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서로에게 뮤즈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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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서로에게 뮤즈인 사람들

입력 2026.06.12 15:11

수정 2026.06.12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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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서편제>·<빌리 엘리어트> 등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에서 서로에게 뮤즈인 네 할머니와 석구, 가을.  제공 라이브㈜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에서 서로에게 뮤즈인 네 할머니와 석구, 가을. 제공 라이브㈜

서브병이 시작됐다. 주인공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 같은 서브, 즉 조연들의 활약상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경북 칠곡 할머니들의 문해 과정을 다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과 러시아 혁명 이후 파리로 망명한 여성 화가의 삶을 그린 <렘피카>, 1980년대 영국 광산촌 소년의 성장담 <빌리 엘리어트>, 그리고 판소리의 비극적 계승을 다룬 <서편제> 등이 대표적이다. 국적도 시대도 다르지만, 작품들은 격변하는 근현대를 살아낸 인물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예술로 승화해 목소리를 찾는지 보여준다. 곁에서 응답하며 이들의 영감을 끌어낸 뮤즈들이 있기에 가능한 성장이다.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김재환 원작, 김하진 극작, 오경택 연출, 김혜성 작곡, 신선호 안무, 이엄지 무대, 원유섭 조명, 박상연 영상)은 실제 칠곡군 문해 학교 할머니들 이야기를 모티브로 무대화한 작품이다. 팔순 전후 네 할머니는 세상 두려울 게 없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가부장의 철벽, 급변하는 시대상의 온갖 생활고를 다 겪어냈다.

자식들 고단하지 않게 딱 3일만 아프고 죽으면 소원성취라고 주장하는 삶이다. 다만 그 험한 세월 살아내느라 한글을 못 읽는 게 한이었는데 동네 문해 학교 덕에 손주 동화책도 읽어줄 수 있어 겹으로 소원을 성취했는데 이제는 시를 쓰란다. 문해 학교 교사 가을(하은주·신진경 분)이 “삶이 바로 시”라고 설명해준다. 그렇다면 이미 시는 “천지 삐까리”다.

영란(구옥분·김아영 분)의 ‘손자’, 춘심(차청화·박채원·김나희 분)의 ‘팔팔한 나이 88세’, 인순(김미려·허순미 분)의 ‘첫사랑’, 분한(강하나·이예지 분)의 ‘내 이름’ 같은 시가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이 시들은 단순한 생활 시가 아니다. 일제강점기 소학교 시절부터 전쟁과 가난, 가부장제와 산업화를 통과하며 잃어버렸던 ‘가시나’ 시절을 다시 불러내는 기억의 시다. 자기 이름보다 누군가의 딸, 며느리, 아내, 어머니로 오래 불렸던 여성들이 노년에 이르러 처음으로 자기 삶의 화자가 되는 순간이다.

이들의 시가 화제가 되자 이를 기록하기 위해 서울서 내려온 다큐멘터리PD 석구(강정우·김지철·장민수 분)는 회의적이었던 처음과 달리 잃어버린 ‘가시나’를 다각도로 발굴하기 위해 노력한다. 할머니들은 석구와 가을을 통해 잃어버린 자신을 찾고, 석구와 가을은 할머니들을 통해 기록과 교육의 의미를 새롭게 배운다. 서로가 서로의 뮤즈가 되는 순간이다.

뮤지컬 <서편제>의 노년이 되어 해후한 송화와 동호의 ‘심청가’ 장면. 페이지원 제공

뮤지컬 <서편제>의 노년이 되어 해후한 송화와 동호의 ‘심청가’ 장면. 페이지원 제공

이에 반해 뮤지컬 <서편제>(이청준 원작, 윤일상 작곡, 조광화 대본·가사, 천유정 연출, 박동우 무대, 이형복 조명, 남수정 안무, 정재진 영상)의 송화(이자람·차지연·이봄소리·시은 분)와 동호(김경수·유현석·김준수 분)는 일찍 소리꾼의 삶을 시작해 고통스럽다. 자식들 안에 있는 한을 끄집어낸다고 떠돌이 생활을 하며 고생시켜온 유봉(서범석·박호산·김태한 분)의 집착은 반항과 증오를 낳는다.

의붓아들 동호는 가출해 대중음악으로 선회하고 가속화된 서구화로 소리꾼의 설 자리는 실종된다. 다급해진 유봉은 딸의 눈마저 멀게 한다. 세월이 흘러 대중음악계에서 질곡을 겪고 한 획을 긋게 된 동호는 송화를 애타게 찾지만 끝내 연이 닿지 않고 50년이 흘러간다.

드디어 해후한 노년의 송화와 동호. 멈췄던 상생의 대화가 ‘심청가’ 마지막 구절을 마무리하며 완성된다. 송화의 소리에 동호가 추임새를 놓는 7분여의 ‘심청가’ 완창은 작품의 절정이다. 나이 든 몸짓과 깊은 한은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을 단아하고 질곡하게 쏟아낸다. 송화는 아버지의 폭력을 소리로 승화하고 동호는 자신의 오해와 무심함을 송화의 고수가 되어 만회한다.

