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기술이 발전하면서 비판적 사고, 질문하는 능력이 중요한 역량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그러한 역량은 인문학에서 길러진다고 말한다. 이미지: 제미나이
“인공지능(AI)이 인문학 일자리를 파괴할 것입니다.”
올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 알렉스 카프 팔란티어 최고경영자(CEO)는 이렇게 말했다. 하버드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스탠퍼드 로스쿨을 거쳐 독일 괴테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카프의 이력을 봤을 때, 그의 발언은 이목을 집중시켰다. 카프 자신의 경험상 기존 대학 학위 중심의 인문학 전공자들이 기술을 모를 때 일자리 시장에서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의미였다. 반면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다니엘라 아모데이 앤트로픽 사장은 지난 2월 ABC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인문학 공부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해 화제를 모았다. 그는 “우리를 인간답게 해주는, 비판적 사고 능력과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능력은 미래에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했다.
외환위기를 거쳐 신자유주의 물살이 급격히 밀려오던 2000년대 초반 국내에선 “인문학 위기 선언”(고려대 문과대 교수진 및 출판인들의 ‘인문학 위기’ 선언, 2006. 9)이 잇달았다. 그로부터 20년. 최근 주요 대학 철학과 입시 경쟁률이 올라가고 서점가에선 인문학 책이 잘 팔린다. 인문학의 부흥을 알리는 신호일까. 한편 일부 대학들에선 철학과와 사회학과 등이 폐과되고, 인문학 전공자들은 여전히 취업 시장에서 고전한다. 인문학은 여전히 위기일까.
AI 시대 인문학의 위상은 달라질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빅테크 기업가들뿐만 아니라 철학자, 미래학자, 경제학자, 사회학자, 과학기술자 등 많은 전문가가 AI 시대의 경쟁력을 논할 때 기술 능력 못지않게 인문학적 역량을 중요하게 평가한다. 기술자는 인문학적 소양을 길러야 하고, 인문학자는 기술을 이해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다른 한편으론 AI 시대의 윤리, 법, 제도를 비롯해 인간소외 등의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인문학이 해법을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최근 서점가에서는 소설, 철학 서적 등이 인기를 끈다. 정지윤 선임기자
대학 철학과가 뜬다?…그 이유는
최근 몇 년새 대학 철학과 입시 경쟁률이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각 대학 홈페이지에 따르면 2026학년도 서울대 철학과 전체 전형 수시모집 경쟁률은 15.56 대 1로 인문대학에서 가장 높았다. 서울대 철학과는 2025년 수시모집에선 17.89 대 1, 2024년 수시모집에선 20.78 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2026학년도 고려대 철학과 수시모집 학생부종합 경쟁률(학업우수 24 대 1, 계열적합 22.33 대 1)도 20 대 1을 넘어 문과대학에서 가장 높았다. 고려대 철학과 역시 이전 연도 수시모집에서도 높은 경쟁률(학업우수 19.8 대 1, 계열적합 27 대 1)을 보였다.
흔히 인문학의 대표 격으로 ‘문학·사학·철학’을 꼽고, 2000년대 이후로 이들 학과를 나오면 “밥 굶는다”는 말이 따라다녔다. 클라우스 슈바프 세계경제포럼 회장이 디지털 기술 기반의 ‘4차 산업혁명’을 언급한 것이 2015년이었고, 이듬해 이세돌 9단과 AI ‘알파고’가 바둑 대국을 벌였다. 2022년 생성형 AI 챗GPT가 등장한 후 일상에서 누구나 AI를 접하는 시대가 됐다. 대학 철학과 인기가 높아진 배경에 AI 기술 발전이 영향을 미쳤을까.
권영우 고려대 철학과 교수는 “대학별로 철학과 입시 경쟁률이 수년 전부터 상당히 올라간 상태”라면서 “그런데 인공지능 시대라서 철학과에 학생들이 몰린다고 하긴 어렵다”고 했다. 권 교수는 “대학 입시 원서나 면접 등에서 지원자들이 AI 등 첨단기술과 연관해 철학과 지망 이유를 말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며 “고등학교 때부터 철학 공부를 굉장히 좋아하는 학생들이 철학과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고, 한편으론 로스쿨 진학을 염두에 둔 선택이라고 본다”고 했다. 그는 “LEET(법학적성시험) 문제가 논리적 추론을 하는 것이라서 로스쿨 진학 지망생들은 철학을 전공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고, 실제로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또한 AI와 연결해 철학에 관한 관심이 크게 확장됐다면 대학원 진학률도 같이 올라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권 교수는 설명했다.
