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단절, 민주주의 논의 촉구한 청년들 “극우화 단정 말고 기성세대 성찰해야”
김 총리, 청년 주도 사회적 공론화 지원…“대화 전제는 청년세대 내 다양성 인정”
지난 6월 10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투표용지 부족 사태 규탄 시국선언에 참석한 학생들이 “국가에 의한 참정권 침해 규탄한다”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 후 이를 규탄하는 청년들의 성명문, 서울 잠실 시위가 주목을 받았지만 모든 청년이 다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목소리’를 낸 청년들도 있다. 어떤 대학생들은 참정권 침해가 중대한 문제라고 짚으면서도 극우 세력과 명확히 선을 그어야 한다며 학생회와 별도의 성명문을 냈다. 이들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내 권리’만이 아니라 ‘모든 시민’의 참정권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 어떤 민주주의를 지향할 것인지를 제대로 논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른 목소리를 낸 대학생 4명을 지난 6월 15일 만나 좌담 형식으로 이번 사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4명 다 서울지역 대학에 재학 중인 20대 여성이다. 이들은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사회구조에 분노를 느낀 청년들이 대항할 방법과 대상을 찾지 못하던 상황에서 이번 사태로 터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내 권리’ 침해에 대한 분노가 ‘타인의 권리’, ‘공동체’에 대한 논의로 나아가지 못하는 점은 한계로 지적했다. 한 학생은 “총학생회들이 성명문에서 말하는 것이 투표용지 모자라지 않은 사회이냐. 어떤 민주주의를 원하는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 없다”며 “정치가 응답해야 하고, 청년들도 스스로 논의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했다.
정의감 있지만 감수성은 없는 청년들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대한 대학 학생회들의 대응은 12·3 불법 계엄 때보다 신속했다는 말이 나왔다. 선거 바로 다음 날부터 규탄 성명문이 쏟아졌다. 숭실대 학생인권위원회는 “언제, 누가, 어떻게 작성했는지도 모르는 성명문이 모든 학생의 이름으로 게시됐다. 얼마든지 의견 수렴을 위한 토론의 장을 개최할 수 있었지만, 학생들은 아무런 의견 표명을 하지 못했다”고 할 정도로 빨랐다. 반면 최근 몇년 사이 대학 내에선 ‘반페미니즘’, ‘반좌파’, ‘소수자 혐오’ 정서가 확산했고 ‘탈정치’라는 명분으로 자치활동이 위축됐다. 학생들은 대학 내 청소·경비노동자,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문제에 소극적이었는데 참정권 침해에 대해선 집단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낸 것이다.
A씨는 이를 “정의감은 있지만 감수성은 없는 상태”라고 표현했다. 청년들 안에 정의를 발휘해 효능감을 느끼고 싶은 감각은 있지만, 그 정의의 개념이 내 권리를 넘어 다른 시민의 권리나 공동체로 확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A씨는 “(정의의 개념이) 나 아닌 존재로, 소수자로 확장되지 않지만 이미 같은 계급이거나, 같은 시민권을 누리는 사람들에게 ‘룰’이 깨지는 문제에 있어서는 정말 예민하게 대응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지난 6월 9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학생회관 앞에 투표용지 부족 사태 관련 대자보가 붙어 있다. 연합뉴스
취업난과 고용 불안, 열악한 주거환경 등 청년들이 처한 문제가 많지만 정치는 이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윗세대는 경쟁과 능력주의, 물질 만능을 체내화했다. 청년들은 ‘각자도생’ 생존전략을 취할 수밖에 없다. 일각에선 청년들의 극우화·보수화를 우려하지만 B씨는 “2030이 다른 세대와 분리돼서 갑자기 ‘뿅’ 하고 나타난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A씨는 “지금 청년들은 어렸을 때 학원 뺑뺑이를 돌며 사교육을 받았고, 학교에선 입시가 중요했고 서열 매겨지는 게 당연했다”며 “우리가 받은 메시지는 ‘다 같이 시민이 돼야 해’, ‘좋은 세계를 만들어야 해’라는 게 아니라 ‘더 높이 올라가라’는 것이었다”고 했다. A씨는 “그렇기 때문에 같이 시민이 되려는 게 아니라 내가 도태되지 않기 위해 경쟁자를 줄이는 방식을 추구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청년들이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 대해 내 몫을 부당하게 나눠가지는 경쟁자로 느끼고, 불평등 해소보다는 주가 상승과 부동산 개발이 실용적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다.
