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강릉 ‘고래책방’에 마련된 강릉테마공간. 남기택 제공
강릉에 사는 고래
문향(文鄕)의 도시로 불리는 강원 강릉에는 다양한 동네서점이 운영되고 있다. 그중 율곡로 중심에 자리한 ‘고래책방’이 눈에 띈다. 이름에 걸맞게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를 뽐낸다. 어딜 가도 주차하기 어려운 도심 현실은 인구 20만 정도인 강릉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이 책방은 건물 정면과 뒷면 부지를 전용 주차장으로 제공한다. 가보자(go), 다시(re)라는 의미의 ‘고래’는 넉넉한 환경을 갖추고 방문객을 재차 부른다.
고래책방은 4층 건물을 단독으로 쓰며 층마다 큐레이션을 달리해 서가가 배치돼 있다. 지하 공간은 강릉 관련 작품으로 꾸몄고, 1층 한 구역에서는 베이커리가 출출한 독자를 유혹한다. 서점에 관한 기본 정보가 자체 제작된 팸플릿을 통해 방문객들에게 제공된다. 세미나실과 갤러리까지 겸비한 고래책방은 독립서점의 위상을 넘어 복합적 문화시설로 기능하고 있다. 문을 연 건 2018년이다. 인터넷서점이나 전자상거래 활성화라는 난관을 딛고 전국 단위로 독립서점이 증가하던 시점이다. 고래책방의 발생 과정에는 서점문화 부흥의 지역적 사명이 담긴 셈이다.
지역서점 활성화에 관한 조례로 2025년 2차 지역서점 심의(2025년 7월)를 통과한 도내 서점은 총 51곳이다. 그중 강릉 소재로는 고래책방 외에 G&GO 말글터, 대지서점, 동아서점, 솔향서점, 책뜰 등이 인증을 받았다. 그 밖에도 독립서점 현황을 정리한 자료에 따르면 강다방이야기공장, 고양이책방 슈뢰딩거, 깨북, 당신의 강릉, 아물다, 윤슬서림, 한낮의 바다 등이 강릉 사례로 기록됐다.* 한편 2026 강릉 책방지기들의 뉴스레터 작업에 함께하는 주체로 명랑한 은둔자, 책뜰 같은 북카페도 보인다. 전통의 영동서적, 신생의 시골책방 자몽, 이스트씨네, 인생서가 등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2010년대 이후 자발적 문화공간으로서 동네서점이 많이 생겨났고, 각자 개성으로 문향의 도시를 채색하는 중이다.
로컬과 트랜스로컬
서점의 모태라 할 출판문화는 이곳 지역사회를 뒷받침해온 중요 동력이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예성시고>(蘂城詩稿)의 존재가 특수한 사례로 발견된다. 한시 작품집인 이 책을 강릉 본정에 있던 매일신보사 분국이 발행, 강릉인쇄소가 인쇄했다. 해방기에도 출판 매체가 존재했다. 동방신문은 강릉 및 주변 지역을 보급 구역으로 삼아 발행됐고, 한국전쟁기에는 강릉일보가 창간됐다. 시 동인지 <청포도>도 남다른 사례다. 강릉사범에 재직 중이던 황금찬과 최인희를 중심으로 김유진, 이인수, 함혜련 등이 함께했던 동인 활동은 1952년 창간호에 이어 이듬해 2호 발간까지 이어졌다.
강릉지역문화지 ‘새벽들’ 창간호(1986).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유신체제 전후 출판문화 사례로는 ‘해륙문화’가 있다. 1972년 3월호로 창간된 ‘해륙문화’는 주문진읍 동문사에서 출판된 것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제반 분야를 다뤘다. 1980년대 민중문화운동의 전국적 활황은 오늘날 독립서점 체재의 기원과 연결된다. 이와 관련해 강릉에서는 무크 ‘새벽들’의 경우가 종요롭다. 1986년 창간된 ‘새벽들’은 진보 성향의 종합지로서 표지에 ‘강릉지역문화지’라는 부제를 달았다. 2호는 1988년에 발간됐다.