경북대 철학과의 2026학년도 수시모집 교과우수자 전형 경쟁률은 19.67 대 1로 인문대학에서 노어노문학과와 함께 가장 높았다. 권홍우 경북대 철학과 교수는 “철학과 경쟁률이 올라간 것을 AI 기술 때문이라고 딱 말하기도 어렵고, 로스쿨 진학을 위한 선택이라는 것도 수도권 상위 대학들에는 맞는 해석인데 (로스쿨 진학 지망생이 적은) 비수도권 대학에선 꼭 맞는 해석도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그는 “과거에 철학과가 특이한 전공이라고 기피하는 문화가 있었다면 그런 인식이 좀 약해지고, 오히려 불확실성이 커진 시대가 되다 보니까 인문사회 분야를 전공하려는 학생들 안에서는 철학이 ‘범용 능력’을 키울 만한 학문으로서 인식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학생들의 생각은 어떨까. 2026학년도 계명대 철학과 수시모집 경쟁률은 31.8 대 1로 일반전형 내 최고 경쟁률을 기록했다. 계명대 철학과 재학생인 A씨(22)는 “철학 자체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다기보다는 (2026학년도 수능에서) 전체 수험생 수가 늘어난 상황에서 입시 눈치 경쟁을 통해 선택한 측면이 있을 것”이라며 “재학하는 동안 오히려 철학과를 이탈하는 학생들을 많이 봤다. 대학들에서 철학과 신입생 모집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일부 대학들에선 구조조정 차원에서 철학과를 폐과(2022년 원광대, 2025년 명지대)하는 사례도 있었다.
교수들과 학생들의 말들을 종합하면 대학 입시 경쟁률 수치가 보여주는 ‘철학과 인기’라는 현상 이면에는 AI 시대를 대비하는 선택부터 철학에 대한 순수한 관심, 로스쿨 진학, 범용 학문으로서의 효용, 모집인원 축소 등 다양한 이유가 섞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4월 26일 서울 청계천에 마련된 독서 공간 ‘책 읽는 맑은 냇가’에서 한 시민이 책을 읽고 있다. 성동훈 기자
인문학에 높아진 관심…취업 시장에선 여전히 ‘고민’
대학가에선 철학 수업 과목에 대한 타 전공 학생들의 관심이 높아진 현상도 확인된다. 권홍우 교수는 “7~8년 전 철학과 수업에 타 학과 학생이 40%였다면, 지금은 60% 정도까지 많아졌다”면서 “학생들로서는 전공 선택은 대세를 따를 수밖에 없는데, 대학에 와서는 ‘한번 해보고 싶은 공부’에 대한 로망 같은 게 있고, 그걸 실현하는 차원에서 철학 수업을 듣는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수원대 기계공학과 재학생인 B씨(19)는 “철학적인 어떤 주제를 두고 깊이 생각하고, 다양한 의견을 듣는 것이 재밌어서 고등학생 때부터 철학에 관심이 있는 편이었다”며 “대학 와서 인문교양 과목 중 철학 관련 수업을 찾아봤는데 시간이 안 맞아 못 들었지만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수강하고 싶다”고 말했다.
