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 참정권 회복 목소리 의미 있지만, 내 권리 앞세운 ‘소비자주의’ 한계도
“잠실에서 극우와 연결될 위험…기득권 된 민주당, 자만 버리고 대화 나서야”
6·3 지방선거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비판하며 재선거를 요구하는 시민들이 지난 6월 7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앞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정효진 기자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의 중심에 ‘청년’이 떠올랐다. 전국 대학의 총학생회 등 자치기구가 집단으로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규탄하는 성명문을 냈다. 이는 지난 6월 6~7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서의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이쪽(보수)도 저쪽(진보)도 청년을 찾는다. 지난 6월 9일 올림픽공원 현장에서 만난 한 중년 여성은 “(이번 시위는) 과거의 부정선거 시위와는 완전히 다르다. 청년들이 터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 노년 여성은 “청년들이 더 나와야 한다”고 외쳤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지난 6월 7일 총학생회 대표단을 직접 만났고, 이재명 대통령은 다음날 “문제를 지적하는 청년들에 대해 참으로 귀하고 존경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참정권이 국민주권의 상징이자 대의민주주의에서 국민의 가장 중요한 기본적 권리라는 점은 모두가 동의한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선거제도 개혁 필요성도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동시에 이번 사태에서 나타난 청년들의 움직임이 어떤 맥락 속에 놓여 있는지를 제대로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이번 시위는 의미와 함께 한계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를 지켜본 이들은 잠실 시위에서 강조된 ‘탈정치’ 구호가 대학사회에서 약자와 소수자 문제를 외면하는 데 활용돼왔다고 지적했다. ‘내 권리’와 ‘절차적 정의’를 중시하는 인식 속에서 이번 시위는 타인의 권리나 공동체적 논의로 확장되지 못하고 있다. 한 30대 청년은 잠실 시위에 대해 “극우가 주류화로 가는 위험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극우의 구호와 논리가 소위 ‘일반 청년’에게 공유되는 장이 열렸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한 것은 아니다. 그 배경엔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경쟁과 능력주의, 물질 만능을 체내화한 민주진보 진영이 있다. 그 정치의 공백 속에 극우가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시민들이 지난 6월 7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앞에 모여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규탄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이례적으로 신속했던 학생회들의 성명
대학 학생회들의 대응은 신속하게 이뤄졌다. 6월 3일 오후 잠실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 대학생 온라인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에타)에 문제를 제기하는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학생사회가 대응할 것을 촉구하는 글이 속속 나왔다. 만 하루가 되지 않은 6월 4일부터 학생회들이 곧바로 성명을 냈다. 비판 수위는 상당히 높았다. 이번 사태를 “헌정 질서의 유린”이자 “민주주의의 붕괴”로 규정했다. 6월 5~6일 100개 넘는 성명이 집중적으로 쏟아졌다.
여러 학생은 이번 사태에서 학생회들이 12·3 불법 계엄 때보다 적극적인 것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계엄 때도 학생회들이 규탄 성명을 냈지만 ‘정치적 사안을 학생사회가 대응해도 되느냐’는 논쟁이 붙었다는 것이다. 논쟁 끝에 ‘탄핵’, ‘사퇴’ 단어가 성명에서 빠지거나, 학생들의 광범위한 동의 절차가 없다는 이유로 집회가 열리지 않았다. 서울지역 대학생 A씨는 “계엄 때와 비교했을 때 이번 대처는 상당히 빨랐다”고 했다. 대학생 B씨도 “계엄도 좌우를 떠난 일이었지만 학생사회에 회부하는 게 어렵고 지지부진했는데, 이번엔 학생들이 움직여야 하는 이유가 제대로 논의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하게 회부된 느낌이 있었다”고 했다.