강릉 출판문화운동의 흐름 속에서 주목해야 할 특징 중 하나는 지역 경계에 귀속되면서도 이를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동인지 <청포도>의 최인희가 쓴 편집 후기에서 지역문학적 범주 의식은 물론 문단 간 소통 의지를 볼 수 있다. 체재상으로도 1호는 부산 고려인쇄소, 2호는 대구 창조사에서 간행됐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현실이 지역 간 소통을 강제했던 형국이다.
‘새벽들’의 경우 서문에서 중앙으로부터의 소외에 대한 대항과 전체 운동과의 연대 의식을 분명한 언표로 강조했다. 이 또한 매체가 제작된 곳은 서울의 청사출판사였다. 강릉 출신으로 출판문화운동을 전개하던 사장 함영회는 고향에서의 진보적 무크지 태동을 도왔다. 문학란 구성도 특이하다. 창간호에는 홍재경의 서시를 비롯해 시란에 김영현, 김영욱, 나해철, 김홍주, 최수영 등의 작품이 수록됐다. 이들 중 동아일보 신춘문예(1982)로 등단해 시집 <무등에 올라>(1984)를 펴낸 나해철의 이름이 인상적이다. 전남 나주 출신인 그가 당시 강릉에서 군의관으로 복무 중 지역문인들과 활동한 흔적일 것이다. 로컬은 이미 트랜스로컬을 전제하고 있었다.
‘G&GO 말글터’ 독서공간. 남기택 제공
다시 새벽을 열며
지역문화운동이라는 기치 아래 ‘새벽들’이 탄생했던 시대 끝자락에서 서점 ‘G&GO 말글터’의 역사가 시작됐다. 1989년 당시 기존의 서점을 인수한 후 대표적 인문사회과학 책방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고, 지금은 ‘지(知·智), 오(梧)’를 앞세운 말글터로 운영되고 있다. 2021년에는 서점으로 유일하게 중소벤처기업부의 ‘백년가게’에 선정됐다.
이처럼 고래책방이나 말글터 같은 종합서점과 기타 독립서점들이 지역의 문화적 기저로 작동하고 있는 현실은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 그렇지만 한계도 뚜렷하다. 강릉 출판문화운동의 흔적이 학술적으로 전혀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령 1980년대 한국문단을 풍미했던 전국 무크지 운동사 속에 새벽들의 존재는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 이 역시 문화적·지역적 소외의 일면일 것이다.
무인운영 중인 ‘책뜰’ 서가. 남기택 제공
‘새벽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2005년에 복간호가 나왔고, 다시 그만큼의 세월이 흐른 2024년에 4호가 출판됐다. 근 20년 단위로 지속돼온 매체의 운명이 놀랍고도 애처롭다. 3호와 4호 판권란에는 펴낸 곳이 강릉 동녘출판사로 찍혔다. 출판사를 이끈 주체는 ‘새벽들’ 동인으로서 지역문화운동에 헌신하던 중 2025년 타계한 전순표였다. 활동가의 말년은 쓸쓸했고, 그가 운영했던 동녘출판기획은 이제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새벽들’의 극적인 부활은 강릉 문화운동의 청신호일 수 있을까. 달라진 현실과 정세 속에서 서점의 활로가 녹록하지만 않다. 피로한 고래들의 안녕을 위한 푸른 말글터는 결국 독자들과 함께 개방될 것이다. 출현은 긴장을 동반한다. 이를테면 우리가 고래책방 후면 주차장에서 서점으로 입장하려면 호흡을 가다듬을 수밖에 없다. 전면 출입구로 돌아가는 건물 사이가 비좁아 몸을 움츠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 협소한 통로는 강릉 동네서점들이 스스로 주인이어야 할 독자를 부르는 이미지로 보인다. 긴장된 신체로 함께 열어야 할 새벽의 형상이기도 한 듯하다.
* 노영희·이진욱. 책과 사람을 잇는 문화공간: 독립서점의 기록-강원·충청편, 지식콘텐츠연구소 지역문화연구원,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