대학 밖 서점가에서도 인문학 서적이 인기를 끈다. 교보문고가 지난 6월 8일 발표한 ‘2026 상반기 베스트셀러 트렌드’를 보면 <프로젝트 헤일메리>,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자몽살구클럽>, <모순>, <안녕이라 그랬어> 등 소설이 순위 상위권을 차지했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와 같은 철학 서적은 최근 2~3년간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새로운 현상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인문학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지속해왔다는 분석도 있다. 권영우 교수는 2022년 ‘철학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도 조사연구를 통한 철학의 위기에 대한 실증적 분석’이란 논문을 발표했다. 철학과의 위기가 실체가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에서 시작한 연구였다. 성인 1019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철학이 중요하다’(62.8%)는 응답이 ‘철학이 중요하지 않다’(6.3%)는 응답보다 10배가량 많았다. 대학교육에서 철학의 중요성을 묻는 말에 응답자의 54.2%가 ‘중요하다’고 답했다. ‘중요하지 않다’는 응답은 8.3%였다. 권 교수는 “사람들이 불합리나 불공정한 것을 봤을 때 분노하고, 어떤 상황이나 사건에 대해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자 하는데 그런 사고의 토대가 되는 철학에 대한 목마름은 인간 본성의 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만 취업 시장에 나갈 때 인문학, 사회과학을 포함한 ‘문과’ 전공자들은 고민이 깊다. 철학과 재학생 A씨는 “현실적으로 인문학 전공자가 인문학 자체만으로 도달할 수 있는 대표적인 진로는 교사, 교수 등의 직업인데 그 자리는 매우 제한적”이라며 “인문학 전공으로 살릴 수 있는 창의적이고, 업무를 기획하는 분야는 불안정한 일자리가 많다”고 말했다.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재학생인 C씨는 “AI 시대가 되면서 AI를 어떻게 잘 활용할 것인가 고민하면서 영향을 받지만, 인문학이 뜬다기보다는 오히려 주변에서는 취업 고민을 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인문사회과학 전공자들에게 더 기회가 온다든지 사회적으로 더 유의미하게 인정받기까지는 한계가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정부와 공공기관, 대학 등에서 취업 관련 강의·컨설팅을 하는 윤승규 취업 컨설턴트도 “취업 시장에서 인문학 전공자를 더 선호하거나, 혹은 취업준비생들이 인문학 스펙을 쌓기 위해 무언가를 더 한다든지 등의 변화가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기업 면접에서 타인을 도와준 경험을 구체적으로 묻거나 인간 본연성에 관한 생각을 묻는 질문, 그리고 여성 경력 단절, 젠더 갈등, 포괄적 차별금지법, 세대 갈등 해법 등 사회적인 현상에 관한 판단 등을 묻는 질문이 AI 시대 이전보다 늘어났다는 점은 새로운 변화로 보인다고 그는 말했다. ‘지하철에서 쓰러진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신의 약점 위주로만 자기소개해보세요’ 등의 질문이 예시다.
“질문·비판 능력 중요”…‘융합형 인재’ 주목
빅테크 기업가들은 개인의 능력과 관련해 인문학적 요소를 강조한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는 “AI는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량을 증폭시킨다”며 AI가 아니라 AI를 잘 쓰는 사람이 인재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는 AI가 사람의 일자리를 대거 대체할 것이라는 애초 자신의 전망이 틀렸다면서 “AI 사용에서도 인간적인 요소가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미래 인재가 갖춰야 할 역량으로 생각하는 능력, 적응력, 공감하는 능력, 신체운동지능 등 4가지를 꼽았다.
AI가 발전한 시대에서 인문사회과학을 바탕으로 한 역량이 중요해질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대학에서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특정 학과가 유망 학과로 위치가 바뀐다기보다, 해당 학문에서 터득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해졌다는 의미다. 윤 취업 컨설턴트는 “이제 기업에서는 ‘AI 도구를 쓸 수 있는가’를 묻지 않고 ‘AI를 활용해서 무엇을 만들어봤느냐’를 묻는다”며 “질문하는 능력, 비판하는 능력이 중요하게 됐고 그만큼 인문사회과학 소양을 키우는 일은 취업 준비에서도 중요해졌다”고 했다.
