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동구 안심로에 있는 서점 ‘책방아이’. 배지연 제공
나는 대구에서 나고 자라 지금도 이 도시를 삶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문학 연구자다. ‘대구에 산다’는 말은 종종 개인의 삶이나 연구를 하나의 정치적 이미지로 환원시키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이 도시는 오랫동안 보수의 상징으로 호출돼왔지만, 이러한 단일한 이미지는 대구라는 공간에서 실제로 이루어져 온 삶의 다양성과 시간의 결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 정치적 수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호명되는 대구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 사이에는 언제나 간극이 존재해왔다.
외부에서 덧씌워진 이미지와 달리, 대구 안에서 살아가는 감각은 훨씬 복합적이다. 대구는 국채보상운동, 10월 항쟁, 2·28 학생운동 등 한국 근현대사의 전환점마다 변혁의 불씨가 됐던 도시이기도 하다. 최근의 시간 또한 이를 다시 확인시킨다. 12·3 내란의 국면에서 ‘보수의 심장’이라 불려온 도시의 거리로 나온 TK의 딸들은 대구의 로컬리티가 단일한 정치적 색깔로 환원될 수 없음을 분명히 드러냈다.
그럼에도 이러한 장면들은 종종 예외적인 순간으로만 기억된다. 일상의 차원에서 대구의 또 다른 로컬리티가 어떻게 유지되고 확장돼왔는지는 충분히 주목받지 못했다. 특히 정치적 보수성이라는 강력한 이미지 아래에서, 그와는 다른 삶의 방식과 관계의 조직은 쉽게 가시화되지 않는다. 동네책방과 같은 일상의 장소들은 바로 이러한 층위에서 지역의 감각을 다시 배열하며 로컬을 재구성한다. 이 글은 그 사례로 대구 동구 안심을 기반으로 한 ‘책방아이’를 살펴본다.
안심이란 이름, 함께 살아가는 ‘급진한’ 감각
대구의 또 다른 로컬리티를 보여주는 지역 중 하나가 동구의 안심(安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와의 전쟁 중 이 일대에 머물며 마음을 놓았다는 데서 비롯된 지명처럼, 안심은 오늘날에도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삶의 감각을 품고 있다. 행정동 안심 1~4동을 포함하는 이 지역은 겉으로 보면 평범한 주거지지만, 오랜 시간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 조직, 주민 커뮤니티가 중첩되며 독특한 공동체적 지형을 형성해왔다.
이 지역의 특성은 2000년대 이후 돌봄과 교육을 둘러싼 주민들의 절실한 필요에서 비롯됐다. 변두리라는 이유로 공공 인프라가 충분하지 않았던 이곳에서, 부모들은 아이를 맡길 곳과 함께 읽고 머물 수 있는 공간을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이렇게 해서 어린이집과 어린이도서관이 안심에 자리 잡았고, 이후 카페와 공동육아, 방과후학교, 협동조합 등 다양한 형태로 안심의 공동체는 확장했다.
이처럼 돌봄과 교육의 공백을 메우는 과정에서 이어진 활동들은 삶의 시간과 관계를 다시 배치하는 방식으로 나아갔다. 돌봄, 사회연대경제, 공동체 활동은 분리되지 않은 채 서로를 지탱해왔고, 발달장애인 돌봄 사업 역시 보호와 시혜를 넘어 발달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일하고 생활하는 구조를 실험해왔다. 2013년 창립된 안심협동조합과 이를 모태로 2019년 결성된 ‘안심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실천을 느슨하게 연결하며, 25개 단체가 각자의 활동을 유지한 채 필요를 조정하고 공동의 문제를 논의하는 관계망을 만들어왔다.
이러한 안심의 실천은 특정한 이념이나 운동 조직의 주도로 이뤄지지 않았고, 지자체의 행정 지원으로 일궈낸 것은 더욱 아니다. 같은 삶터를 공유한 이들이 일상을 통한 관계의 축적과 실천으로 만든 것이다. 시장 경쟁의 속도에서 한발 물러선 경제, 시혜가 아니라 공존으로서의 돌봄, 그리고 주민들의 자발적 실천으로 ‘살기 편하고 마음 놓이는 마을, 안심’으로 성장했다. 안심의 로컬리티는 바로 이러한 삶터와 일상의 선택들이 겹겹이 쌓이며 형성됐다. 대구에 안심이 있어서 우리는 조금 더 안심할 수 있다.
아이와 어른이 함께 자라는 곳, 책방아이
책방아이는 가을마다 열리는 안심 마을축제에 함께한다. 배지연 제공
이러한 공동체적 토대 위에서 동네책방협동조합 ‘책방아이’는 만들어졌다. 2017년 대구시 지정 마을기업으로 시작했지만, 책방아이를 지탱해온 힘은 행정이 아니라 안심마을의 관계망이었다. 문화와 돌봄, 교육을 분리하지 않는 운영방식은 오랜 협력의 축적 위에서 가능했고, 공동체의 다양성과 확장에 책방아이도 함께했다. 예컨대 매년 가을에 열리는 안심 마을축제에 책축제가 더해지면서 주민참여와 관심이 이전보다 더 활발해졌고, 공동체와 함께 책방아이도 성장했다.
책방아이는 단순히 책을 사고파는 장소를 넘어 아이와 어른이 함께 자라는 공간을 지향한다. 방과 후 아이들이 눈치 보지 않고 머무를 수 있고, 어른들 역시 일을 마친 뒤 찾아와 자기 세계를 확장할 수 있는 곳. 빠른 속도와 효율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책방아이는 느리게 읽고 천천히 말하는 시간을 허락해왔다. 급진성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다시 선택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이 공간은 자연스러운 일상에서 보여준다.
안심에서 책방아이가 걸어온 길은 ‘온 동네가 함께 아이를 키운다’는 말이 결코 수사가 아님을 방증한다. 방과 후 책방에 모인 아이들은 함께 책을 읽고 질문하며, 자신의 언어를 만들어간다. 이는 독서를 넘어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 말할 권리를 연습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어른들의 시간 역시 이 공간을 지탱하는 중요한 축이다. 밤이나 주말이면 책방에서는 북토크와 강연, 읽기 모임이 열린다. 이 자리에서 어른들은 부모라는 역할을 넘어 한 명의 시민으로서 사유하고 질문하는 시간을 회복한다. 아이를 키우는 경험, 노동의 조건, 지역에서 살아간다는 감각이 책과 만나면서 삶의 언어로 다시 쓰인다. 이러한 반복된 만남은 공동체를 느슨하게 묶는 신뢰의 기반이 된다.
책방아이는 사회적 기억을 지속적으로 호출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20년이 넘도록 해결되지 않은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를 매년 기억하며 애도의 자리를 만들어왔고, 5월이 오면 아이들과 함께 광주 5·18의 현장을 찾았다. 부모와 아이가 함께 역사 앞에 서는 경험은 과거를 배우는 동시에 현재를 책임지는 태도를 기르는 일이다. 기억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공동체가 어떤 가치 위에 서 있는지를 스스로 묻는 과정이기도 하다. ‘보수의 심장’으로 호명되는 대구의 한복판에서 책방아이는 특정한 구호가 아니라 서로를 돌보는 관계 위에서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안심의 자리’를 만들어왔다. 가장 급진적인 로컬은 이렇게, 아이와 어른이 함께 배우며 숨 고를 수 있는 곳에서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