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선거 주장은 단 1곳에 불과…“진상규명과 선관위 개혁” 외쳐
“전체 학생 대변 못 해” “부정선거론자들에 힘 실어줘” 일부선 비판
대학가 성명문 아카이브 사이트 ‘한 표의 기록’ 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 관련 대자보 워드클라우드. ‘한 표의 기록’ 갈무리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와 관련해 대학가에서 나온 391건의 대자보 중 부정선거를 주장한 사례는 단 1건(트루스포럼)에 불과한 것으로 확인됐다. 재선거·재투표 요구도 단 13건(3.3%)으로 드물었다. 대신 대학생들은 진상규명과 책임자 문책, 선관위 개혁을 외쳤다.
학내 일각에서는 총학생회 대자보가 온라인 여론에만 민감하게 반응해 작성됐다며 결과적으로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에게 힘을 실어줬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에 정치권과 언론이 이번 사안을 청년 일반의 의제로 섣불리 규정해선 안 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주간경향은 성명문 아카이브 사이트 ‘한 표의 기록’에 게재된 대학가 대자보(개인 작성 포함) 391건(6월 16일 기준)을 전수 분석했다. 분석 대상은 전국 대학 총학생회·단과대 학생회·동아리·개별 학생이 올린 대자보로 한정했다. 대자보는 사태가 처음 불거진 6월 3일부터 게재되기 시작해 6월 5일(155건)과 6월 6일(161건) 폭발적으로 게시됐고, 이후로는 6월 7일 29건→8일 10건→9일 3건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부정선거 주장은 단 1건…전수 분석 결과
대자보를 통해 부정선거(0.3%)를 주장하는 목소리는 극우성향 청년단체인 트루스포럼 1곳에 불과했다. 트루스포럼은 이번 사태 이전부터 부정선거론을 펼쳐온 단체다. 6월 12일 트루스포럼의 시국선언 계획이 알려지자 서울대 재학생들은 “선관위를 향한 정당한 분노를 극우 운동에 이용하려 한다”며 반발하기도 했다.
6월 9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학생회관 앞에 성대신문 등 교내 언론사 학생들이 작성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 관련 중앙선관위 규탄 대자보가 붙어 있다. 연합뉴스
정치권과 잠실 시위 현장에서 반복된 ‘재선거’ 요구도 대자보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전체 대자보 중 단 13건(3.3%)에서만 재선거·재투표 요구가 나왔다. 그중 전체 학생대표기구 차원의 성명서는 3곳뿐이었다. 한동대 총학생회는 학생총회 의결을 거쳐 “전국적인 재선거를 포함한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후속 조치를 촉구한다”고 요구했다.
오히려 대자보에서 부정선거는 ‘음모론을 배격해야 한다’는 맥락에서 거론됐다. 아주대 학회인 ‘노학연대’는 “우리는 부정선거 의혹이나 재투표와 같은 특정 정치적 주장을 제기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니다”라며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특정 국가나 집단이 의도적으로 개입해 부정선거를 일으켰다는 음모론의 근거로 활용되는 것을 강력히 배격한다”고 밝혔다.
이는 대학생들의 대자보가 음모론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투표권이라는 헌법적 가치 훼손에 분노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대자보에서 ‘한 표’, ‘투표권’, ‘공정’, ‘신뢰’ 등의 단어가 반복·강조된 것도 무관치 않다. 연세대 총학생회 중앙운영위는 “국민의 참정권이 제한될 수 있는 치명적인 위험성을, 한낱 확률적 계산과 비용 절감의 논리로 치환해버린 오만의 결과”라고 선관위를 규탄했다. 내 권리를 숫자 취급했다는 데 대한 분노다.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는 ‘참정권’, ‘민주주의’
실제로 대자보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는 단연 국민(97%), 민주주의(96%), 참정권(94%)이었다. 경북대 농업생명과학대는 “국민의 신뢰를 잃은 민주주의는 더 이상 민주주의라 불릴 수 없다”고 했고, 고려대 문과대 비상대책위원회는 “우리가 요구하는 책임은 침해당한 기본권을, 무참히 훼손된 참정권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을 근본적인 방도와 구체적인 방식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요구했다.
또 대부분 대자보에서 선관위의 부실한 선거 관리를 지적하는 ‘무능’, ‘책임’, ‘규탄’ 등의 단어가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경희대 중앙운영위원회는 “선관위의 총체적 무능과 불투명한 사후 대처는 선거의 공정성을 심각하게 훼손했다”며 “주권을 도둑맞은 청년들의 분노를 외면한 채, 사태를 축소하고 덮으려는 선관위의 기만을 우리는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뢰’라는 단어가 75%에 달하는 대자보에서 사용됐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신뢰가 무너지면 민주주의가 무너진다’는 맥락으로 쓰였다. 한국대학 총학생회 공동포럼은 “선거 시스템이 신뢰를 잃는 순간, 권력은 설득력을 잃는다. 신뢰는 선거라는 과정이 완벽하게 지켜질 때만 성립한다”며 절차가 지켜지지 않는 것의 심각성을 경고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절차’ 역시 58%의 대자보에서 쓰일 만큼 강조됐다.