스스로 정치에 참여하고 문제해결을 요구하는 “정치적 인간”이 되기에는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청년들은 ‘주권자’보다는 ‘소비자’의 위치에 머문다. A씨는 “삶이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느끼지만 어디에 화를 내야 하는지, 해결하기 위해 누구한테 힘을 실어줘야 하는지 등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표출할 방법을 청년 스스로도 모른다”고 했다. B씨도 “공교육에서 공적 감수성이나 역지사지, 좋은 사회란 무엇인가, 내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를 많이 배워야 하지만 ‘내가 잘되는 것’ 말고는 딱히 배우는 게 없었다”고 했다.
극우보수 진영의 역사 왜곡, 계엄 옹호 주장도 청년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B씨는 “5·18 민주화운동 같은 역사적인 것부터 ‘국가폭력을 가하면 안 된다’, ‘공동체 안에서 약자와 함께해야 한다’, ‘계엄을 해서는 안 된다’ 등 사회의 기본적 가치까지 흔들리고 도전받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청년들에게 유일하게 합의된 언어가 ‘내 권리’였던 것 같다”고 했다.
투표용지 충분한 것만 민주주의인가
학생회들은 성명문에서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특정 진영의 문제가 아니라며 정치적 해석을 배제했다. 다만 부정선거론에 명확히 선을 긋지 않은 것이 오히려 극우 세력에게 청년들이 이용될 여지를 남겼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 상황에서 발화하는 게 사실상 음모론을 지지하는 장작, 땔감으로 쓰일 여지가 많은데 그런 부분을 왜 경계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이 계속 남았다”는 게 C씨의 말이다. ‘탈정치’라는 기치 속에서 학생회들의 성명문은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민주주의의 붕괴”라고 세게 비판하면서도 궁극적으로 어떤 민주주의를 꿈꾸는지,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은지에 대한 상은 ‘공백’으로 남겨놓았다.
D씨는 “참정권이라고 하면 선거에 몇세 이상만 나갈 수 있는 문제 등도 함께 논의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물질적으로 표를 받지 못했다, 한표를 행사하지 못했다는 것에만 집중하는 게 모순적이라고 느껴졌다”고 했다. D씨는 “물질적으로 표 몇장이 더 있었으면 우리의 참정권은 침해가 안 된 것인가”라며 “학생사회에서는 앞으로 어떤 사회를 꿈꾸는가를 이야기해야 하지 않나”라고 했다.
김민석 국무총리가 지난 6월 7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투표용지 부족 사태 관련 간담회에 참석한 대학생 대표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A씨도 학생회들 성명문을 보고 “투표용지만 모자라지 않으면 모든 게 해결된 민주주의 사회인 것인가”라고 느꼈다고 했다. A씨는 “여성이 세상의 반이지만 여성 당선자는 한 자릿수에 머물고 있고, 청년들이 취업에 바빠 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것도 참정권의 문제인데 왜 이런 것에 대해서는 문제 제기하지 않느냐”며 “시민으로서 정치에 참여할 수 없게 만드는 구조가 일상에 내재해 있는데 투표용지가 모자라다, 투표용지를 채워달라고만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했다.
인권을 고민하는 17개 대학 모임은 지난 6월 6일 공동 성명문에서 “투표용지 부족 사태와 선관위의 부실한 대응을 규탄하며 학생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바람을 드러냈지만, 이로 인한 당혹스러움과 분노를 음모론으로 허비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이들은 “투표의 현장에서 소외되고 침묵당하는 구성원들의 아픔에 연대하는 목소리로 이어나가야 한다”며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배제를, 턱없이 비싼 집값과 높은 물가를, 학교와 일터에서의 경쟁과 스트레스를, 차별과 혐오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를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중앙대 인권네트워크는 별도 성명문을 내 “민주주의에 대한 학내 구성원들의 뜨거운 관심과 학생사회의 능동적인 움직임은 분명 긍정적인 변화”라면서도 “핵심은 그것을 우리 대학 공동체의 언어로 어떻게 전유하고 발전시킬 것인가에 있다”고 했다. 이들은 “지금 학생사회에 필요한 것은 단순한 규탄의 반복이 아니라 우리 대학 공동체가 어떠한 민주주의를 지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책임 있는 논의”라고 했다.
