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로 생성한 이미지. 김우재 제공
논문을 낼 때마다 나는 청구서를 받는다. 게재료라 부르는 그 돈이 결국 어디서 나오는지는 연구자라면 모두가 안다. 연구비는 세금이다.
2025년 11월 스웨덴 왕립과학원에서 발표된 ‘스톡홀름 선언’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잠시 설렜다. 상업 출판사로부터 학술출판을 되찾아 학계의 손으로, 논문 편수가 아니라 질로 연구자를 평가하고 부정행위를 독립적으로 감시하자는 선언이었다. 노벨상의 도시에서 발표된 이 문서에는 게르트 기거렌처, 엘리자베스 빅 같은 낯익은 이름이 있었다. 나는 이 선언문을 읽으며 오래된 기시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기시감의 정체를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2002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도 비슷한 선언이 있었다. 과학지식은 인류 모두가 완전히 자유롭고 제한 없이 접근할 수 있는 공공재가 돼야 한다는 선언이었다. 그로부터 20여년, 우리는 그 도덕적 구호의 결말을 안다. 오픈액세스는 실현됐지만, 그 자리를 채운 것은 공공재가 아니라 약탈적 저널 시장이었다. 도덕은 이겼지만, 경제는 진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도덕이 경제에 잡아먹힌 것이다.
그래서 나는 스위스 프리부르대학의 크사바 스자보가 같은 학술지에 실은 반박문을 읽으며 안도와 씁쓸함을 동시에 느꼈다. “스톡홀름 선언은 왜 결코 작동하지 않을 것인가.” 그의 결론은 짧고 단호했다. 그리고 나는 그 단호함에 대부분 동의한다.
스자보의 논지는 간단하다. 스톡홀름 선언은 질병을 오진했다. 과학의 위기는 논문공장이나 영리 동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타당성과 신뢰성보다 양과 새로움과 명성을 보상하는 유인 구조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양이 아니라 질을 평가하라’는 구호는 반박할 수 없이 옳지만, 동시에 공허하다. 연구자가 과도하게 논문을 찍어내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기 때문이다. 채용과 승진과 연구비가 모두 지표에 좌우되는 한, 그 지표를 조정하라는 요구는 문제의 뿌리를 건드리지 못한다.
더 뼈아픈 지적은 학계 자신을 향한다. 출판을 기업에서 학계로 되돌리자는 요구는 비영리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가정에 기대지만, 정작 지금의 기능장애를 만들고 유지해온 것은 학계 자신이다. 학회 저널조차 대개 상업 출판사를 통해 유통되고, 실명 동료심사도 하지 않으며, 심사자에게 보수도 지급하지 않는다. 전 세계 동료심사자들이 무급으로 제공하는 노동의 가치는 연간 10억달러 이상으로 추산된다. 유리집에 사는 학계가 영리 출판사에 돌을 던지는 셈이다.
그런데 나는 스자보의 글에서 가장 섬뜩한 대목이 부정행위에 관한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가 ‘실험실 안의 코끼리’라 부르는 부분, 즉 부정행위는 아니지만 재현되지 않는 ‘정상’ 과학의 홍수다. 주류 저널에 선도적 연구 집단이 발표한 전임상 생의학 결과조차 독립 연구에서 80~90%가 재현에 실패한다는 추정이 있다. 최근 한 칼럼에서 나는 논문공장과 AI가 만들어내는 가짜 참조문헌의 자기 복제 루프를 다뤘다. 그것이 명백한 사기의 영역이라면, 스자보가 가리키는 것은 그보다 훨씬 넓고 조용한 부패다. 아무도 부정행위라 부르지 않지만, 아무도 재현하지 못하는 과학. 사기 표식이나 블랙리스트로는 애초에 잡아낼 수조차 없는 부패다.
2024년 10월 8일 스웨덴 스톡홀름의 왕립과학원에서 기자들이 2024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발표를 기다리고 있다. EPA연합뉴스
윤리가 아닌 경제를 겨냥하라: 진짜 개혁의 조건
우리는 사실 이 결말을 이미 한 번 봤다. 부다페스트 선언이 오픈액세스를 도덕적 의무로 선포했을 때, 그 선언에는 돈이 없었다. 누가 비용을 낼 것인가에 대한 답 없이, 지식은 공공재가 돼야 한다는 도덕적 명제만 남았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이 논문처리비용(APC)이었다. 2010년 1800개였던 약탈적 저널은 2014년 8000개로 늘었고, 그해에만 약 42만편의 논문을 시장에 쏟아냈다. 정작 엘스비어 같은 거대 출판사는 오픈액세스를 새로운 수익 모델로 흡수해 2023년 기준 38%에 이르는 영업이익률을 기록했다. 애플이나 구글의 마진을 웃도는 수치다. 도덕적 구호만으로 무장했던 개혁은 그 구호를 가장 빠르게 현금화하는 자들의 손에 넘어갔다.
스톡홀름 선언에서 나를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대목이 바로 여기 있다. 이 선언 역시 다이아몬드 오픈액세스—출판도 열람도 무료인 모델—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누가, 어떤 돈으로 그것을 운영할 것인지에 대한 답은 여전히 희미하다. 스자보의 표현을 빌리자면, 개혁은 학술출판의 윤리가 아니라 경제를 겨냥해야 한다. 정부와 연구비 지원기관이 출판사를 완전히 우회해 공공 확산 인프라를 구축하고, 모든 지원 연구가 투명한 데이터와 함께 개방형 저장소에 기탁되며, 재현 가능성이 논문 편수를 대신해 자격 기준이 되는 체계. 이 모델은 개념적으로는 단순하지만 정치적으로는 폭발적이다. 대학과 출판사와 순위 산정 기관 모두로부터 권력을 빼앗기 때문이다.
과학은 여전히 그 값을 치를 가치가 있는가
여기서 나는 스자보조차 던지지 않은 질문을 스스로 던진다. 공적 재원으로 운영되고 위계와 유인이 제거된 인프라. 좋은 말이다. 그런데 그 돈은 결국 납세자와 시민의 주머니에서 나온다. 논문공장이 만들어내는 가짜 논문이 1.5년마다 2배로 늘고 있는 지금, ‘과학지식’이라는 것이 여전히 그 값을 치를 가치가 있는 공공재인지, 우리는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을까. 스톡홀름 선언도, 스자보의 대안도 이 질문 앞에서는 침묵한다. 그럼에도 나는 스자보 쪽에 서고 싶다. 정확한 진단 없이는 그 어떤 처방도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스톡홀름 선언은 서명을 모으고 논의를 촉발하겠지만, 결국 고귀했으나 효과 없었던 선언의 기록보관소에 한줄을 더할 것이다. DORA도, 라이덴 선언도, 플랜 S도 이미 그 자리에 있다. 부패가 개인의 윤리적 결함이 아니라 정치경제의 산물이라면, 그것은 결코 선언문으로 치유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새로운 서명이 아니라 누가 돈을 쥐고 있고, 그 돈이 어떤 행동에 보상을 주는지를 바꾸는 일이다. 돌을 던지기 전에 유리집부터 허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 선언 역시, 다음 세대가 인용할 또 하나의 아름다운 실패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