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거 사다리이자 투기 사다리…전세대출 무자본 갭투자 악용
“전세 중심 정책 전환해 월세 시대 연착륙 방안 고민할 필요”
이재명 대통령 취임 1주년 기자회견 생중계 방송이 6월 8일 서울역 대합실 TV를 통해 송출되고 있다. 대통령은 이날 전세난에 대해 “정상화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내 집 마련을 위한 서민들의 ‘주거 사다리’로 여겨지던 전세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전세는 세입자가 전세보증금을 집주인에게 맡기고, 집을 빌린 뒤 계약 기간이 끝나면 보증금을 돌려받는 주택임대차 유형이다.
집주인은 금융권에서 돈을 빌리지 않고 보증금을 받아 ‘무이자’로 융통한다. 세입자는 목돈을 보증금으로 내고 내 집 마련을 위한 징검다리로 활용했다. 사적인 금융과 주거, 집값 상승 기대감이 결합해 만들어진 한국만의 독특한 제도다. 전세라는 단어조차도 없는 해외에서는 “남의 집에서 몇년간 살다 나가는데 왜 사용료(월세)도 안 받고 왜 돈(보증금)을 그대로 돌려주느냐”며 신기해할 정도다.
전세 소멸은 처음 나온 얘기가 아니다.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도 전세대란이 일자 “전세는 하나의 추억이 될 것”이라며 전세 시대의 종말을 내걸었다. 하지만 반전세와 월세가 폭등하며 실패로 끝났다.
무엇보다 전세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세입자 입장에서도 월세보다 더 저렴하게 살 수 있어서다. 월세는 소득의 상당 부분을 현금으로 내야 하는 만큼 목돈 마련이 어렵다. 내 집 마련을 목표로 하는 이들에게 매달 나가는 월세는 큰 부담이다.
이를 뒤집어 보면 집주인에게도 전세 제도는 자산을 불릴 수 있는 든든한 ‘투자 사다리’ 였다. 돈이 없는 세입자가 은행 대출을 받아 상대적으로 돈이 많은 집주인의 갭투자(전세를 끼고 주택을 매입하는 투자 방식)를 돕기 때문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세입자가 미래에 자신이 살 집값을 올리는 역할을 하는 것과 같다. 국토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집값과 전셋값은 서로 끌어당기며 상호작용을 한다.
또 서민 주거 안정을 위해 앞선 정부들이 전세대출을 풀면서 보증금 규모도 커졌다. 초기엔 전세대출이 주거 안정을 위해 쓰였지만, 보증금 덩치가 커지면서 성격이 변질됐다. 애초 도입 취지와 달리 전셋값 상승과 집값을 부양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세입자에게 받은 수억원대의 보증금을 집주인이 가만히 묶어둘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2018년쯤 저금리로 대출 부담이 줄고 아파트·빌라 가격 상승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자 자기 돈 한푼 없이 보증금만으로도 주택을 매입하는 ‘무자본 갭투자’가 전국적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결국 2022년 무자본 갭투자로 서울 빌라 300여채를 사들여 수백억원대 전세보증금을 가로챈 빌라왕 사건이 터졌다.
빌라왕을 시작으로 건축왕 등의 수십조원 규모의 대형 전세사기가 전국 곳곳에서 이어졌다. 그 피해는 사회 경험이 없는 2030 세대에게 집중됐다. 적지 않은 청년들이 자살을 했고, 정부는 뒤늦게 전세사기를 막기 위한 제도 개선에 나섰다. 하지만 사인 간 거래라는 특성상 집주인이 작정하고 나쁜 마음을 먹으면 전세사기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또 집값이 오르지 않으면 깡통전세(집주인 대출과 세입자의 전세보증금을 합한 금액이 매매가의 80%를 넘어서는 상태)와 역전세(전세 시세가 계약 당시보다 낮은 상황) 문제가 발생해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 소장은 “전세는 집값이 상승하고 경제가 고성장할 때 안전하게 유지될 수 있는 제도로, 저성장 국면 속 월세시대로 가는 건 불가피하다”며 “전세 중심의 기존 정책을 전환해 월세 시대의 연착륙 방안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