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읽는 한국 여성문학 100년] (32) ‘삐라’를 뿌리는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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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한국 여성문학 100년] (32) ‘삐라’를 뿌리는 여자들

입력 2026.07.10 14:22

수정 2026.07.10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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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은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문학평론가

김말봉 <카인의 시장>

김말봉 작가

김말봉 작가

1945년 해방은 조선이 일제 식민지로 전락함으로써 지연된 여성해방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여성들이 정치의 광장에 뛰어든 극적 사건이었다. 해방이 되자 남북한 양측은 ‘부녀국’을 설치하고 남녀평등법을 발포하는 등 여성해방을 국가의 과제로 제시했다. 오랫동안 사적 가부장제의 그늘에서 자율적 개인이 될 수 없었던 여성들이 공공정책의 대상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각성한 여성들은 민족해방의 물결 위에 올라타 여성해방을 위한 정치 투쟁에 나섰다. 김말봉(1901~1961)의 <카인의 시장>(<화려한 지옥>(1954)으로 개작 단행본 출간)은 여성의 인간화를 부르짖으며 ‘삐라’를 뿌리는 여성들이 등장했던 해방의 역사를 보여준다.

김말봉은 1901년 경남 밀양의 농가에서 태어나, 그만 딸을 낳게 해달라는 뜻의 말봉(末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소학교에 들어가 미국인 여교사에 의해 비로소 자신이 ‘여성’임을 인지했을 만큼 남복(男服)을 하며 사내애처럼 성장했다. 1919년에 기독교계인 서울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에 도쿄의 고근여숙 등을 거쳐 1927년에 교토의 도시샤여자전문학부 영문과에서 학위를 땄다. 귀국 후 중외일보 기자생활을 했으며, 193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망명녀’가 당선되며 작가가 됐다. 연재한 장편 <밀림>(1935), <찔레꽃>(1937)이 신문 발행 부수를 배로 올릴 만큼 인기를 끌었지만, 반일 의식으로 절필하고 해방 후 활동을 재개했다. 1957년에는 최초의 여성 장로로 피선됐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당선될 만큼 영예를 누렸지만, 사별과 재혼 등 순탄하지 않은 결혼생활을 하며 “전실 자식 친자식 합쳐 일개 분대 이상의 자녀들을 거의 붓대 하나로 양육”(김태영)해야 했던 여성 가장(家長)이기도 했다.

젠더 부정의 개혁하려는 여성의 의지 담아

<카인의 시장>은 순문학 중심의 문단이 ‘순수귀신’에 들려 있다고 비판하며 대중소설가를 자처한 김말봉이 젠더 부정의를 개혁하려는 여성으로서의 의지와 기독교적 이상을 바탕으로 창작한 작품이다. 해방 직후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일월루’ 일류 기생인 오채옥이 뱃속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유곽을 도망치지만, 성폭력 범죄와 빈곤으로 인해 탈성매매가 쉽지 않은 현실을 그려내는 한편으로 기독교계 여성운동가 정민혜 여사를 중심으로 남성 중심사회에 실망한 여성들이 단결해 공창폐지운동을 전개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오채옥은 여성들이 사적 가부장제의 그늘 속에서 인간의 기본권조차 짓밟혀왔음을 보여준다. 자발적 매춘부가 아니라 아편 중독자 남편에 의해 팔려 2만원의 몸값을 갚아나가는 성노예이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이러한 폭력과 약탈이 국가의 방조, 지원 아래 이루어지기에 채옥의 이야기는 불운한 여성의 수난사에 머물지 않는다.

오채옥을 ‘매춘화된 삶’으로 몰아넣은 것은, 국가나 지방 행정기관이 성매매를 일정한 조건 아래에서 합법적으로 허가하고 관리하는 ‘공창제(公娼制)’다. 채옥은 어렵사리 공창에서 도망치지만, 거리를 배회하던 중 포주의 신고를 받은 경관에게 붙잡혀 다시금 유곽으로 돌아가야 할 신세에 처한다. 채옥은 젊은 경관을 홀려 다시금 도망치지만, 미스터 김(김황영)에게 속은 것도 모르고 흑인 미군들에게 차량 납치돼 집단 윤간을 당하며 장국집 종업원으로 일하던 중에는 주인 사내에게 성폭력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갈 곳이 없는 채옥은 결국 미스터 김이 자기 여동생의 몸을 팔아 운영하는 황금정 육정목의 사설 유곽에 식모로 들어간다. 미스터 김의 셈법에 의하면, 오채옥은 조만간 자기의 부를 불려줄 장안의 명기가 될 것이었다.