입시 전문가인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AI가 발전하면서 공인회계사, 변호사, 경영·경제 전공자들이 취업 시장에서 보면 특별함이 사라졌다. 논리적인 사고, 비판적 사고, 통찰력을 가지고 문제의식을 명확하게 할 수 있는 인재가 중요한 시대가 됐기 때문에 다른 학과와 융합할 여지가 큰 범용적인 학과, 철학이나 국문학, 심리학 등의 인문사회과학 학과가 적어도 ‘기피 학과’에서는 벗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임 대표는 “융합형 인재가 대세가 되다 보니까 대학에서도 융합학부, 자율전공학부, 무전공학부 등에 대한 선호가 커질 것”이라며 “입시 현장에서 문과, 인문학에 관한 관심은 조금은 높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고3 수험생인 D군(18·데이터사이언스학과 진학 희망)은 “이과 친구 중에서도 사탐(사회탐구), 생윤(생활과 윤리)을 선택하면서 그 분야에 관심이 좀 커졌고, 학교나 외부 강의에서 인문학 또는 AI 특강이 열리기도 하는데 ‘AI 시대에는 비판적 사고나 윤리적 사고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며 “인간이 AI에 대체된다고 하는데 인간의 감정 등 AI가 따라올 수 없는 분야가 있고, 또 알고리즘으로 편향된 정보를 받을 가능성이 있어서 AI 기술뿐만 아니라 인문학적 소양도 함께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융합형 인재’가 주목받고 있다. <AI는 인문학을 먹고 산다>의 저자 한지우 응용인문연구소 소장은 “앞으로 가장 필요한 인재상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엔지니어, 기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사람들의 깊은 욕구를 충족시킬 줄 아는 기획자, 기술을 도구로 활용해 예술적 즐거움과 새로운 가치를 전하는 예술가”라며 “결국 ‘인문학+기술’, ‘예술+기술’이라는 융합의 자리에서 가장 큰 기회가 열릴 것이고 콘텐츠 산업의 시대란 곧 이 융합형 인재의 시대를 뜻한다”고 했다.
과학기술 특성화 대학인 광주과학기술원(GIST)은 올해 동양철학·예술철학 분야 안강훈 교수와 언어철학·AI철학 분야 강진호 교수 등 미국 하버드대학 출신 철학 교수 2명을 임용했다. 인문사회과학부 학부장인 김건우 교수(법철학·AI철학 분야)와 더불어 ‘철학 교수 3인’ 체제가 됐다. 김 교수는 “GIST는 학사과정을 설립한 2010년부터 ‘이공계형 리버럴 아츠 칼리지’를 표방하면서 자연과학과 더불어 인문사회과학, 예체능 교육을 강조해왔다”며 “인문사회과학자들이 사회변화를 주도하는 과학기술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자연스럽듯, 과학기술 분야 종사자들로서도 인문사회 분야에 관심을 두는 일은 자기 분야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지극히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철학 교수 임용은 김 교수의 의지에서 출발했는데, 그는 “여러 상이한 분과 간 협동연구에서 철학이 컨트롤타워이자 중재자, 상호 번역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다”며 “개인적으로도 물리학과 과학철학을 공부했던 사람으로서 과학도, 공학도에게 인문사회 소양이 없으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투박하고 빈곤할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꼈다”고 했다.
‘대학 입시’만을 바라보는 교육 현장에서 융합형 인재를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김 교수는 “융합형·통합형 인재가 단기간에 만들어지진 않는다. ‘융합형 인재가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단순히 주입하기보다는 인문사회 분야의 보편적 소양이 부족한 상태에서의 전문성이 얼마나 위기 대응에 취약한 것인지 스스로 느끼게끔 하는 교육을 한다”고 했다. 이어 “학령기에는 전문적 기술이나 응용 교육보다는 기초, 보편 소양 교육이 강조돼야 한다”며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인력을 원하는 기업의 요구에는 부응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기업도 점차 이 같은 기조에 공감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또 “(학문적으로) 횡적으로는 인문사회와 과학기술을, 종적으로는 인간과 AI의 과거·현재·미래를 문명사적으로 아울러야 한다. AI에 대한 이른바 ‘초학제적’ 탐구가 요청된다”고 했다.
인문학의 쓸모에 관하여
“인문학이 뜬다”는 말은 곧 인문학의 쓸모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한지우 소장은 “최근 강연 현장에서 인문학에 관한 관심이 늘었다는 것을 체감한다”면서 “다만 인문학 본질적 이해로 이어지는지는 회의적”이라고 했다. 그는 “인문학을 또 하나의 ‘스펙’이나 ‘자기계발 도구’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코딩, 외국어, 경영 옆에 인문학이 새로운 품목으로 추가되는 식으로, 인문학이 가져야 할 가장 본질적 가치 ‘인간의 고유함과 깊이’가 또다시 효율과 성과의 언어로 환원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다”고 말했다.
