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속도와 숙성 사이, K뮤지컬의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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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속도와 숙성 사이, K뮤지컬의 진화

입력 2026.07.11 06:00

수정 2026.07.11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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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

뮤지컬 <피아노의 숲>·<보들레르>

<보들레르> 공연 장면. DIMF 제공

<보들레르> 공연 장면. DIMF 제공

뮤지컬 덕후에게는 황금 같은 2주였다.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뮤지컬 산업의 오늘과 길을 모색하는 작품을 집중해서 본 시간이었다. 서울 코엑스에서 6월 29일부터 7월 3일까지 열린 ‘2026 K-뮤지컬 국제마켓’에서는 작품 개발과 공동제작, 해외 유통을 두고 논의가 이어졌다. 창작 뮤지컬 성장 이면에 짧은 개발 기간과 휘발성 작품, 프로듀싱 역량 축적 부재가 남아 있다는 진단과 숙성 시간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공유됐다. 며칠 뒤 찾은 대구에서는 이 질문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응답하는 두 작품을 만났다.

20회를 맞은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은 국제마켓에서 논의된 담론이 실제 공연으로 구현되는 자리였다. 프랑스 논버벌 클래식 매직 퍼포먼스 <레 비르튀오즈>(줄리앙&마티아스 카데즈 콘셉트·피아노 연주·퍼포먼스)는 피아노 연주와 마술, 탭댄스를 결합한 완성도를 보여줬다.

DIMF 창작지원작 <성주, 집 잃은 신의 서울 표류기>(김희정 작, 임지송 작곡, 정철 연출)는 난개발과 성주신 설화를 통해 청년 세대의 패배감을 포착했다. 중국 뮤지컬 <보옥>(왕이와 작·작사, 장샤오란 작곡, 까오뤠이쟈 연출, 신선호 안무)은 <홍루몽>을 재구성한 미학적 스펙터클로 시선을 끌었다. 특히 눈에 띈 것은 일본 베스트셀러 만화 원작의 뮤지컬 <피아노의 숲>과 DIMF 창작지원작 <보들레르>였다.

전자는 짧은 2년의 제작 기간 끝에 대극장 뮤지컬로 완성됐고, 후자는 여러 공모와 개발 과정을 거치며 6년 만에 중·대극장 규모의 뮤지컬로 결실을 보았다. 두 작품 모두 세계 최초로 DIMF에서 첫선을 보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축적된 시간이 제작의 속도가 될 때

7월 5일 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 <피아노의 숲>(잇시키 마코토 원작, 마이클 펜티만 각색·연출, 바너비 레이스 작곡, 원지혜 번역, 이진욱 편곡·음악감독, 김루나 안무, 최영은 무대, 임재덕 조명, 정수림 영상) 월드프리미어 공연장은 만석이었다. 무대에는 6대의 업라이트 피아노와 1대의 그랜드 피아노, 20여개의 피아노 의자가 전부다. 상하로 오르내리는 오케스트라 연주석이 작품의 주 무대인 콩쿠르장을 대신한다. 어린이·청소년 연주자들의 상실과 결여가 꿈과 배려심으로 채워지는 원작의 세계관이 프로덕션 디자인으로 환원된 현장이다.

피아노와 의자를 밀고 당기고 돌리는 앙상블 동선이 숲이 되고, 학교가 되고 콩쿠르장이 된다. 피아노는 악기였다가 바의 테이블, 침대, 소파로 변모한다. 배우들의 군무가 곧 장면 전환이 되며 다음 장면의 공간을 열어간다. 조명디자인과 영상디자인이 만들어낸 환영 같은 공간이 하나 된 호흡으로 서사를 부연한다. 최근에 본 대극장 신작 뮤지컬 중 미학적으로 가장 뛰어난 성취를 이룬 작품이다.

업라이트 피아노는 인물과 공간, 기억과 현재를 조직하는 중심축이다. 7대의 피아노는 연습 초기부터 배우들과 함께 움직였다. 성인과 어린이 배우들은 피아노 사이의 동선과 의자의 위치, 음악과 몸의 움직임을 일상처럼, 놀이처럼 익혔다. 실제 연주자 영상을 여러 각도에서 촬영해 손과 몸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핸드 싱크를 완성했다. 또 배우들의 실제 연주와 이를 교묘히 조합해 클래식 피아노 연주가 작품의 근간이 되도록 했다.