아르데코(직선과 기하학적 형태로 현대미를 추구한 양식)의 여왕으로 불리는 화가 타마라 드 렘피카(1898~1980)의 삶도 만만치 않다. 뮤지컬 <렘피카>(카슨 크레이처·맷 굴드 극본, 레이첼 채브킨 연출, 김태훈 협력연출)는 폴란드 귀족계급에서 온실 속 화초로 길러진 렘피카의 삶을 그의 파격적인 작품 중심으로 풀어낸다.

꿈같은 결혼과 폭력적인 러시아 혁명을 상징적인 안무와 조명 디자인으로 강조하며 막을 연다. 가부장제와 계급 질서 속에서 보호받다가 남편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몸과 존엄마저 거래하며 파리로 망명한 렘피카(김선영·박혜나·정선아 분)는 생존본능으로 살아간다. 남편(김우형·김민철 분)을 구하고, 딸 키제트(정지우·김소율·차유은 분)를 돌보며 예술노동자로 거듭난 렘피카의 화려한 아르데코풍은 고통스러운 노동의 결과다.

혼자서 완성되지 않는 인간

선과 면, 색채와 빛에 집착하며 감정을 박제한 듯 차갑고 매끄러운 아름다움을 완성해낸 그만의 미학은 부자들이 선호하는 스타일이자, 동시에 자기 내면의 고통을 노출하지 않기 위한 갑옷이다. 넘버 ‘파리는 파리’처럼 전쟁 전후에도 소비와 쾌락을 지속하는 도시의 무심함을 반영하는 그의 차가움은 라파엘라(차지연·린아·손승연 분)와 수지(최정원·김혜미 분)를 만나며 균열을 일으킨다.

단순한 모델에서 연인, 친구였던 이들은 렘피카 안에 감금된 또 다른 성적 욕망과 고뇌를 재배열하고 작품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렘피카는 결국 라파엘라도, 남편도, 친우들도 떠나보낸다. 노년의 렘피카가 돌아보는 삶은 모든 상실을 아르데코적 기법에 압축하고 봉합해 고독한 노동을 잘 숨겨낸 독창적 파격이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 서로의 세상을 응원하는 빌리와 마이클. 신시컴퍼니 제공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 서로의 세상을 응원하는 빌리와 마이클. 신시컴퍼니 제공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리홀 극본, 스티븐 달드리 연출, 엘튼 존 음악, 이재은·이지영 협력연출, 이정권·신현지 협력안무)에도 작지만 큰 아우라를 전파하는 뮤즈가 등장한다. 1984년 영국 광부 파업을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은 절망의 나락 속에서 희망찬 미래를 꿈꾸는 광산촌 소년 빌리(김승주·박지후·김우진·조윤우 분)의 성장기다. 광부인 빌리 아버지(조정근·최동원 분)와 형 토니(구준모 분)는 앞장서서 투쟁 중이다. 노동자 계급의 자존심과 생존의 불안, 분노가 어우러진 배신과 연대가 무대 오프닝부터 작품 전체를 채워나간다.

빌리가 우연히 미세스 윌킨슨(최정원·전수미 분)과 엮이면서 광산촌과 어울리지 않는 발레에 눈뜨고 천재성을 보이며 로열발레단 오디션을 보는 과정에서 빌리 할머니(박정자·민경옥·홍윤희 분)는 용기를 준다. 게이인 친구 마이클(이서준·이루리·김효빈·지윤호 분)도 마찬가지다. 암울한 광산촌에서 발레를 반대하는 모든 이들 사이에서 할머니와 마이클은 빌리의 꿈을 들어주고 이해받지 못하는 나날을 견디게 이끈다. 순간의 빛처럼 심신에 자유를 허락한 듯 높이, 멀리 날아가게 하는 춤에 대한 기억을 공유한다. 빌리의 천재성을 알아본 윌킨슨과 나중에 인정한 아버지보다 더 중요한 조력자들이다. 대표 넘버 ‘Electricity’에서 빌리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을 몸으로 폭발시키는 순간, 몸 안에는 꺼져가는 광산업 공동체의 지지와 할머니의 기억, 마이클의 응원이 함께 흐른다.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에서 할머니들과 지석구, 가을은 서로의 삶을 듣고 서로를 바꾼다. <서편제>에서 송화는 동호에게 소리의 근원을 되묻게 하고, <렘피카>에서 라파엘라와 수지는 렘피카의 감춰진 욕망을 호출한다. <빌리 엘리어트>에서 할머니와 마이클은 저물어가는 광산업에 매몰되지 않도록 빌리의 미래에 일찍 화답하며 날개를 달아주었다.

러시아의 사상가 미하일 바흐친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대화적 존재’라고 보았다. 인간은 혼자서 완성되지 않는다. 타인의 응답을 통해서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조연이라기보다 일종의 뮤즈들이다. 상대가 자기 목소리를 발견하도록 곁을 내주고 때로는 자극하고 기다리며, 마침내 스스로의 삶을 말할 수 있도록 응답하는 존재들이다. <렘피카>는 6월 20일,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6월 28일, <서편제>는 7월 19일, <빌리 엘리어트>는 7월 26일까지 상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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