이 소설은 해방기 남한 여성운동의 가장 뜨거운 이슈를 생중계하고 있는 르포르타주다. 해방 이후 1년 만에 남한의 새 통치 권력자인 미국은 법령 제70호 ‘부녀자의매매또는그매매계약의금지’를 공포해 대중의 환호를 받았다. 이데올로기 갈등에도 좌우익여성단체가 공창제 폐지를 위해서는 한목소리를 냈을 만큼, 공창은 일제 식민지 정책의 잔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주들의 반대와 여성의 빈곤으로 공창폐지법은 계류상태에 묶여 있었다. 14개 여성단체가 연합하고 김말봉을 위원장으로 한 공창폐지운동 세력의 노력 끝에 1947년 10월 28일에 공창폐지령 제7호를 겨우 발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채옥이 공창폐지령을 알리는 정민혜 여사의 ‘삐라’를 받고도 문맹인 탓에 자신이 자유민임을 깨닫지 못하는 장면이 보여주듯이 가난과 무지 속의 여성들이 성욕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남자들과 여성의 몸을 팔아 부를 일구고자 하는 포주들의 욕망에 의해 다시금 성 시장으로 내몰릴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해방기 여성운동의 뜨거운 현장 보여줘

이러한 문제에 착안함으로써 이 작품은 두 가지 흐름으로 분기한다. 한 흐름은 ‘여성 섹슈얼리티의 매춘화’라는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물질적 토대로써 ‘희망원’ 설립을 위한 재정을 마련하는 것이다. 100만원의 서사라고 할 만큼 사업가 손성묵이 기부를 약정한 100만원의 향방은 서사를 관통하며 독자를 희망으로 끌어올리고, 또 좌절시키며 여성운동의 주변성과 고독을 환기한다. 손상묵은 애국지사를 팔아넘긴 밀고자이자 마약판매상으로서 자신의 치부를 감추고, 또 정민혜 여사를 유혹하기 위해 기부를 약속하지만, 공창폐지운동에 참여 중인 딸과 조우하자 기부를 철회한다. 대중소설을 자처하지만, 이 작품에는 수난을 위로하고 암흑 같은 미래에 빛을 던져주는 이상적인 남성 지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상가로 애국 청년으로 나라를 근심하는 젊은 남자”인 황영빈은 기실 채옥을 임신시킨 유곽의 손님이자, 육체를 정복한 후 싫증이 나 백송희를 버리는 바람둥이다. 기성세대 역시 부패하기는 마찬가지다. 손탄실이 간절히 찾아다녔던 아버지 손성묵은 고결함과는 거리가 먼 모리배, 마약판매상, 엽색가다.

“대강은 알았습니다. 공창 폐지의 사명은 횡(橫)으로 유곽의 여인들은 인도적으로 구원하자는 것과 또 종(縱)으로 민족 보건을 위하여 성병을 박멸하자는 민족의 보건 운동으로 볼 수 있고만요……공창 폐지 연맹이야말로 건국의 가장 초석적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송희의 총명한 머리가 단연코 정 여사의 마음에 들었다.

여성이 자립할 방안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이 소설은 공창폐지운동의 민족적·여성적 가치를 설파하는 것으로 서사적으로 분기한다. 위 인용문이 암시하듯이 공창폐지운동은 사랑에 배신당한 백송희를 구원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은 쉬이 팔리고 버려지는 취약한 신세를 면하지 못하는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해야 하는 것이다. 공창폐지운동은 비단 창부를 위한 인도주의가 아니라 여성을 사적 가부장제에서 해방시켜 존엄한 존재로 끌어올리기 위한 전진운동의 성격을 갖는다. 폐창은 민족 보건을 위한 것이자 건국의 초석을 닦는 운동으로 재해석된다. 이러한 논법은 조앤 스콧이 “페미니즘의 역사는 오로지 역설만을 던져온 여성들의 역사”라고 했던 ‘페미니즘의 역설’, 즉 페미니즘이 어떤 운동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어떤 모순, 불일치, 모호함에 봉착하게 된다는 지적을 상기시킨다. 여성을 성적 상품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여성이 민족의 모체로 은유될 때, 여성은 몸과 섹슈얼리티의 자율성 혹을 주권을 주장할 수 없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삐라’를 뿌리는 불온한 여성운동가들의 각성과 자매애적 연대를 통해 해방기 여성운동의 뜨거운 현장을 보여주고 있어 문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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