학생회들은 성명문에서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민주주의가 무너졌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평소 대학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살아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부정적 의견이 나온다. 이번 사태 직전까지 대학사회는 학생회 구성조차 힘들 정도였다. ‘탈정치’는 대학 자치활동을 위축시키는 근거로 활용됐다. 에타를 중심으로 ‘반페미니즘’, ‘반좌파’, ‘소수자 혐오’ 정서가 확산했고, 계엄 후엔 계엄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음모론이 캠퍼스로 들어왔다. B씨는 “에타에선 부정선거 이야기가 나온다”며 “(총학생회가 성명문에서) 정치적인 것을 뺀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라 굉장히 가치판단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것을 정치적이라고 하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청소년 인권활동가이자 사회학 연구자인 이은선씨(26)는 “(이번 시위가)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고 상식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매우 정치적인 문제”라며 “기존에 정치 혐오가 있는 상황에서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부정선거 의혹이 차곡차곡 쌓였고, ‘보통의 사람에게 생긴 나의 문제’라는 서사가 부여된 것 같다”고 했다. 이씨는 “청소년이나 장애인에게 참정권은 당연히 보장되는 게 아니고, 투표소가 멀거나 인구가 적은 지역의 사람들이 투표를 제대로 못 하는 문제도 있지만 그런 논의로 확장되지는 않는다”며 “청년들의 목소리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김민석 국무총리가 지난 6월 7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투표용지 부족 사태 관련 간담회에 참석한 대학생 대표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극우 구호, 논리 전파의 장이 된 잠실 시위
물론 청년들의 문제 제기를 싸잡아 극우화로 단정하는 것도 결코 맞지 않다. 대학생 C씨는 “학교에서 자신을 극우로 정체화한 사람들이 주된 세력이라거나, 그 세력이 에타를 다 작동시키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며 “다만 여성·성소수자의 존재를 부정하고, 부당한 권위주의에 동의하는 성향과 움직임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번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분명 선관위였다.
문제는 극우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점이다. 정치에 무관심했던 청년·시민들이 대거 올림픽공원 시위에 합류하면서 현장에서 극우 세력과 만나게 됐다. 부정선거론, 중국 혐오, 멸공, 스톱 더 스틸 등의 주장은 점점 커졌다. 시위 현장에 나가지 않더라도 인스타그램에서 극우의 언어는 밈으로 쓰이고 시위 참여 후기가 릴스로 퍼지고 있다.
서문일씨(37·활동명 컴덜)는 이런 상황이 민주진보 진영에 큰 위기라고 했다. 서씨는 “2030 남성들에게 정치적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지만, 이를 표출할 적절한 명분과 통로가 없었다. (이번 사태에서) 참고 있던 욕망이 터져나온 것인데 그 통로가 극우와 인접해 있는 것”이라며 “(올림픽공원에) 가서 함께하고 듣다 보면 적어도 5%는 합류할 수 있다. 극우가 인적 범위를 더 넓혀가고 사회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을 키울 수 있다”고 했다.
계엄 이후 탄핵 광장에 깃발을 들고 나갔던 서씨는 “내란 사태를 기점으로 (광장에서)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은 시민들과 시민사회 활동가들의 인간관계가 이어졌는데, 이런 인간관계가 저쪽(극우) 버전으로 생길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실제 올림픽공원 현장에서 만난 청년들은 시위에 처음 참여해본 경우가 많았다. 사회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직접 목소리를 내 해결을 요구하는 경험을 잠실 시위에서 체득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진보 진영이 사태 초반 소극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극우가 운신의 폭을 넓히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극우의 반대편 공간에서 이번 사태를 논의하는 장이 열리지 못하면서 중간지대의 청년·시민들이 잠실로 향했다. 미디어사회학자 박권일씨는 “참정권 침해라는 감정은 중요한 문제인데 (정치권에서) 이른바 ‘순수 일반 시민’과 극우를 동일시하면서 그들이 오히려 극우화되는 것을 방치하는 결과로 이어질까봐 우려스럽다”고 했다. 박씨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다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귀를 기울이고 말을 걸어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극우화되기가 쉽다.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적극적으로 대화를 시도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지난 6월 9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앞에서 시민들이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규탄하며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청년들의 보수화, 극우와의 연결을 우려하게 된 현실의 배경엔 민주당 정부가 한국사회의 불평등, 학벌 세습주의, 노동시장 착취 구조 등 청년들이 처한 어려움을 정책으로 풀어내지 못한 책임도 존재한다. 특히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의 입시비리는 진보 엘리트의 위선과 도덕적 해이에 대한 청년들의 분노가 촉발된 분기점이었다. ‘조국 수호’와 ‘조국 반대’의 진영 싸움 속에서 어떻게 불평등을 해소할 것인지는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다.