구체적·다양한 의제, 정치로 풀어야
정치는 이번 사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김민석 국무총리는 지난 6월 22일 “청년 주도의 사회적 공론화를 지원해보고자 한다”고 밝혔다. 김 총리는 “그동안 우리 정치권이 청년이나 대학생들과 소통이 부족했다. 이번 참정권 문제를 계기로 청년들이 직접 나서서 토론하는 플랫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대화는 필요하다. C씨는 “정치권도 책임이 있지만 시민으로서도 (청년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대화를 걸어야 할지 막막한 부분이 있다”며 “그럼에도 ‘진짜 왜 그래?’라고 계속 물어보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같이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 6월 9일 서울 광진구 건국대에서 학생들이 “민주주의 가면 쓴 극우 발의 시국선언에 반대한다”며 집회를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중앙대 인권네트워크가 지난 6월 6일 낸 성명문. 학생사회가 극우 세력과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 하고, 어떤 민주주의를 지향할 것인지 제대로 논의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중앙대 인권네트워크 인스타그램
대화의 전제는 청년세대 내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청년세대 전체를 싸잡는, 거친 청년 담론으로는 제대로 된 대화가 되기 어렵다. B씨는 “이번 사태에서도 부정선거론에 힘을 싣고 싶지 않아 올림픽공원 시위에 나가지 않은 청년이 많다. ‘청년세대가 화났다’는 문장만으로는 다양성이 포착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D씨도 “기성세대는 청년들이 굉장히 극우화돼 있고, 모두 능력주의와 학력주의라고 명명하겠지만 청년 내의 문제는 정말 다양하다”며 “청년세대를 일반화하지 않고, 청년세대 내의 다양한 사람의 존재를 좀 구체적으로 인식하면 좋겠다”고 했다.
특히 ‘청년=남성’ 구도가 문제라는 지적이 있다. 2016년 강남역 10번 출구 여성 살해 사건 후 10년간 페미니즘이 한국사회의 큰 이슈였지만, 더불어민주당이 성평등 의제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소위 ‘이대남’ 눈치를 본다는 비판이 있었다. D씨는 “올림픽공원 시위에 20대 남성이 많은 것은 청년의 문제로 여겨지고, 계엄 때 탄핵광장에 20대 여성이 많이 나간 것은 2030 여성의 문제로 이야기한다”며 “청년에 누구를 넣는가, 어떤 것을 청년의 여론으로 보는지도 기득권의 선택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B씨는 “‘집게손가락’은 일베와 펨코가 제기하면 청년의 목소리로 다뤄지는데, 총여학생회와 성평등위원회 폐지에 청년들이 싸우는 것은 정치로 대표되거나 다뤄지지 않으면서 무기력함이 든다”고 했다. 청년들과의 대화는 단순히 투표용지 부족 사태와 잠실 시위를 통해 표출된 분노에 국한해서는 안 되고 잠실 바깥의 청년들이 어떤 문제를 겪는지까지 제대로 살펴야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A씨는 “우리(청년)가 어디서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난 게 아니다”라고 재차 말했다. 그의 말이다. “학생들의 대자보가 민주당을 지지하거나 진보적인 성향의 어른들이 ‘요즘 청년들 다 우파는 아니네, 대견하네’라고 안심하는 데 쓰이지 않으면 좋겠어요. 또 ‘2030 남성은 손댈 수 없다, 어쩔 수 없다’고 혀 찰 일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요. 우리가 청년들을 어떻게 키웠나, 무엇을 가르쳤고, 어떤 세계를 만들었나 그 기반을 성찰하지 않으면 대화도 시작할 수 없어요. 청년들이 분노한다고 하니까 심기 거스르지 않게 대응해서 표만 지키려는 게 아니라 제발 상황을 제대로 해석해주면 좋겠어요. 혀 찰 일이 아니고, 대화를 시도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