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적인 폭염에 에어컨 둘러싼 이념 논쟁 새로운 전선으로 떠올라
정치 공방에 정작 기후위기 대응과 기후 불평등 논의는 뒷전 밀려
지난 7월 10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시민들이 선풍기로 더위를 식히고 있다. AFP연합뉴스
유럽이 기록적인 폭염에 신음하고 있다. 사망자가 급증하고 산불과 전력난이 잇따르는 가운데, 정치권에선 ‘에어컨’을 둘러싼 이념 논쟁이 새로운 전선으로 떠올랐다. 냉방 확대를 주장하는 우파는 환경 규제가 사람을 죽이고 있다고 공격하고, 녹색 진영은 무분별한 냉방 확대가 기후위기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고 맞선다. 폭염이라는 재난이 정치 공방의 소재가 된 사이, 정작 기후위기 대응과 사회적 적응 방안을 둘러싼 논의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예년보다 1만명 이상 더 사망했다
올여름 유럽은 기상 관측 이래 가장 이른 시기부터 폭염이 시작됐다. 일부 지역은 기온이 40도를 훌쩍 넘었고, 밤에도 30도 안팎의 열대야가 이어졌다. 도시 곳곳에서는 학교 수업이 중단되고, 철도 운행이 차질을 빚었다. 병원 응급실은 온열질환 환자로 붐볐다.
유럽질병예방통제센터(ECDC)와 세계보건기구(WHO)가 지원하는 사망률 감시망 ‘유로모모(EuroMOMO)’에 따르면 6월 말 유럽에서는 예년 같은 기간보다 1만명 이상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전문가들은 극심한 폭염이 사실상 유일한 설명이라고 보고 있다.
더위를 피해 강과 바다에서 수영하다가 익사하는 사례도 크게 늘었다. 올해 온열질환 사망자가 5100명을 넘어선 독일에서는 지난 6월에만 99명이 익사했다. 이는 기록적인 폭염이 닥쳤던 2003년 이후 가장 많은 수치다. 프랑스에서도 지난 6월 19일 이후 익사로만 13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난 7월 10일(현지시간) 스페인 안달루시아 알메리아주에서 산불로 인한 불길이 치솟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폭염은 자연도 위협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파리 남동쪽 퐁텐블로 숲에서 대형 산불이 발생해 약 1000㏊가 불탔고,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에서는 역대 최악 수준의 산불로 12명이 숨지고 1400여명이 대피했다.
전력망에도 비상이 걸렸다. 냉방 수요가 급증하면서 전력 공급 부담이 커진 데다 가뭄으로 수력발전 효율까지 떨어지면서 에너지 안보 우려도 함께 커지고 있다.
각국은 냉방 쉼터를 늘리고 응급 대응을 강화하고 있지만, 폭염이 장기화하면서 임시방편에 그친다는 지적이 나온다.
낮은 에어컨 보급률, 이유가 있었다
프랑스의 한 상점에 이동식 에어컨이 진열돼 있다. 신화통신
더위가 극에 달하면서 뜻밖에도 에어컨이 쟁점으로 떠올랐다. 내년 대선을 앞둔 프랑스를 비롯해 독일, 벨기에에서 에어컨 보급 확대를 둘러싼 공방이 좌우 진영의 대표적인 정치 의제로 번지고 있다.
이 같은 논쟁은 유럽의 낮은 에어컨 보급률과 맞닿아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지난해 유럽의 가정용 에어컨 보급률은 약 23%에 머물렀다. 2015년(16%)보다 7%포인트 높아졌지만, 같은 기간 중국이 53%에서 79%로 크게 늘어난 것과 비교하면 증가 속도는 더디다. 일본(93%)과 미국(90%)처럼 대부분의 가정에 에어컨이 보급된 국가와도 큰 차이를 보인다.
낮은 보급률에는 역사적·제도적 배경이 있다. 유럽연합(EU) 주택의 약 40%는 1945년 이전에 지어진 건물로, 상당수가 외관 보존 규제를 받는다. 2000년 이후 지어진 주택 비중은 10~12% 수준으로 한국(60% 이상), 미국(40% 이상)보다 훨씬 낮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 등에서는 에어컨 실외기 설치가 건축물 외관 변경으로 간주돼 행정 허가가 필요하고, 문화유산 보호구역에서는 별도 심사를 거쳐야 한다.