이 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 대통령은 조 전 대표를 사면했고, 입시비리에 대한 성찰과 사과는 불분명했다. 서문일씨는 “‘경쟁에서 승리한 쪽은 그 과실을 누려야 한다’는 2030 남성 청년의 서사 속에서 국민의힘은 원래부터 엘리트주의 정당이지만, ‘우리는 안 해먹겠다’고 했고, 경쟁에서 이긴 것도 아닌 아스팔트 운동권 민주당이 그랬을 때 더 화가 나는 것”이라고 했다. 이재명 정부에서 ‘코스피 9000시대’가 열렸지만, 정부는 개인의 주식투자를 장려할 뿐 불평등 해소 논의는 뒷전이다. 지난 5월 고용동향을 보면 15~29세 청년 취업자는 1년 전보다 25만5000명이 줄었다. 코로나19 영향으로 고용이 부진했던 2021년 1월 이후 가장 큰 감소 폭이다. 지난해 말 기준 ‘쉬었음 청년’은 71만명이다.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은 “민주당은 현재의 위기를 초래한 ‘기득권 카르텔’의 일부”라고 표현했다. 전 편집장은 통화에서 “(민주당이) 여러 차례 집권했고, 우리나라에서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게 김영삼 정부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라며 “외환위기 이후 주식으로 돈 버는 재미를 본 사람들이 주주 자본가 행세를 하며 그런 마인드를 무장하게 됐고, (지금 청년 세대가) 그들의 자녀들”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그런 맥락에서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대한 청년들의 움직임을 ‘주권자로서의 저항’이 아니라 ‘소비자로서의 항의’로 분석한다. 전 편집장은 페이스북 글에서 “20~30대에게 투표는 공동체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는 축제가 아니라 내가 시민으로서 세금과 의무라는 비용을 치르고 획득한 정당한 상품(권리)인 셈”이라며 “이들의 분노는 민주주의 가치의 훼손이라는 거시적 가치보다 내가 정당하게 산 물건(한표)을 점포(선관위)의 관리 부실로 배송받지 못했다는 소비자로서의 분노에 가깝다. 국가를 서비스 제공자로, 자신을 권리 소비자로 보는 신자유주의적 인간상이 반영된 결과”라고 했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왼쪽)와 한병도 원내대표가 지난 6월 17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 웃으며 입장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기득권 민주당, 낡고 오만함을 버려야
박태훈 진보당 대학생위원회 준비위원장도 민주진보 진영이 기득권이 됐다고 했다. 박 위원장은 “(민주당이) 집권당이기도 하지만 40~50대의 인구 구조상 보수 진영이 승리하기 쉽지 않은 선거 구도가 됐다. 앞으로 10~20년은 선거에서 거뜬할 것 같고, 이에 대한 청년들의 박탈감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청년 남성에게 진보정치가 가닿지 않았고, 그렇게 진보가 비워둔 자리를 극우가 차지했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박 위원장은 “진보가 집권해도 내 삶이 바뀌지 않는다는 게 제일 컸던 것 같다”며 “민주진보 진영이 기득권이 돼버렸기 때문에 ‘군부독재, 내란 세력을 타도하자’와 같은 단선적인 구호가 아니라 어떻게 대한민국을 더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 것인가에 대한 건설적인 작업을 하는 데 청년들을 호명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민주진보 진영에선 스스로는 바뀌지 않으면서 청년 극우화만 엄단하겠다는 태도가 읽힌다. 최근 “온라인상에서 (일베) 범죄는 탱크로 밀어버려야 한다”(유튜브채널 <매불쇼> 진행자 최욱씨)거나 “합법적인 방식으로 몽둥이를 드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정준희 한양대 에리카 정보사회미디어학과 겸임교수)는 말들은 청년 세대를 대하는 민주진보 진영의 낡은 인식을 드러낸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재명 대통령이 혐오 표현 대응책으로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 폐쇄’를 제시한 것도 다르지 않다. 이 대통령은 차별금지법 제정이나 성평등 정책엔 별달리 적극적 행보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은선씨는 “반공주의나 여성·성소수자 혐오는 예전부터 있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극우화가 새롭게 등장한 게 아니라는 것”이라며 “오히려 민주당이 많은 득표를 하는 게 당연해진 시점에 반민주당 정서를 극우화로 치부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고 했다. 이씨는 “(청년 극우화가) 휴대전화를 너무 많이 하고 운동을 안 해서 그렇다는 식의 단순한 접근으로는 반감만 커진다. 일베 폐쇄도 와닿지 않고, 과연 일베를 폐쇄한다고 문제가 해결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청년 문제가 복잡하고 다양한 만큼 보다 섬세한 해석과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 편집장은 잠실 시위만으로 극우 정서가 크게 번지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하면서도 무시해선 안 된다고 했다. 전 편집장은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이 하나의 화분이나 정원이라면 극우라는 씨앗이 번지기에 되게 좋은 조건을 갖고 있다”며 “(민주당이) 이번 지방선거에서 쉽게 승리를 낙관하고 극우를 소멸시킬 수 있을 것처럼 이야기한 자만심과 오만함으로는 (변화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불러낸 잠실 시위는 보름 넘게 이어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