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연재한 기행문으로 ‘바로 보는 미국사’ 출간한 손호철 명예교수 인터뷰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지난 6월 29일 주간경향과 인터뷰하고 있다. 김정근 선임기자
미국은 지난 7월 4일 건국 250주년을 맞았다. 영국의 지배를 받던 북미 식민지 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채택한 날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역사상 가장 화려한 생일 파티를 하겠다”고 공언했고, 미국 영토와 주를 소개하는 박람회와 86만발의 폭죽을 쏘는 역대 최대 규모의 불꽃놀이가 기획됐다. 백악관 잔디밭에서 격투기 대회가, 내셔널 몰 주변에서는 자동차 경주 대회가 열렸다.
트럼프는 백악관 주도의 조직인 ‘자유(Freedom) 250’을 신설해 행사를 보수 기독교 색채가 강하게 바꿨다. 단합의 자리였던 독립기념일은 이념 대결의 장으로 바뀌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념일 연설에서 ‘멸공’을 외쳤고, 백인 우월주의 단체 회원들은 노예제를 지지한 과거 남부 연합 깃발을 들고 도심을 행진했다.
관용과 자유의 나라 미국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어떻게 트럼프 같은 정치인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정치학자인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는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 미국 역사 기행에 나섰다. 2024년 9월 1일부터 60일간 원주민 전사 ‘크레이지 호스’의 조각상이 조성되는 러시모어산, 원주민 학살 현장인 운디드니 등 역사의 현장을 찾았다.
주간경향에 연재한 기행문은 건국 250주년 기념일에 맞춰 <바로 보는 미국사>(이매진)라는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트럼프주의의 역사적 뿌리와 자유·인권의 역사 뒤에 숨은 인종주의를 드러내는 묵직한 내용이지만 보통의 여행서보다 흥미진진하다.
손 교수는 지난 6월 29일 주간경향과 만나 “원주민 등 사회적 약자와 약소국에 미국사는 ‘자유 250년’이 아니라 ‘학살 250년’에 다름없다”면서 “트럼프는 결코 돌출적 인물이 아니라 백인 우월주의가 낳은 가장 미국적 인물이다”고 말했다. 제국의 특징인 개방성과 관용의 쇠퇴는 미국 패권이 황혼기에 들어섰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미국이 고립주의 노선으로 돌아서는 상황에서 한국 역시 중장기적으로 영세중립국화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다음은 일문일답.
“제국의 특징인 개방성과 관용의 쇠퇴는 미국 패권이 황혼기에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또 미국이 고립주의 노선으로 돌아서는 상황에서 한국도 중장기적으로 영세중립국화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미국 역사 답사의 계기는.
“미국에서 1980년대 석·박사를 하며 7년 반, 2000년 안식년으로 1년 등 8년 반을 살면서 미국 보수화의 큰 틀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2022년 트럼프의 대선 패배 불복과 의회 공격을 보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충격을 받았다. 트럼프를 만든 미국의 토양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디를 가야 미국을 제대로 볼 수 있을지 여러 책을 보며 고민했다.”
-준비하면서 가장 크게 도움이 됐던 책은?
“장 보드리야르가 쓴 <아메리카> 책이 조금 충격적이었다. 가장 미국적인 게 뭐냐는 물음에 ‘데스밸리’, 아무것도 없는 그 빈 곳이라고 했다. 유럽의 도시가 역사로 꽉 차 있다면, 미국의 특징은 ‘비어 있음’으로, 역사가 없는 신생국이라는 의미다. 사실 굉장히 서구 중심적인 생각이다. 그 속에는 우리가 ‘인디언’이라고 잘못 부르는, 즉 아메리카 원주민의 수많은 역사가 들어 있다. 서구적 역사가 없을 따름이다. 리틀 빅혼 전투의 원주민 전사인 크레이지 호스의 전기도 보고, 시민운동의 루트를 안내하는 책도 봤다. 완벽하게 동선을 짜도, 자료를 읽다 보면 가봐야 할 새로운 역사적 장소가 계속 튀어나왔다. 그러면 동선을 또 전면 수정했다. 실제 여행 기간은 두 달이었지만, 책을 읽고 답사를 기획하며 준비한 기간은 꼬박 2년이 걸렸다.”