인문학은 ‘비실용적’이라고 평가를 받는다. 한 소장은 “인문학이 지나치게 아카데믹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라며 스스로는 ‘인문학’보다는 ‘인문학적 감각’이라는 표현을 더 즐겨쓴다고 했다. 그는 “이 시대에 가장 대체 불가능한 인재는 ‘인플루언서’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에게 기쁨, 희망, 웃음, 동기부여, 위로, 각성 같은 감정을 일으키는 사람들”이라며 “사람을 설득하는 표현력(수사학·논리학), 타인의 감정에 깊이 공감하는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문학), 세상의 흐름과 변화를 읽어내는 안목(역사학·미래학), 고유한 차원의 사유(철학) 등의 역량이 모두 인문학에서 길러진다. 그런 의미에서 AI 시대에 인문학이야말로 ‘실용적’인 학문”이라고 했다.
AI 시대의 인문학을 논할 때 주로 개인적 차원에서 인문학의 쓰임에 대해 이야기한다. 거기서 나아가 인문학이 급속도로 변화하는 사회에서 인간이 마주할 문제들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 소장은 “최근 흥미로운 현상은 ‘철학 부재의 시대에 철학의 문제를 다루겠다’고 선언하는 인물들이 학계가 아닌 기업가 진영에서 나오고 있다는 점”이라며 “인문학자들은 AI 시대에 새롭게 등장하는 학문, 기술 윤리, 사회 문제 등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레오 14세 교황은 지난 5월 25일(현지시간) 즉위 후 첫 회칙 ‘위대한 인간성’을 발표하면서 AI 기술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신기술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AI 기술을 인간의 오만함을 뜻하는 ‘새로운 바벨탑’에 빗댔다. 이날 발표에는 크리스토퍼 올라 앤트로픽 공동창업자도 참석했다. 올라는 “AI 연구소는 옳은 일과 이익 간 상충하는 환경 속에서 운영된다”며 “이익에서 벗어난 외부 감시자가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철학자들의 문제의식도 궤를 같이한다. 권홍우 교수는 “국내 사회·정치적으로, 국제적으로 굉장히 혼란스러운데 AI 발전이 더해지면서 민주주의 위기라든지, 공정함을 빗겨나가는 일들이 많이 생길 것”이라며 “원론적인 말 같지만 건전한 토론과 비판을 통해서 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중요하고, 거기에서 인문학의 효용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권영우 교수는 “지금 사회는 AI로 사람을 이기고 경쟁해서 살아남는 법만 들여다본다. 그래서 AI에 자신의 지능을 위탁한다”며 “역설적으로 AI에 의지한 대중만 남고, 소수의 사람이 AI와 빅데이터를 소유한 채로 권력과 자본을 독점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고 했다. 그는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려고 하는 위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AI가 무서워서, 더 빨리 개발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인문학자들이나 대학이 AI 시대 인문학이 관심받는 분위기를 어떻게 띄워볼까 하면서 정작 중요한 문제는 손 놓고 있는 게 아닌가 자성이 필요하다. 인문학자들은 지금 이 세계가 어떻게 흘러가는가를 보고, 어떤 가치와 이상을 지향하고, 어떤 사회를 만들어나가야 하는지 성찰하고 비판하고 고민해야 한다. 그게 인문학의 역할”이라고 했다.
철학과 재학생 A씨의 현실 인식은 이렇다. “AI 시대에 인문학 전공자들이 맡아야 할 역할은 분명 이전보다 많아졌다고 생각합니다. AI 윤리, 인간의 책임 문제, 기술과 인간의 관계, 판단의 기준 등과 같은 영역에서 철학적 논의가 필요하고, 추상적인 담론으로 여겨졌던 문제들이 이제는 현실사회의 제도와 정책, 기술 개발 과정에 직접적으로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곧 ‘인문학 전공자의 미래가 밝아졌다’는 의미로 이어진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사회가 인문학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것과 실제로 인문학 전공자들에게 안정적인 진로와 구조적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AI 시대는 철학의 필요성을 드러내고 있지만, 동시에 인문학 전공자들에게는 이전보다 더 복합적인 역량과 현실적인 준비를 요구하는 시대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