾸지 않는 한 돌파구는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