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월 일본 도쿄의 일왕 거쳐인 고쿄에서 열린 새해 축하 행사에서 아이코 공주가 시민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도쿄|AP연합뉴스
일본이 시끄럽다. 왕위 계승 논란 때문이다. 왕족 수 부족 우려를 해소하고 왕위 계승을 안정화하기 위해 시작한 논의가 결국 집권 자민당의 ‘여성 일왕 막기 총력전’으로 번지는 모양새다. 첫 여왕 탄생을 염원하는 대다수 일본 국민의 바람과 달리 정치권에서는 현 나루히토 일왕의 외동딸 대신 80년 전 왕족 신분을 박탈당한 옛 왕족의 후손 남성을 양자로 들이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번 논의가 일본 정치권의 낡은 젠더 의식을 드러냈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 끊길까’ 걱정에도 ‘먼 길 돌아가기’
1일 요미우리·아사히신문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왕실의 구성과 왕위 계승 등을 규정하는 황실전범(皇室典範) 개정안을 전날 임시 각의에서 의결하고 국회에 제출했다.
개정 황실전범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다. 여성 왕족이 결혼 후에도 왕족 신분을 유지할 수 있게 하고, 전후 왕족 신분을 박탈당한 구 왕족 가문의 남계 남성을 양자로 맞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정부는 이번 국회 회기 안에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일본의 왕족 부족은 해묵은 문제다. 현행 황실전범은 남계 남성, 즉 ‘왕족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왕위를 계승한다고 정하고 있다. 여성의 왕위 계승은 원천적으로 차단돼 있다. 현재 젊은 남성 왕족은 나루히토 일왕의 남동생 후미히토 친왕(60·왕위 계승 서열 1위)의 아들 히사히토 친왕(20·계승 서열 2위)이 유일하다. 나루히토 일왕은 슬하에 딸 아이코 공주(25)만 두고 있다.
일본 국민 여론은 여성 일왕 탄생에 호의적이다. 최근 이뤄진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는 적게는 70%, 많게는 90% 이상의 일본인이 아이코 공주의 왕위 계승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여성의 왕위 계승 허용이라는 지름길을 두고 집권 자민당은 ‘먼 길을 돌아가는’ 쪽을 택했다. 여왕 관련 논의는 쏙 뺀 채 옛 왕족 남성의 양자 입적과 결혼한 여성 왕족의 신분 유지로 범위를 좁혔다. 자민당 주류인 보수파가 남계 남성만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기존 입장에서 물러서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첫 여성 총리는 나와도 여왕은 반대?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 그는 일본의 첫 여성 총리지만, 여성의 왕위 계승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도쿄|EPA연합뉴스
다카이치 사나에라는 일본의 첫 여성 총리를 배출한 정당이 왜 여왕을 반대하는 것일까. 자민당 보수파를 비롯한 보수층은 여왕의 탄생 자체보다 ‘남계 계승’에 주목한다.
일본 역사를 보면 공식적으로 8명의 여성 일왕이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예외적이었으며, 남성 후계자가 등장하기 전 임시적 존재였다고 보수층은 본다. 남계 계승이야말로 2000년 넘게 이어온 일본의 전통이며, 왕이 된 아이코 공주가 일반인 남성과 결혼하고 그 자녀가 왕위를 잇는 경우 이 전통이 파괴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여성의 왕위 계승 반대가 “성차별이 아니라 전통을 지키느냐 아니냐의 문제”라는 다소 낯선 논리가 등장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하지만 이번 논의 과정에서는 일본 정치권의 성차별적 인식이 엿보이는 장면이 여러 차례 연출됐다. 자민당 원로인 나카소네 히로후미 전 외무상이 대표적이다. 그는 지난달 28일 한 강연에서 “(여왕 즉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만약 아이코 공주가 왕이 된다면 결혼 상대도 없을 것이다. 반드시 남자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압박도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해당 발언이 알려지자 SNS에는 그가 아이코 공주의 자질과 관계없이 그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 하는 여성’으로 여겼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또 남성이 왕위에 오른다 해도 배우자가 가질 부담이나 후계자 출산 압박은 마찬가지임에도 이를 공주가 왕이 되면 안 되는 이유로 끌어온 것은 모순이라는 점도 지적됐다. 거센 비판에 “부적절한 발언”이었다며 고개를 숙였지만, 전문가들은 나카소네 전 외무상 발언에서 자민당 보수파의 속내를 읽을 수 있다고 짚었다.
일왕제 연구자인 가와니시 히데야 나고야대 교수는 “남계 남자 왕위 계승에 대한 집착과 여성 멸시를 보여준다”며 “아이코 공주가 일왕이 되면 결혼할 남성이 없다는 식의 위협성 논리를 펼친 것”이라고 도쿄신문에 말했다.
가와니시 교수는 왕족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성별과 관계없이 첫째 자녀가 왕위를 잇는 ‘장자 우선’ 제도에 대한 논의를 하루빨리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로벌 대세는 ‘장자 우선’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 즉위 70주년을 맞은 2022년 런던 시내에 이를 기념하는 조형물이 설치돼있다. 런던|AP연합뉴스
현재 왕실 제도를 유지하는 국가 대부분은 여성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성별과 무관한 ‘장자 계승’이 대세다.
영국은 2013년 왕위계승법을 개정해 ‘남성 우선’에서 ‘장자 우선’으로 계승 원칙을 바꿨다. 그전에도 여성의 왕위 계승권이 인정됐지만 왕의 장남과 그 손자를 우선해왔다. 영국 정부는 2013년 “빅토리아, 엘리자베스 2세라는 위대한 여왕의 나라이자 여성 정부 수장이 이끌어온 영국이 남성 우선 계승 제도를 유지하는 것은 전 세계에 잘못된 메시지를 준다”고 밝힌 바 있다.
스웨덴은 1979년 ‘남성 우선’에서 ‘장자 우선’으로 바꿨고, 네덜란드(1983년), 노르웨이(1990년), 벨기에(1991년)가 뒤를 이었다. 스페인과 모나코가 아직 남성을 우선하지만, 이들 국가도 여성의 계승 자체를 막고 있진 않다.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태국이 1974년 헌법 개정을 통해 여왕 탄생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여성의 왕위 계승을 원천봉쇄하는 곳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연합(UAE)과 같이 성차별이 뿌리 깊은 중동의 절대왕정 국가 정도다.
젠더 연구자인 오치아이 에미코 교토산업대 교수는 황위 계승을 남계 남성으로 제한한 것은 메이지 유신 때의 일이며 서구 열강의 남성 중심 제도를 따라 했을 뿐 여성 일왕이야말로 일본의 전통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마이니치신문과 인터뷰에서 “남계 계승에 대한 집착이야말로 일본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발상”이라며 “부계주의는 일본 고유문화가 아니다. 보수라면 오히려 여성 일왕 부활에 찬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 여론을 역행하는 정부 태도에 보수 성향의 언론조차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사설에서 “자민당에서 남계 계승에 대한 집착을 드러내는 발언이 잇따르고 있다. 왕실 문제는 국민 여론에 귀 기울이며 유연하게 검토해야 하는 사안인데 정부·여당은 그 반대로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