여기에 오랫동안 형성된 환경 의식도 영향을 미쳤다. 유럽의 녹색 진영은 전력 소비와 온실가스 배출, 냉매 누출, 도시 열섬 현상 등을 이유로 에어컨 확대에 신중한 태도를 유지해왔다. 자연 환기와 단열, 차양 설치를 우선하는 것이 유럽식 폭염 대응의 기본 원칙이었다.
재난이 만든 정치 전선
그러나 기록적인 폭염이 반복되면서 이런 인식도 흔들리고 있다. 학교와 병원 등 공공시설마저 정상 운영이 어려워지자 에어컨을 생명을 지키는 공공 인프라로 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프랑스 녹색당 대표 마린 톤들리에도 최근 “일부 시설은 이제 에어컨 없이 운영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제한적인 냉방 확대 필요성을 인정했다.
반면 우파와 극우 진영은 폭염을 환경정책 실패의 상징으로 적극 활용한다. 프랑스 극우 국민연합(RN)의 마린 르펜 의원은 대통령에 당선되면 학교, 병원 등을 중심으로 대규모 에어컨 설치를 추진하겠다고 공약했다. RN의 장필리프 탕기 의원은 “2003년 폭염 이후 전국적인 냉방 계획이 마련됐어야 했다”며 “에어컨 사용은 좌파가 오랫동안 만들어온 이념적 금기”라고 말했다. 급기야 SNS에서는 “여름에 부채를 쓰면 녹색당, 에어컨을 쓰면 극우인가”라는 풍자가 확산했고, 에어컨 실외기에 히틀러 얼굴을 합성한 이미지까지 등장했다.
독일에서도 지지율 선두를 달리는 극우 정당 독일대안당(AfD)은 “‘기후 히스테리’가 에어컨 설치를 막아 폭염 사망자를 늘렸다”고 주장했다. 벨기에에서는 좌파 성향 지방정부가 “최고의 에어컨은 나무”라며 도시 녹화 정책을 강조하자 우파 정치권이 “비과학적인 환경주의”라고 맞받았다.
논쟁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도 번졌다. 일론 머스크가 공유해 2000만회 이상 조회된 AI 게시물은 “유럽인들은 그냥 에어컨을 설치해야 한다. 미국식 여름나기가 처음부터 옳았다”는 내용이 담겼다. 보수 성향 코미디언 에린 웩슬러도 “유럽의 폭염은 미국의 총기 폭력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다”며 유럽의 냉방 정책을 비꼬는 영상을 올렸다.
이에 오드레 퓔바르 파리 부시장은 “미국인들은 파리에 에어컨이 없다고 비웃지만, 세계 2위 온실가스 배출국인 미국도 지구온난화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반박했다.
‘에어컨 정치’에 가려진 기후위기
이른 폭염이 닥친 지난 5월 23일(현지시간) 스페인 마드리드의 한 아파트 건물 외벽에 에어컨 실외기가 설치돼 있다. GettyImages/이매진스
전문가들은 에어컨을 둘러싼 찬반 논쟁이 정작 폭염의 근본 원인인 기후위기 대응을 가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IEA에 따르면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2024년 378억t에서 지난해 384억t으로 늘어나며 역대 최고치를 다시 경신했다. 증가율은 둔화했지만 절대 배출량은 여전히 상승세다.
파리기후협정 목표 달성도 멀어지고 있다.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은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 평균기온 상승폭을 1.5도로 제한하겠다는 목표가 사실상 달성 불가능한 수준에 가까워졌다고 평가했다. 현재 각국이 제출한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를 모두 이행하더라도 세기말 지구 평균기온은 2.3~2.5도 상승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기후 차별 역시 논쟁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다. 이번 유럽 폭염으로 발생한 초과 사망자 1만여명 가운데 9000명 이상이 65세 이상 고령층인 것으로 집계됐다. 영국 BBC는 “냉방시설을 갖춘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실내 노동자와 야외 노동자 사이의 ‘냉방 격차’가 기후위기 시대의 새로운 불평등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짚었다.
탄소 배출의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지에 대한 논의도 정치 공방 속에 가려졌다. 법학자이자 <실천하는 생태 정의를 위하여>의 저자 크리스텔 쿠르닐은 프랑스 일간 르몽드에 “기후변화 적응은 환경정책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과 사회 정의의 문제”라며 “기후위기의 비용은 대부분 납세자와 공공 예산이 부담하는 반면, 기업들은 위험을 알고도 수십년 동안 막대한 이익을 얻어왔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