대학가 성명문 아카이브 사이트 ‘한 표의 기록’ . ‘한 표의 기록’ 갈무리
대자보 아카이브 개발자 “민주적 절차 흔들려 분노한 것”
대학생들의 대자보에 시대 정신이 담겼다고 보고 이를 수집해 공개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대학생들의 대자보를 취합해 게시한 사이트 ‘한 표의 기록’ 개발자 A씨(28)는 주간경향과 인터뷰에서 “성명문을 읽을수록 이건 단순한 온라인 반응이 아니라 각 학교 학생들이 자기 자리에서 남긴 중요한 기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서로 약속하고 쓴 문장들이 아닌데도 전국의 학생들이 각자의 언어로 비슷한 권리의 문제를 말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대자보를 자료화하는 과정에서 A씨는 청년들이 민주적 절차의 훼손에 강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는 “(이번 사태는) 어릴 때부터 배워온 민주주의, 참정권, 자유, 권리 같은 상식이 부정당한 것”이라며 “한 표는 개인의 권리로도 볼 수 있는데 선관위 때문에 박탈당했다고 생각해서 대학생들이 분노하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A씨는 또 “이건 일시적인 분노라기보다 민주주의의 절차가 흔들렸다고 느낀 순간에는 학생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참여한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며 “진짜 의미는 청년들이 문제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극우 준동에 반대하는 건국대 구성원들’ 소속 학생들이 6월 9일 서울 광진구 건국대에서 극우 발의 시국선언 반대 집회를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온라인 여론 과잉 대표’ 학내 비판도
일각에서는 학생회 중심의 대자보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학생회가 대학 익명 커뮤니티 ‘에브리타임’, 인스타그램 등의 과잉대표된 온라인 공간의 여론에만 민감하게 반응해 폭넓은 공론화가 이뤄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숭실대 학생인권위원회는 6월 6일 대자보에서 “6월 5일 공개된 총학생회 명의의 성명문은, 1만3000 숭실 학우들을 대변하지 못했다”며 “(성명문이 급하게 작성되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아무런 의견 표명조차 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일부 부정선거 음모론자들과 극우 세력에 이용됐다는 비판도 나왔다. 중앙대 인권네트워크는 성명문에서 “학생사회에서 잇따라 내거는 성명문의 행렬이 민주주의의 회복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대응인지에는 의문이 남는다”며 “의도와 달리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의 서사에 이용되거나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민주주의적 가치를 오히려 훼손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부정선거론에 입장을 유보하거나 분명히 선을 긋지 않은 점이 음모론 확산과 같은 여론 왜곡에 동원됐다는 것이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3학년 김민수씨가 투표용지 부족 사태 관련 6월 5일 올린 1인 성명문 일부. ‘한 표의 기록’ 갈무리
총학생회가 낸 대자보와는 입장이 달라 개별적으로 성명을 발표한 학생도 있었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3학년 김민수씨(22)는 부정선거·불법 계엄을 옹호했던 학우가 총학생회 대자보 논의를 주도하는 것을 보고 1인 성명문 작성을 결심했다.
그는 주간경향과 인터뷰에서 “선관위 문제에 처음 당혹감을 느껴서 관련 자료를 찾다 보니 인스타그램에 계엄을 옹호하거나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출처의 자료가 많았다”며 “심지어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집회에 같이 나갔던 친구들도 그런 걸 올리는 것을 보면서 민주주의를 외치다가 오히려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꼴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썼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의 성명문에 대한 반응을 보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학생도 많다는 점을 알게 됐다고 전했다. 김씨는 “다수가 침묵하는 사이 소수의 사람만 목소리를 내서 민의가 왜곡되는 과정이 있을 수 있다”며 “부정선거를 주장하다가 시간이 지나서 ‘부실 선거와 구분되는 거구나’라고 정리된 친구도 있다”고 말했다.
대학가에서 나오는 대자보를 청년 모두의 의견으로 뭉뚱그릴 것이 아니라 다양한 목소리가 있음을 고려해야 하는 이유다. 김씨는 “언론이나 정치권에서 2030을 납작하게 순수한 목소리로 혹은 극우로 규정해선 안 된다고 본다”며 “불평등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청년 문제의) 대안을 제시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