작품의 빠른 완성 속도는 제작 과정을 생략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악기와 공간과 배우의 몸을 동시에 설계하는 연출 방식 덕이다. 일본 원작 IP와 영국 창작진, 한국 음악진이 만났다. 다양한 제작 경험을 축적한 헤븐프로덕션과 달컴퍼니, 대구시립극단,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재단, DIMF, 대구문화예술회관, 일본 고단샤가 시간표를 조율하는 아시아 협업의 현장이기도 했다. 박용호 헤븐프로덕션 대표에 따르면 작품의 출발은 2024년 봄, 무대화 가능성을 타진하고 판권을 확보한 이후였다. 대본 개발은 2025년 여름, 음악 작업은 2026년 초에 진행됐다. 연습 과정까지 대본은 14고 가까이 수정됐다. 일본 공연계와 쌓아온 관계, 해외 창작진과의 신뢰, IP를 확보하고 여러 제작 주체를 연결하는 프로듀싱 경험이 속도와 미학적 완성도를 가능케 한 비결이다.

<피아노의 숲> 아역 배우 연습 현장. 대구시립극단 제공

<피아노의 숲> 아역 배우 연습 현장. 대구시립극단 제공

작품과 창작자가 함께 자라는 시간

뮤지컬 <보들레르>(한민규 작·작사·연출, 유수진 작곡, 김희은 음악감독, 양은숙 안무)는 반대다. 19세기 프랑스 문화예술계의 모더니티를 견인한 샤를 보들레르를 다루지만, 한 천재 예술가의 고독과 비극에 집중하는 전기 뮤지컬의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 시인과 화가, 비평가와 출판업자, 연인과 동료들은 각자 욕망과 예술관을 드러낸다. 예술과 돈, 사랑과 명예, 혁명과 제도를 둘러싼 상충하는 목소리를 교차시킨다. 미하일 바흐친이 도스토옙스키 소설을 설명하며 제시한 다성성(polyphony)이다. 보들레르는 중심인물이지만 절대적인 중심은 아니다. 19세기 파리의 예술가와 출판인, 비평가와 연인들이 영향을 주고받고 충돌하며 문화적 장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그의 예술적 혁명으로 제시된다.

작품 개발 과정도 다성적이다. 비교문학을 전공한 한민규 작·연출은 탐미주의와 예술지상주의를 연구하며 보들레르를 만났다. 2020년 산울림 고전극장에서 소극장 연극 <보들레르>를 작·연출한 뒤 보들레르의 작품과 행보에서 음악적 영감을 얻어 뮤지컬 개발을 시작했다.

유수진 작곡가와 넘버를 만들었고, 2021년 멘토링 프로그램 ‘글로컬라이브’ 선정 이후 대본과 음악을 고쳤다. 그 후 독립적으로 개발을 이어가며 3고와 4고를 쓰고 전곡을 완성했지만, 제작 연계 공모에서는 인물이 많고 규모가 커 제작비가 많이 든다는 평가를 받았다. 인물을 줄여 소극장 뮤지컬로 만드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제안도 있었다. 이는 한국 창작 뮤지컬 개발 시스템의 역설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공공 지원제도는 실제 제작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인물과 공간, 제작비를 줄이는 방향으로 작품을 유도하기도 한다.

한민규 연출은 작품 규모를 줄이지 않았다. 대신 창작자가 변했다. 작품을 고치는 동안 20편 이상의 작품을 연출하며 경험을 쌓았고, 2024년부터 시작한 5고에서는 작가의 텍스트를 연출가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봤다. 장면의 길이와 인물의 동선, 음악이 시작되는 순간과 무대의 밀도를 고려해 작품을 재설계하고 그 사이에 다양한 작품을 연출한 경험을 살려 직접 연출에 도전했다. 한민규 연출은 2026년 DIMF 창작지원작 선정 이후에도 기존 넘버 한 곡을 삭제하고 세 곡을 새로 만들며 조연 인물의 존재감을 강화했다. 초고부터 초연까지 6년, 대본이 달라졌고 음악이 바뀌고 창작자가 성장했다.

두 작품은 K뮤지컬 국제마켓에서 제기된 질문에 서로 다른 답을 제시한다. <피아노의 숲>은 오랫동안 축적된 프로듀싱 경험과 국제 네트워크, 공공과 민간의 협력이 제작 기간을 단축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보들레르>는 한 번의 공모와 쇼케이스에 소진되지 않는 긴 개발이 작품과 창작자의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증명한다. 하나는 이전의 시간이 현재의 속도가 된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흐르는 시간을 작품의 변화로 축적한 작품이다. “작품이 스타가 돼야 한다”는 말이 반복된 올해 K뮤지컬 국제마켓에서 두 작품은 스타 시스템 바깥에서 작품과 창작 과정 자체가 어떻게 힘을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두 작품은 20회 DIMF에서 각기 심사위원상과 창작뮤지컬상을 수상했다. <보들레르>는 DIMF에서의 상연을 마쳤다. <피아노의 숲>은 7월 25일까지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공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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