-원주민 학살, 멕시코와의 전쟁 등 미국에서 평화는 거의 예외적 상태였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미국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가 했다는 게 중요하다. 트럼프에게 ‘미국은 역사상 가장 호전적인 나라’라면서 ‘이런 현실을 바꿔야 한다’고 충고했다.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선언으로 민주주의에 불멸의 공헌을 한 게 미국 독립선언문이고, 미국 역사다. 그러나 그 뒤에 노예제와 원주민 학살이라는 유례없는 역사가 있다. 리치먼드의 전쟁박물관에 ‘이전까지 노예는 대부분 전쟁이나 빚으로 생겼는데, 미국의 노예제는 전적으로 인종주의에 기초해 있다. 이런 노예제는 세상에 미국 외에 전무후무하다’라고 쓰여 있다. 인디언이라는 말은 콜럼버스가 이 대륙을 인도라고 착각해서 붙인 모욕적인 용어다.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이라 불러야 한다. 흔히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얘기하지만, 최대의 홀로코스트는 아메리카 홀로코스트다. 최대 1억명으로 추정되는 원주민이 몇백만명 수준으로 줄어들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죽었다. 국내적으로는 억압, 대외적으로는 전쟁의 역사에 기초한 것이 바로 미국의 자유이고 문명이다. 미국이 잘나갈 때 눌려 있던 인종주의가 패권 쇠퇴와 함께 전면으로 부상했고, 트럼프도 거기서 나왔다.”
-트럼프는 미국 역사가 만들어낸 가장 미국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트럼프주의는 트럼프 개인의 성격적 특징에도 기인하지만 다니면서 느낀 건 트럼프가 미국 역사에 가장 깊이 뿌리내린 미국적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가는 데마다 트럼프가 보였다. 원주민 학살과 강제이주에서, 아프리카 노예 시장에서 트럼프를 봤다. 백인 우월주의 단체 KKK를 보면 1920년대 트럼프가 보인다. 그 뿌리는 결국 백인 우월 인종주의다. 두 번째로 중요한 건 이른바 ‘명백한 운명’론, 먼로주의다. 미국이 라틴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하화고 계몽할 하나님의 뜻을 받았다는 선민의식이다. 미국이 옳다고 생각하는 걸 강요하는 것이다. 그다음 결국 트럼프주의를 끌고 온 건 클린턴 전 대통령이다. 클린턴의 과잉 세계화로 금융 자본과 IT 자본은 배를 채웠지만, 철강·자동차 같은 경쟁력 없는 자본은 다 망했다. 과거 미국 최대 산업 지역이던 중북부 오하이오, 시카고 등은 러스트 벨트가 됐다. 세계화의 패배자가 된 백인 노동자가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이 됐다. 트럼프의 등장은 미국의 쇠퇴를 의미한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는 ‘위대하지 않으니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제국의 가장 큰 특징은 관용과 개방성인데 그것이 사라지고 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싶다.
“민주노총 건설노조원들이 ‘외국인 노동자 받지 말라, 고용하지 말라’고 데모한다. 입만 열면 위안부 문제를 얘기하지만, 정작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학살에 대해서는 우리가 뭘 하고 있는가. 우리 역사도 돌아봐야 한다. 관용을 가져야 발전한다. 인구도 부족한 상황에 이제는 다인종 국가로 갈 수밖에 없다. 난민부터 다양한 외부의 자원과 재능을 수용해야 발전할 수 있다.”
-미국의 패권 쇠퇴는 이전 제국과 다른 경로를 갈까.
“지금까지 제노바,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미국이 세계 자본주의의 패권국 지위를 이어받았다. 앞의 나라들은 다 소국인데 미국은 그 자체가 대륙이라 할 만큼 크다. 자급 자족성이 강하니 앞선 제국의 멸망과는 좀 다른 길을 갈 것이다. 둘째 지금은 핵 시대다. 패권 변화기에 늘 세계전쟁이 있었는데 과연 핵 시대에도 세계대전이 가능하겠느냐는 의문이 남는다. 게다가 중국은 경제적으로 세계 최고가 되더라도 정치·문화적으로 뒤떨어져 있다. 개방성과 관용에서 낙제점이다. 그래서 향후 패권이 어떻게 변화할지 예측이 어렵다.”
-증보판에는 한반도 이야기도 포함할 계획이라고 들었다.
“사방에 파시즘과 극우 포퓰리즘이 나오고 있다. 큰 전쟁을 치르고 있기도 하다. 전염병과 기후위기, AI발 위기까지 겹쳐 있다. 인류가 멸망할지 모르는데, 역사는 거꾸로 가고 있다. 한국은 특히 지정학적으로 미·중 패권 경쟁의 첨단에 있다. 세계가 탈세계화·신중상주의 대결로 가는데 우리는 통상국가로 발전한 나라다. 세계의 변화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미국이 새로운 고립주의로 가고 있다. 전시작전권을 받고 장기적으로 결국 탈한·미동맹으로 가야 한다. 중장기적으로는 세계적 균형추로서의 영세중립국화 같은 게 필요하다고 본다.”
-트럼프 이후에도 트럼프와 비슷한 인물이 계속 나타날까.
“민주당도 중국 규제나 민족주의적·중상주의적 정책은 트럼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트럼프식 포퓰리즘의 길이냐, 아니면 버니 샌더스나 맘다니 같은 좌파적·민주사회주의적 길을 택하느냐다. 지금 미국 민주당 보수 주류의 모습, 클린턴 노선으로는 별로 희망이 없다. 트럼프와 얼마나 다르겠는가.”
-트럼프가 백악관에 콜럼버스 동상을 세웠다.
“역사 바로 세우기가 거꾸로 가고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히틀러가 제일 먼저 한 게 책을 모아 태운 건데, 트럼프도 재임하자마자 인디언·아프리카 관련 도서관·박물관, 여성 박물관에 동성애·레즈비언 같은 용어를 못 쓰게 했다. 다양성 정책을 폐지하고 있다.”
-노예제는 남북전쟁으로 끝났지만, 인종차별은 계속됐다.
“구조적·상황적 권력의 틀로 보자. 상황적 권력은 주어진 경기 규칙 안에서 결과를 자기한테 유리하게 가져오는 건데, 진짜 권력은 경기 규칙 자체를 결정하는 구조적 권력이다. 미국이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를 도입했지만, 손해 보니 ‘지금부터 룰을 바꾼다. 수출하려면 30% 세금을 내라’ 하는게 트럼프 체제다. 마찬가지다. 흑인을 해방시켜 투표권을 주니 아프리카계 정치인이 나오기 시작하고, 그들의 힘이 강해지니 ‘지금부터 세금 안 내는 놈, 헌법 못 읽는 놈은 투표권 없다, 아프리카계는 같은 버스도 타지 마라’라며 규칙을 바꾼 거다. 인디언을 만났을 때도 그랬다. ‘이 땅을 주면 우리가 저쪽 땅을 주겠다’라며 조약을 맺는다. 나라와 나라의 조약인데, 거기서 금이 나니까 백인들이 들어가 금을 캐고, 분쟁이 나면 쳐들어가 죽여버린다. 계속 경기 규칙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바꿔왔다.”
-팁의 유래를 소개한 대목도 인상적이다.
“최저임금제가 레스토랑·요식업에 적용이 안 돼서인데, 팁은 인종주의에서 시작했다. 남북전쟁으로 노예가 해방됐지만, 일자리가 없으니 아프리카계가 무임금으로 일하며 백인들한테 팁을 받게 한 거다. 자기가 받아야 할 임금을 시혜로 받게 했고, 그게 제도화된 게 팁이다.”
-과거 미국에 살던 때와 비교해 가장 크게 달라진 건 무엇인가.
“눈에 띈 건 운전 습관이다. 차선 바꿀 때 신호 넣고 들어가는 사람을 거의 못 봤다. 욕할 정도로 그냥 들어온다. 신자유주의 경쟁이 사람들을 엄청나게 각박하게 만들었다는 걸 느꼈다. 인종주의를 피부로 느낄 정도로 외국인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도 읽힌다. 책 표지 사진이 자유의 여신상이 돌아서 있는 모습인데, 미국이 더는 자유의 땅도, 이민자의 땅도, 기회의 땅도 아니라는 뜻이다. 이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가진 않았고, 그 흐름을 얼마나 대중적 힘으로 막아낼 수 있느냐가 핵심일 듯하다.”
-앞으로는 여행기만 쓴다고 했다. 다음 여정은.
“여행은 사실 대중적으로 진보적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매체다. 마르크스와 레닌, 호찌민 등 유럽의 진보 역사 유적을 안내하는 기행문인 <붉은 유럽>(가제)을 쓰려고 한다. 오는 8월 말 현지답사를 한다. 아시아에서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 중 한 사람인 호찌민의 여정을 따라가는 기행도 구상 중이다. 박헌영과 같은 실패한 혁명가도 소개하고 싶다. 박헌영은 남한에서는 빨갱이, 북한에서는 미제 간첩이다. 최소한 간첩이라는 오명에서는 복권돼야 한다. 미 군정 자료를 다 봐도 그런 얘기는 한마디도 없다.”
손호철 교수가 미국 건국 250주년 기념일에 맞춰 출간한 미국 기행문 <바로 보는 미국사>의 표지. 이매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